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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제11회 제10. 장엄정토분(제십 불국토의 장엄)
제10.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아름다운 불국토를 꾸민다.<세상을 장엄하다>
이 땅 진정한 불국토 건설과 정토의 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커다란 사원이 곳곳에 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것, 그것이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다. 길이 넓혀지고 공장이 서고 빌딩이 높이 솟는 것도 아니다. 이 땅에 반야행자가 있어야 한다. 공의 실천자가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연기의 이 법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아는 이가 있어야 한다. 반야바라밀법으로 이 세상을 정화했으되 정화했다는 마음의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 어디에도 안주하지 말라. 부디 안주하고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써보자 매이지 말고 살아보자. 결코 안주하거나 집착할 일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반야의 삶이 실현되리라. 이 땅이 정토화 되리라.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이라. 순간순간 깨어있으면 곳곳이 모두 안락국이다.
제10. 장엄정토분(제십 불국토의 장엄)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 부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 不.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 부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 不.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미는가?”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아살 응여 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 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 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 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 부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 不.
수보리여! 어떤 사람의 몸이 산들의 왕 수미산만큼 크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님을 설하셨으므로 큰 몸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십 장엄정토분
‘제 십(第十)분(分)에 장엄정토(莊嚴淨土)’ 그랬습니다.
‘정토를 장엄한다’
우리 세상을 장엄하는 거죠. 세상을 장엄하는 데는 일단은 뒤에 이제 이 담에 이제 나오지마는 보살이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 말하자면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위선(우선)은 인제, 그래서 여기에 32분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처음에 보면은
莊嚴淨土分 第十
장엄정토분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如來가 昔在燃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여래 석재연등불소 어법 유소득부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如來가 昔在燃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여래 석재연등불소 어법 유소득부
그랬어요.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있어서 얻은 바가 있는가?
그러니까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불야 세존
사실은, 사실 여하는 놔두고 이론상으로 보면은 연등부처님이 과거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이었고, 그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통해서 오늘날 사바세계의 부처가 되었다, 이런 그 설이 있잖아요. 그 설에 근거를 해서
於法(어법)에 有所得不(유소득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如來가 在燃燈佛所하사 於法에 實無所得이니다
여래 재연등불소 어법 실무소득
於法에 實無所得이니다
어법 실무소득
법에 대해서 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이것도 또한 수보리 말이라, 수보리 지가 뭘 안다고 부처님이 옛날에 연등 부처님인데(께) 얻었든지 말았든지 그걸 언급할 까닭이 없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주제넘은 거예요. 묻기야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내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대해서 얻은 게 있느냐?’ 라고 하긴 했어.
그렇지만 지가 대뜸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없습니다, 그런 일 사실 없습니다.’,
‘如來(여래)가 在燃燈佛所(재연등불소)하사 於法(어법)에 實無所得(실무소득)이니다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대해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아, 이거 이거 어떻게 보면 너무 건방지고 (일동 웃음) 사실은, 아니 그 과거, 까마득한 과거 생에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연등 부처님하고 둘이 앉아서 주고 받은 거 있었는지 없었는지 지가 뭐라고 ‘實無所得(실무소득)이니다 ’이렇게 말하느냐고요.
이것이 또 금강경 다운 그런 어법입니다.
이렇게 이제 경전을 결집을 하는데는 금강경의 분위기에 차~악 맞게, 뭐 이쯤되면 수보린들 부처님하고 최소한도 ‘무상위종(無相爲宗)’, 상 없는 문제에 대해서, 상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내가, 다른 문제라면은 내가 언급할 바가 아니지마는 최소한 무상에 대한 이야기라면 수보리도 부처님하고 맞장 뜰 수 있다 이거야. 그런 것입니다. 이거 완전히 맞짱 뜨는 거죠.
상, ‘무상 문제라면 내가 부처님인데(께) 양보할 이유가 없다’이거야.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이것도 참 우리가 음미하면요,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숨어있어요. 이 금강경 속에.
지극히 단순한 경전이지마는, 그 속에 그런 것도 막 혼자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막 그냥 이렇게 수보리를 막 욕도 해봤다가 쥐어박아 봤다가 이러면서 우리가 경전을 음미하는 것, 그것도 경전을 깊이 이해하는데 괜찮은 점이에요.
