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리』(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는 1959년 동명(同名)
영화의 주제가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어렵게 살아 가는 주인공이 본의 아닌 억울한
범죄로 감옥에 간 사이에 아내가 정부(情夫)와 달아나 버렸습니다.
출옥(出獄) 후 어린 아들마저 없는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고, 시골로 낙향(落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살려고 서울로 몰려들던 때였지만,
주인공은 힘들고 무정한 서울 살이를 청산하고 아들과 시골로
내려가는 내용"으로, 그 당시 상영관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후
에도 온통 '눈물 바다' 였다고 전합니다.
1948년 19세의 나이로 데뷔한 「박재홍」(1924~1989) 선생은
'물레방아 도는 내력','울고넘는 박달재' 등 수 많은 히트 곡을
불렀습니다. 『유정천리』의 발매년도는 1959년으로,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이 곡은 히트를
하며 1960년도에 큰 인기를 누립니다.
1960년 3월 15일은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치르는 날이었습니다.
1959년 민주당은 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통령 후보
지명식에서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 면' 을 선출해
후보 등록을 마치게 됩니다.
당시로써는 '이승만 대통령'에 맞설 유일한 후보는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였죠. 후보 등록을 마친 '조병옥'은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신병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1960년 2월 15일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선거 불과 한 달을
남겨두고 사망을 합니다.
4년 전인 1956년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 선거 열흘 전에 '뇌일혈'로 호남선 열차 속에서 별세하는
비극이 벌어져 자유당 정권에 몸서리를 치던 국민들은 이런 일이
반복하자, 국민들은 '유정 천리' 의 가사를 바꿔 노래를 하면서
울분을 참지 못했으며,
『유정천리』곡이 퍼지면 퍼질수록 자유당은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았고, 가수 「박재홍」은 격동에 휘말려 경찰서 조사를 받기도 하고,
결국 국민 감정이 폭발해 1960년 3월15일에 벌어진 부정 선거는
자유당 정권의 말로(末路)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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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 드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 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 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 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