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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2(마태복음 18장 21~35)
용서가 무엇인가요? 되갚지 않는 것입니다. 몸을 사용하는 물리적인 폭력이든 말로 하는 언어의 폭력이든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지 않는 것입니다. 몸에 생긴 상처든 마음에 생긴 상처든 상처를 상처로 되갚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용서하기가 강자에게 더 어렵나요, 약자에게 더 어렵나요? 강자가 용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사람은 일종의 피해를 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약자는 되갚을 능력이나 힘이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피해로 고스란히 남습니다. 강자가 입는 것은 피해라기보다는 일종의 손해이지요. 강자는 힘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되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약자는 어쩔 수 없게라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원망과 상처와 억울함은 남겠지요. 기꺼이는 아닐지라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되돌려 받을 권력이나 힘이 모자라서 억지로라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강자는 한두 번은 아량을 베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되갚거나 되돌려 받을 힘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약자가 되라는 요구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되라는 요구,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가 되라는 요구, 위대한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라는 요구입니다.
이렇게 원망과 아픔을 가진 약자가 용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습니다. 위신과 명예를 중시하는 강자는 용서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힘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배우인 안성기씨가 출연해서 화재를 모은 “라스트 나이츠(Last Knight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기사도의 명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황제의 지배를 받는 속국의 신하입니다. 그의 주인은 명예를 중시하는 매우 의롭고 존경스러운 영주입니다. 그런데 새로 제국의 장관이 된 인물이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지역 영주들에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며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의 영주에게도 뇌물을 바치라는 공문이 도착합니다. 영주는 그것을 거절하고 그로인해 장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결국 장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은 곧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으로 간주되어 영주는 사형을 당합니다. 장관이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강제로 뇌물을 뜯어내고 있는 것은 황제도 알고 모든 신하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황제는 영주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주는 죽고 장관은 황제 다음 최고의 위치인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영화의 결말에 주인공은 자신의 주인의 복수를 감행합니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총리가 된 원수를 죽여 버립니다. 그에게도 어쩌면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도 약자처럼 보이지만 강자였던 것이지요. 어쨌든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과 지역 영주를 착취하던 악한 총리를 죽여 버리자, 백성들과 군인들이 주인공과 그의 부하들을 영웅으로 떠받듭니다. 이때 황제에게는 고민거리가 생깁니다. 총리가 아무리 악한 자였어도 어쨌거나 총리는 바로 황제인 자신이 세운 자요, 자신의 대리자였기 때문에, 그런 총리를 죽인 것은 바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온 백성이 주인공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그를 존경해도 황제는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를 사형에 처합니다. 왜요? 황제의 권위와 위신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요, 세상의 나라의 속성입니다.
이처럼 왕이나 황제 같은 권력자들을 용서의 모델로 삼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무한한 용서를 설명하시면서 임금, 즉 왕을 비유로 삼은 데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와의 대화인 21-22절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주어진 비유 사이의 연관성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의도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편견, 그리고 그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편견을 흔들어 깨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베드로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에 관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기독교 신앙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백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물은 것입니다. 바로 용서, 즉 자비를 베풀고 은혜롭게 대하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일반적으로 세 번이면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기준에 의하면 베드로는 꽤나 신경 써서 나름 높은 기준을 가정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기준보다, 베드로가 나름 높이 잡은 기준보다 훨씬 높은 기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7과 10은 완전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여기에 7과 10이 합쳐진 70을 다시 완전수인 7번까지라도 하라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무한하게 베풀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자비는 계산되거나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특징이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설명으로 등장합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 이 서언은 용서에 관한 이 비유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빚을 탕감 받은 종에 빗댄 비유가 아니라 그 종들과 결산하는 임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우리가 아니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인상이 강하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서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무한한 용서를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물로 보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인물인 이 임금이 어떤 자비를 베풀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까? 바로 무한한 자비를 베푼 분, 즉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를 하시는 분일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임금이 정말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분”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들의 오해와 편견 속에 자리 잡은 왜곡된 메시아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임금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신 분으로 등장한다면 그는 분명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용서를 베풀지 않거나 용서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는 무한한 자비와는 거리가 먼 제한적인 용서를 베푼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은 임금과 같다.”는 주님의 비유는 하나의 역설이라는 사실입니다. 메시아를 권력자 왕으로 생각하고, 메시아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권력과 권위와 위계질서가 작용하는 제국과 같다는 편견을 흔들어놓기 위한 하나의 역설이었던 셈이지요.