여기에 또 내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연등불(燃燈佛)’주1)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연등불(燃燈佛)’!
경전상에는 분명히 ‘연등불’ 자주 나와요. 이게 과연 실재한 부처님이냐?,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실재한 부처님이냐? 그거는 우리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등’은 뭐예요? 태울(사를)· 연(燃)자, 등불· 등(燈)자야.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
이게 이제 법화경에도 연등불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옛날에 까마득한 세월이 있었는데 거기에 어떤 왕이 있었고, 왕의 팔왕자가 있었는데 그 마지막 왕자가 출가해가지고 ‘묘광[묘광법사;妙光法師]’이라고 하는, 문수보살의 전신(前身)이죠. 그 분에게 공부를 했는데 연등 부처님이 되었다, 그 사람이 성불해서 연등부처님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 이야기가.
그러면서 이제 법화경에서 ‘내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혹 내 이야기도 하고, 혹은 남의 이야기도 하고, 혹 있는 이야기도 하고, 혹 없는 이야기도 한다. 그걸 나는 실제처럼 그냥 무작위로, 중생의 눈을 띄울(뜨게 할) 수만 있으면 무슨 이야기라도 내가 지어내어서 한다.’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말에 어떤 경안이라고 할까, 또 경에 대한 어떤 자신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 이런 이야기도 ‘연등’이라고 하는 게 ‘아 지혜의 눈을 뜬 것을 가지고 부처님이 석가모니가 말하자면 수기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결국은 뭐 지혜가 없으면 수기고 뭐고 이야기가 될 수가 없으니까, 그런 뜻이 아닐까 부처님 명호에 대한 그런 내 나름의 연구는 그렇습니다. 아무튼 거기까지가 연등불에 대한 한 단락의 이야기고, 그 다음에 이제 장엄불토의 문제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가?
그렇습니다. 이 자리도 우리 불교에서 아주 그 다 일가를 이룬 某某(모모)한 스님들이 꽉 자리를 하고 있어요. 이게 이제 우리 법회를 상당히 아름답고 아주 무게있게 장엄하는 일이 됩니다. 사람이 장엄하는 거예요. 행사 때, 좀 명성있는 이들이 오면은 자리를 빛내는 거예요.
자리를 빛낸다는 말을 내가 절실하게 근래에 느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장엄이란 게 뭐예요? 빛낸다는 뜻 아닙니까? 자리를 빛내는 것, 세상에는 사람이 있어야 자리를 빛내는 거야.
내가 자주 예를 들지마는, 그전에
오재봉[菁南(청남) 吳齋峯(오재봉);1908~1991]선생주2)인데(께) 공부한 사람이 있었어. 그러다가 부산에서 서예원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서예원을 했어. 지금은 뭐 저기 어디 뭐 전라도 어딘가 가 있다는데, 아 그 분이 한번 오재봉 선생이 돌아가시고 부산에 내려와 내인데(나에게) 꼭 찾아와. 찾아와서 꼭 하는 소리가 이래.
‘야, 우리 선생님 안 계시니까 부산이 텅 빈 것 같애!’이 사람도 이제 옛날에 이제 젊었을 때 절에 사셨던 분이라서
아, 부산이 텅 빈 것 같다, 이런 말을 해요. 서예가는 서예가로서의 어떤 그 스승이 안 계신 부산은 사람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거야. 부산이 텅 빈 것 같다, 이래. 내려와도 재미가 없다 이거야. 그래서 뭐 아니면 뭐라고 나라도 찾아왔다 이거지. 아 솔직하게 그렇게 얘기를 해. 그 얼마나 아주 이치에 맞는 말입니까!
아주 그 정말 꼭 맞는 말이에요.
그래 이제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는 거야, 사실은.
그런데 그건 사실이야, 우리 상식선에서 볼 때.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불야 세존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다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세존이시여!
不也(불야)라고 했잖아요.
불야니이다 세존이시여! 그랬잖아요.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 사실 상식선에서 보면 보살이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이야기였고
何以故오
하이고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莊嚴佛土者는 則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다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이것도 역시 ‘則非(즉비)’의 논리입니다. ‘즉비’가 나오잖아요.
莊嚴佛土者(장엄불토자)는 則非莊嚴(즉비장엄)일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다
훌륭한 인격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것에 집착한다면은, 그것이 오직 그것 뿐 이라고 한다면은 그것 또한 병이다.
