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진정한 히치콕의 서자로서의 스릴러
- [캐리](1976), [드레스트 투 킬](1980), [필사의 추적](1981), [침실의 표적](1984), [카인의 두 얼굴](1992)
드 팔마는 1973년 [시스터스]를 시작으로 [옵세션](1976)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뭐니뭐니해도 [캐리]를 시작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습니다. 공포 영화 걸작을 꼽으면 잊혀지지 않고 꼽히는 작품으로 사실 공포스러움보단 때론 서글픈 성장담이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하여 순결을 강요하는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와의 관계, 친구들 사이에서의 따돌림과 그녀의 초능력 등 모녀와 친구 관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공포 영화로 불리고 있습니다. 특히나 캐리(씨씨 스페이식)가 돼지 피를 뒤집어 쓴 장면의 충격과 놀라움은 어린 나이에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네요. 근래에 다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보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영화에 등장해도 씨씨 스페이식의 모습은 그저 캐리로만 보였네요. 많은 분들이 브라이언 드 팔마의 최고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캐리] 이후 [분노의 악령](1978)이란 작품이 있었으며 다음 작품이 바로 [드레스트 투 킬]입니다. 제가 본 비디오 제목은 [드레스트 투 킬]이었는데요. 처음엔 이 영화의 제목이 참으로 알쏭달쏭 했습니다. 딱히 인기 있는 비디오도 아니었던 작품이었는데 [캐리]에 이어 두 번째로 넋을 잃고 말았지요. [드레스트 투 킬]은 흔히 [싸이코]와 비견되는 작품입니다. 일부 장면 등이 마치 [싸이코]에 바친 오마주와 같았으니 말이죠. 지금은 배트맨의 집사로 더 유명한 마이클 케인의 충격적인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캐리]만큼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흥미로운 텍스트로써의 영화인데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절묘하게 스릴러로 완성한 작품으로 아마도 이중인격이라는 소재의 효시와 같은 작품 중 한 편입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코트를 입고 칼을 휘두르는 금발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공포스럽고 기괴하게 느껴지던 장면이었습니다. 종종 [싸이코]의 아류작이라고도 하지만 이 정도의 창의적인 아류작이라면 기꺼이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새는 이 정도의 싸이코 스릴러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필사의 추적]은 저처럼 지방 사람들에겐 구해서 보기 힘든 비디오였습니다. 발품을 팔아서 어렵게 보았던 영화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필사의 추적]은 [캐리]나 [드레스트 투 킬]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제 생각으로는 앞선 작품들과 [미션 임파서블]이나 [스네이크 아이]의 중간 성격의 작품으로 보이는군요. 앞선 작품들이 드 팔마의 성격이 아주 두드러진 영화였다면 [필사의 추적]은 일반적인 할리우드 스릴러의 구성 위에 자신의 색깔을 덧입힌 작품입니다. 우연히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살해 현장을 목격한 음향기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흔히 선량한 사람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구성은 딱히 특이할 게 없지요. 별 다른 흥미 요소가 없을 것 같지만 스릴러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드 팔마의 편집과 음향, 화면 분할 등의 테크닉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필사의 추적]을 드 팔마의 최고작으로 꼽기도 하니 아무래도 그의 역량은 70~80년대까지가 만개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1983년 걸출한 갱스터 걸작인 [스카페이스]를 완성한 이후 내놓은 [침실의 표적]입니다. [바디 더블]이라는 왠지 이상한 에로 영화 같은 느낌의 원제보다는 내용에 충실한 제목이라 하겠네요. [드레스트 투 킬]이 [싸이코]에 비견된다면 [침실의 표적]은 [이창]의 오마주와 같은 작품입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이창]이나 혹은 [디스터비아]와 거의 유사합니다. 훔쳐보는 주인공, 그리고 보는 대상이 위기에 빠지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선 자신이 도덕적인 위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설정이 거의 유사합니다. 다만 [이창]에선 휠체어를 타고 [디스터비아]에서는 전자발찌를 착용하지만 [침실의 표적]에선 주인공이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걸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은 [현기증]을 떠올리게 만들었지요. 그런 면에서 [침실의 표적]은 거의 히치콕의 모작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도 제겐 새로운 작품으로 더 이상 히치콕의 신작을 만날 수 없다면 드 팔마의 영화를 보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네요.
[침실의 표적] 이후 약 8년 만에 내놓은 [카인의 두 얼굴]은 그저 그와 히치콕에 대한 모든 것을 선보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때론 자신의 영화마저도 오마주 혹은 패러디에 가까운 설정과 화면을 선보인 [카인의 두 얼굴]은 평단의 반응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앞선 작품들이 모작이란 저 평가와 새로운 재해석이란 평가가 나뉘었던 것에 반해 역시나 다중인격을 소재로 완성된 [카인의 두 얼굴]은 그의 80년대 작품들만큼은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게 되었지요.