우리는 그 동안 아무런 고민 없이 비유에 등장하는 임금이 하나님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에게 만 달란트 빚진 종의 관계에서 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큰 자비와 그 후에 다시 그 자비를 취소한 그의 행위를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지나갔습니다. 그가 한번은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그의 호의를 무시한 그 종에게 이미 베풀었던 자비를 취소하는 것은 왕으로서 당연한 행동이 아닌가, 하며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니까, 그는 그만한 권력을 휘두를 만하니까, 우리에게는 무한한 자비를 명령하면서 자신은 한번 만에 그 자비를 취소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안에도 메시아가 제국의 왕과 같은 분이라고 하는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신 메시아에 대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사상들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즉 하나님도, 우리의 구주이신 메시아도 세상의 왕국의 통치자들과 같은 권위적이고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존재일 것이라는 선입견입니다. 메시아는 구원자입니다. 구원자하면, 뭔가 구원할 수 있는 어떤 힘, 어떤 대단한 권위, 어떤 대단한 능력을 떠올립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것들을 깨부술 수 있는 어떤 대단한 힘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메시아와 세상의 힘 있는 권력자나 통치자를 동일시합니다. 잘 보십시오. 보수 정통 기독교인일수록 매우 권위적이고 큰 조직과 위계질서와 지도자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그의 섬김과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것은 교리에 국한할 뿐, 실제에서는 예수의 낮아짐, 희생, 섬김, 어린 아이처럼 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좀 전의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강조하신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가르침에 이어지는 본문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임금이 어떤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까? 그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무한한 자비를 베푼 임금일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대처럼 이 비유 속의 임금은 그렇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자비를 베푼 임금입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한 번 용서를 하고 종의 태도에 따라 입장을 바꿔버린, 그가 베푼 용서를 취소한 임금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액수를 탕감해 준 것은 매우 대단한 관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신에게 탕감을 받은 종의 무자비하고 괘씸한 행동을 생각하면 임금이 자신의 용서를 취소한 행동은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잠시 내려놓고 서두의 예수님의 대답에서 생각해봅시다.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임금의 행동은 이 말씀에 어긋나 보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무한한 자비를 가르치시고는 한번 만에 자신의 용서를 취소한 임금을 당신의 가르침의 모델로 제시하셨을까요?
저는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고도 동료의 빚 갚음을 기다려주지 못한 종의 무자비한 행동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거나, 하나님이 마지막에도 세상의 무자비한 죄악에 대해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는 무한한 자비를 요구하시고는 비유 속의 임금을 그 무한정한 자비의 모델로 제시하셨겠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드로의 일곱 번이라는 기준보다 한참 못한 용서를 베푸는 분이라고 말씀하는 셈이 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본문의 비유는 분명히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것에 관한 교훈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이에게 자비롭게 대하고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청나게 큰 자비를 베풀고 나서 한번 만에 그 자비를 취소하는 임금을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청중들 안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 특히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뒤흔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편견으로 정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는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왕의 모습을 한 메시아로서 무한한 용서가 가능하겠느냐, 자신이 용서를 베푼 자비와 용서를 단 한번 만에 취소할 수 있는 그러한 권력을 쥔 위계적이고 권위적이고 막강한 황제의 모습을 한 메시아가 어떻게 내가 말한 무한한 자비와 은혜와 용서를 실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기존의 메시아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이고 제국적이고 막강한 권력의 황제와 같은 신,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전제군주 같은 기독교는 예수께서 그리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신앙인은 예수의 길을 따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일수록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타종교나 비그리스도인에게 배타적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나 소수자들에게 자비롭기보다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성경에서 읽는 하나님, 그들이 아는 메시아가 왕의 모습을 한 권위적인 메시아, 황제와 같은 메시아, 무한히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강하고 위압적인 메시아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번만 자비를 베풀고 그 다음엔 그 자비를 취소해도 되는 그런 권력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메시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뿌리박힌 제국적이고 위계적인 하나님 나라, 권위적인 신앙으로는 용서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런 권위적인 존재로, 위계구조의 맨 꼭대기의 위치에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분으로 여기는 한, 예수가 가르치신 무한한 용서와 자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임금”이라는 상징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랍비들은 그들의 가르침에서 임금과 왕을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에는 왕이나 권력자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용서에 관한 본문의 비유는 사실 18장 전반부의 “누가 더 큽니까”의 논쟁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큽니까” 이에 대해 스캇 교수는 제자들도 제국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작은 것”에 대한 강조가 이어집니다.