그래서 ‘則非(즉비)’가 또 들어옵니다. ‘則非莊嚴(즉비장엄)’
금강경은 ‘즉비경’이라 해도 좋아요. ‘즉비경’금강경은 일명 ‘즉비경’이다.
그러면 뜻이 확 더 살아나죠. 뭐 ‘즉비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든지 하나를 더 붙여가지고,
則非莊嚴(즉비장엄)일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다 ,
이 이름이 장엄이다. 훌륭한 사람이 있어서 이 세상을 장엄하지마는, 그것은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 이 이름이 장엄이다.
금강경은 뭐 줄곧 이런 논리잖습니까?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
是故로 須菩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이와같이 훌륭한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이게 이제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그 다음에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게 이제 제2사구게, 금강경의 두 번째 사구게입니다.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그 마음이 난다.
낼지니라, 우정 내는 게 아니에요. 저절로 그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마음은 유야무야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 이뜻입니다.
바로 육조스님[六祖慧能(육조혜능)대사 ; 638~713]이 이 구절에서, 나무 팔러갔다가 이 구절을 들었다 라고 하는 그 뭡니까, 종보본(宗寶本)인가, 육조단경도 본이 여러 개 있는데, 돈황본(敦煌本)에는 이런 말 없어요. 그냥 금강경을 읽는 소리만 들었다라고만 돼 있지, 고게 또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을 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제 종보본에 나와 있습니다. 그게 이제 제일 완전한 본이에요, 사실은. 필사본이 돈황에서 여섯 개인가 발견되었는데, 다 달라. 왜냐? 전부 베껴 썼으니까, 필사니까. 필사하다보면 뭐 오자도 생기고, 다르게도 보고, 또 지 마음에 맞게도 쓰고, 지가 가지려고 하니까 지 맘에 맞게 쓸 수 밖에 없지.
그러다가 그게 딴 사람에게 전승이 되면 그게 마 정본인 줄 알고 그렇게 막 된 거예요. 그 돈황본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다 필사본이야. 그래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이 종보본이다, 이런 학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이야기가 아주 다양하게 잘 되어 있죠. 유주관계. 아주 그 이야기거리가 다양하게 잘 돼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은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이 소리를 듣고 깨쳤다 이거예요.
그래서 내가 서두에 그런 말을 했지요. ‘우리는 나무 한 짐 팔러 갔다가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짊어지고 돌아가는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이 육조스님이 바로 이 금강경 이 소리를 듣고, 나무 한 짐 그거 팔러 갔다가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한 짐을 지고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그 참 금강경에는 참 사연도 많지요. 그 중에서 너무 이런 대목이 얼마나 근사한 사연입니까?
정말 멋지죠. 그 분은 특히 중국 유교의 전통에는 충효뿐입니다. 세상 인생이 살아가는 목적이 나라에 충성하고 공직자가 되면은 저~밑에 면사무소 무슨 급사가 되어도 나라에 충성해야 돼. 그냥 서민도 나라에 충성해야 돼. 그 다음에 효도해야 돼. 부모에게 효도. 충효(忠孝), 두 가지 뿐이야. 공자가 그랬잖아요.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주3)라, 하나로 통했다하는 ‘그 하나는 뭡니까?’하고 누가 옆에서 물으니까 ‘충서이이의(忠恕而已矣)’이라, 충(忠)과 서(恕), 충성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제 후대에 와선 충효라 그래요. 충효. 충과 효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냥하고 살았어요. 육조스님도. 노행자죠.
행자도 아니지 뭐. 노씨 청년일 뿐이지.
그러다가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이야. 우리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게 돼 있어.
충효(忠孝)뿐만 아니라 그 애지중지 모셔야할 어머니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다 이거예요. 버릴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이거예요.
보다 더 다른 차원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이겁니다.
꼭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만 효도하는 게 아니다.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화상(和尙)주4) <동산양개화상사친서(洞山良价和尙辭親書)>주5) 에도 보면 그랬잖아요. 보통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무슨 온갖 효도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효도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효도의 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 말이야.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정말 만고의 바꿀 수 없는 그런 철두철미한 법인 줄 알았던 충효, 그것도 완전히 뒤바꿔가지고서 다른 사람, 다른 시각으로 충효를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된 거예요.
그게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라
우리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게 돼 있어.
