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한 태양폭풍은 오로라를 극광대로부터 훨씬 적도 쪽으로까지 넓게 확산시키기도 한다. 1989년 3월에 발생했던 태양폭풍은 북반구에서부터 시작해 남쪽 멕시코만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오로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보통 위도 30도 이내 저위도에서는 오로라를 관찰하기 힘들다.
그러나 역시 오로라는 지구를 벗어난 우주에서 바라볼 때 그 아름다움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오로라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주에서 관측하는 것이다. 지상에서는 단지 그 일부만 보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오로라 전체의 모습이 담긴 멋진 광경들은 주로 우주에서 촬영한 것들이다. 오로라는 우주왕복선 우주비행사들이 가장 필름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1989년 12월 20일 미국 파나마 전격 침공
파나마는16세기 스페인에게 점령되어 식민지가 된 파나마는 19세기 콜롬비아가 시몬 볼리바르 독립 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하면서 콜롬비아의 일개 주(州)로 함께 독립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중남미로의 영향력 확장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거점으로서 파나마를 주목하였다.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자 대지주,시몬 볼리바드]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중남미로의 영향력 확장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거점으로서 파나마를 주목하였다.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에 파나마 운하 착공을 위한 자금을 제시하고 사업에 착수하려 했지만 콜롬비아 상원이 대가를 더 요구하자 방침을 바꿔 파나마 지역의 토착 영주들이 콜롬비아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후원해 파나마를 1903년 독립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운하의 도면이라고 해야 되나 ;;]
이 파나마 운하의 권리는 사실상 영구 임대나 다름없어 미국은 파나마를 속국처럼 마음대로 다뤄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중남미에서도 좌파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의 열기가 고조되자 파나마에서도 운하에 대한 이권을 회수하려는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운하 수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운하에 대한 문제는 파나마 전체의 사활을 건 이슈였고 결국 예전처럼 무력 진압 따위를 할 수 없었던 미국은 어쩔 수 없이 1999년에 파나마 정부에 운하에 대한 모든 권한을 반환하기로 약속, 이를 실행하였다. 그럼에도 파나마에는 지금도 많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파나마 침공은 미국이 이 지역의 이권문제에 얼마나 민감한 지를 보여준다

[파나마 공화국의 독재자,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모레노]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2만 6천명의 미군이 민주헌정을 회복시키고 국제 마약거래 혐의자인 노리에가 대통령을 미국법정에 세우겠다는 구실로 파나마를 침공한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했던 1980년대는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1979년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가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쫓겨나자,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사우디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에게 지원한다. 니카라과 반군의 또 다른 자금 출처는 마약거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조지W부시]
1970년대 파나마 토리헤스 정권의 정보기관 책임자였던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밀착관계를 형성한다, 미국의 자금지원을 받으면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한다. 노리에가는 CIA의 동업자이자 하수인이었던 셈이다. 레이건 대통령 집권 직후인 1981년 토리헤스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CIA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로 사망하자 파나마의 실권을 장악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파나마 방위사령부를 공격하는 미군]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미국-노리에가 정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노리에가의 독재에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그가 마약밀매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퍼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미국은 친미적인 개혁세력을 내세워 파나마에 문민정부를 세우려는 공작을 시도하지만, 이를 눈치 챈 노리에가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다. 결국 1989년 12월 15일, 미국에 대해 전쟁상태를 선포한 파나마군에 의해 미군 장교 1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미군이 전격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1977년 미국과 파나마 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파나마 운하는 2000년에 파나마로 반환되도록 되어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런 반환의 결과는 다름 아닌 미군기지의 폐쇄였고, 이것은 곧 라틴 아메리카의 진보운동을 억압하는 주요 교두보의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미국으로선 파나마를 침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파나마침공 | 두산백과
1989년 12월 20일, 미국이 파나마의 민주헌정 회복과 국제 마약밀매 혐의자인 대통령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의 체포 등을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한 사건이다. 이 두 가지 이유 외에도 미국은 파나마 거주 미국인의 보호, 파나마운하 보호 등을 침공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듬해 1월 3일 노리에가가 미군에 체포됨으로써 침공은 14일 만에 끝났다. 미국의 최신예 전투기 F-117 스텔스기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는데,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노리에가는 체포 직후 국제 마약사범의 죄목으로 미국으로 이송된 뒤, 1992년 7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파나마침공은 미국의 명분과는 달리 국제법상 명확한 범죄행위이며, 미국이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취한 무력행사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실제로 국제연합에서도 미국의 침공을 '군사적 침공'으로 규정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사실은 침공 전 미국중앙정보국(CIA)과 노리에가 사이의 관계만 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중앙정보국은 1970년대 말부터 남미 국가들에 대한 감시활동 등의 명목으로 노리에가에게 1000만 달러 이상의 공작금을 건넸다. 1981년 대통령 토리호스(Omar Herrera Torrijos)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노리에가가 실권을 장악하고, 1983년 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대통령 위에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도 미국은 계속 노리에가를 지원하였다.
1985년 대통령이 바뀐 뒤에도 노리에가는 계속 권력을 독점하면서 마약밀매를 비롯한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1988년에는 국내외에서 노리에가의 비리가 잇따라 폭로되고, 미국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심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은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해 온 노리에가를 버리고, 침공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이율배반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몰타미소정상회담 [ Malta Conference , ─美蘇頂上會談 ]


- 1989년 12월 2일과 3일 지중해의 몰타 해역 선상(船上)에서 미국 대통령 부시와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 사이에 이루어진 회담.
이 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한다는 역사적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는 구체적 합의나 협정체결을 전제로 하지 않고, 미 ·소 양국의 정상이 만나 향후 세계사의 향방과 현안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였는데, 주된 논제는 동유럽의 변혁, 미 ·소의 군비축소, 경제협력, 남미와 중동의 지역분쟁해소 등이었다. 먼저 동유럽의 민주화와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에 대해 부시는 소련의 불간섭을 요구하였고, 고르바초프는 이들 국가의 변혁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동 ·서독의 통일에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다음으로 두 정상은 전략핵무기와 화학무기의 감축에 동의하고, 구체적 합의를 위해 90년 6월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하였다. 경제협력에 대해 부시는 소련이 이민제한철폐법을 제정하는 즉시 무역최혜국 대우,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참관인 자격 부여, 관세혜택 등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두 정상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을 점진적으로 군사기구가 아닌 정치적 기구로 그 성격을 변모시켜 나가기로 하고, 지역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 회담은 비록 여러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의견을 교환하였을 뿐 구체적인 협의는 다음으로 미루었으나, 대결에서 협력으로 가는 새로운 세계사의 흐름을 재확인하고 새 시대 국제질서의 방향을 제시한 회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