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0) “아흔 아홉 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13)의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처리하는 문제도 그 사람과 직접 상대하고 안 되면 최소한의 인원인 한두 사람에게 알리고 안 되면 두세 증인을 세우고 그리고 안 되면 교회 전체로 확대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것의 강조이지요. 또한 주님의 함께 하심도 가장 작은 단위인 두 세 사람과도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최소 단위, 작은 것에의 강조이지요. 그러다가 본문의 비유에 이른 것입니다. 이 맥락에 의하면 예수님은 임금이라는 큰 존재를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큰 것에 대한 집착, 메시아가 위계질서의 최상, 최고의 큰 존재일 것이라는 오해를 겨냥한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용서하기가 어려운 이들은 권한을 가진 입장의 사람들입니다. 권한이 없는 사람들, 지배하는 입장이 아닌 지배받는 입장의 사람들은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꺼이, 정말 마음에 내키는 용서는 아닐지라도. 속으로는 원한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어지니까요. 하지만 권한을 가진 자들은 용서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대상에게 “네까짓 게 뭔데.”하며 금세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베풀다가도 한계에 도달하면 “네가 감히!”하며 자신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하는 데에 왕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위계구조, 제국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이라는 권위자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권위적인 존재가 지배하고 군림하는 세상의 나라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 예수께서 구상하신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누군가 중요한 한 사람,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는 한 사람, 권위가 있고 중요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와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이 지도자로 인식되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는 평등과 자유가 존중되는 곳만이 가능합니다. 스스로 이렇게 겸손해지셔서 자신의 모든 권위와 특권과 지위를 내려놓으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의지하거나 지배받지 않으려는 자립적이고 홀로서는 신앙이 여러분에게 형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서 멀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이는 내 맘대로의 내 자유대로의 방종과 이기적인 자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내가 자유를 누렸다면, 내가 뭔가를 누렸다면 그것은 나와 관계된 모든 관계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기다려주고, 참아주었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나의 이기적인 자유와 평화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폭넓게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함 말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뭇 사람이 생각하듯 절대 왕권을 가진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절대자, 지배자, 군림하는 군주, 권위 있는 세력가가 아닙니다. 그는 약하고 외롭고 작은 자들의 보호자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왕이라고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권력을 맛본 이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백의 차원에서 부른 것이지 하나님이 스스로를 세상의 권력자인 왕으로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작아지셨습니다. 우리를 크게 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죽음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맛보고는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고 하실 때마다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일으켜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자신에게 메시아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드려내려 할 때마다 그들을 막고 말리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아니거나 메시아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한 없이 용서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초청하십니다. 왕으로서는, 왕이 맨 위에 있고 그 밑에 2인자가 있고 그 다음에 또 누가 있고 하는 위계질서, 계급구조, 그리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세상적인 구조로는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도 은혜와 사랑을 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에는 바로 이러한 낮아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그 예수의 길을 따라 용서와 자비와 은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처럼 낮아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교회에서든 지배자의 권한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의 용서의 길, 자비의 길, 사랑의 길을 따르려면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린 아이와 같이 나 자신을 낮추는 자만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