그래서 저 앞에서 제4분에 ‘묘행무주(妙行無住)’, 그랬죠.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본래 우리 마음이 머물지 않게 돼 있어. 떠나면 이미 떠난 줄 알아야 돼.
그~ 이미 변해 버린 사람, 이미 떠나 버린 사람, 가지고 그 미련 떨고 그렇게 해봐야 그게 되돌아오지 않아. 떠났다 싶으면 얼른 펼쳐놨던 마음 싹 빨리 거둬들여야 돼요. 떠나기 전에 더 빨리 걷어들여 버려야 돼.
그게 우리 마음의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이라. 이 마음이 그냥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한 곳에 묶어 둘라고 그 부득부득 애를 써가면서 ‘이 뭣고’, ‘이 뭣고’하고 자꾸 묶어 봐야 그게 묶여지나, 그게 무소주(無所住)인데, 무소주인데
머물지 않게 되어 있는데 머물도록 하니까 그게 뭐 되는 게 아니라구요.
여기 뭐 참 정말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가 있어요.
須菩提야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是身이 爲大不아
시신위대부
수보리야!
이것도 전혀 딴 이야기예요. 꼭 이게 분(分) 이름이 무슨 ‘장엄정토(莊嚴淨土)’라고 했는데, 장엄정토는 중간에 한 단락 딱 있고 앞에는 연등불 이야기, 물론 이제 궁극적으로는 ‘즉비’로써 관통하고 있습니다마는 연등불도 결국은 ‘즉비’요, 그 다음에 장엄정토도 ‘즉비’요, 우리 마음도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 결국 그리고 그것도 ‘즉비’야.
그 다음에 여기에는 이제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하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그 몸뚱이가 수미산만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왕(王)’자는 산중에서 제일 크다고 해서 그냥 존경해서, 수미산을 존칭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왕(王)’자는.
‘(이 몸이)수미산만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是身이 爲大不아
시신위대부
이 몸이 크냐?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 언 심대 세존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다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 언 심대 세존
수보리가 말하기를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다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그거는 당치도 않는, 어떤 누구 몸이 수미산만한 몸뚱이가 있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야. 佛說非身(불설비신)이야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몸 아닌 것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다.
그냥 이야기를 해 볼 뿐이야. 이거는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면, 뜬금없이 수미산만한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 몸 만약에 있다면 얼마나 크겠는가? 크기야 크지. 그렇지만 그런 몸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이 말이야.
佛說非身(불설비신)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런 엉터리 몸, 이름은 큰 거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면 그와 같이 정말 수미산 만한 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사실인 거와 같이, 얼토당토 않는 사실인 것처럼,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인 것처럼,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는 그 실상을 꿰뚫어보면, 투시경을 말야, 투시안경을 보고 투시해 보면 사실은 수미산이라고 하는 이 몸뚱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뜻이에요. 그래서 엉뚱하게 이런 구절이 탁 들어있는 거라. 그래서 장엄정토라든지 무슨 뭐 온갖 이야기를 부정하는, ‘즉비’로써 부정하는 그런 그 내용이 바로 여기에서 수미산만한 몸뚱이를 이야기를 들어서 그와 같이 엉터리로 존재한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엉터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설법도 엉터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이제 미진도 엉터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삼천대천세계도 엉터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하 훌륭한 보살 좋지, 보살이 있어서 세상이 장엄돼 있는데 그것도 엉터리로 존재하는 것으로 그렇게 투시해보라.
그렇게 투시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일상에 해탈감에 젖어서 모~든 문제로부터 다 벗어나서 해탈감에 젖어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는 그런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스님들은 그 나름의 또 해석법과 안목이 물론 계시겠습니다마는 저는 뭐 이걸 어떻게 처리를 할까? 평소에 큰 고민이었어요. 수미산만한 몸뚱이를 왜 이야기를 했는가? 당치도 않는 소리, 그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상은 ‘즉비’의 투시경으로 가지고 꿰뚫어보면 당치도 않게 존재한다. 당치도 않게 존재한다 이거야. 우리는 캄캄한 눈을 가지고 보니까 그대로 여실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예도 있고, 재산도 있고, 권위도 있고, 뭐 온갖것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정말 당치도 않게 존재하는 것이다.
너무 엉터리다.
‘즉비’의 투시 안경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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