2) 갱스터 영화는 투잡인가
- [스카페이스](1983), [언터쳐블](1987), [칼리토](1993)
드 팔마의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스릴러가 많지만 이렇게 묶어 보니 갱스터 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 세 편이나 되는군요. [스카페이스]와 [칼리토]는 짝으로 묶을 수 있는 속편과도 같은 작품이지만 [언터쳐블]은 조금 다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 작품 모두 작품성도 좋지만 재미와 여운도 놓치지 않는 작품이란 것이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온 쿠바 청년의 조직 접수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스카페이스]는 알 파치노의 강렬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대부]의 모습을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파괴적인 모습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고 처절하게 저물어가는 인생을 그린 [스카페이스]라면 이미 저물어버린 인생의 뒤안길을 보여주는 [칼리토]의 모습 또한 인상적입니다. 마치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감옥에서 인생을 뒤돌아 보고 출소했다면 칼리토의 모습일까 하는 상상도 들었지요. 두 영화의 성격은 타오르는 불과 잔잔한 호수처럼 극과 극이지만 결국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형제의 작품과도 같습니다. 코폴라의 [대부]나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에 굳이 비교할 수 있는 갱스터 영화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 두 작품이 아닐까 하네요.



이에 반해 [언터쳐블]은 드 팔마의 역량을 할리우드 식으로 잘 풀어낸 근사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앞선 작품들처럼 심오하진 않지만 화려한 캐스팅을 바탕으로 금주법 시대를 재현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선악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릴 적 보았을 땐 [대부]나 [스카페이스] 같은 작품보다 훨씬 근사하고 마치 신세대 갱스터 영화처럼 보였지요. 케빈 코스트너를 필두로 로버트 드 니로와 숀 코너리, 올백 머리만 하면 갱스터 영화와 어울리는 앤디 가르시아까지 꿈의 캐스팅이었습니다. 그들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전함 포템킨]의 오뎃사 계단 장면을 오마주한 장면은 잊을 수가 없네요. 정말 드 팔마의 재능은 순수 창작보단 모방의 재해석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네요.

3) 블록버스터에 물들다
- [미션 임파서블](1996), [스네이크 아이](1998), [미션 투 마스](2000)
드 팔마 최고의 이력은 [미션 임파서블] 연출 이후가 아닐까 합니다. 시리즈 네 편 중 스릴러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1편을 최고로 꼽는 분들이 많겠지요. 저 역시 다른 세 편에 비해 뭔가 다른 질감의 화면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지배하는 배우들의 표정들에서 드 팔마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인지 결정적인 액션 장면이 마지막에야 있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특히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아서 어떻게 화면을 구성하고 관객의 심장의 조여야 하는지 아는 스릴러의 장인이 완성한 액션 스릴러라고 생각됩니다. 잘 떠올려 보면 아버지와 같은 짐의 배신과 마치 연인과도 같았던 클레어의 죽음 등 이단 헌트의 심정을 흔드는 인적 구성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별 다른 생각이 없었던 포스터 속의 톰 크루즈 옆 모습이 내포하는 의미가 다른 작품에 비해 남다른 듯 보이기도 하구요.



98년에 개봉한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스네이크 아이]는 당시에 상당한 기대를 모았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블록버스터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고 미지수였던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이 대성공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초반 30분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원샷으로 촬영된 경기장 장면은 마치 현기증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인물을 따라 가고 경기장 내의 모든 관객이 용의자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관객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으니까요. 드 팔마의 이런 실험들은 종종 과잉이 될 수도 있고 이야기꾼이라기보단 종종 장르의 장인에 머무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어느 장르에 한정된 감독을 작가로 칭송하기보단 장르의 달인인 장인 정도로 인식하는 게 어느 정도 팽배해져 있었던 때였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스네이크 아이]는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넓어진 드 팔마가 어느 정도 소신 있게 자신의 스타일을 밀어 부치다가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낳은 작품이었지만 여전히 즐길 구석이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2000년 [미션 투 마스]의 지독한 실패 이후 그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스네이크 아이]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던 기운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나 할까요, 당시엔 이상하리만치 SF 영화들이 푸대접을 받던 시기인데 [스타쉽 트루퍼스]로 폴 버호벤이 위태해졌고 같은 해 개봉한 [레드 플래닛] 또한 엄청난 실패를 기록했으니 비단 [미션 투 마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은근히 이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도 꽤나 있으니까요. 화성으로 탐사를 떠난 사람들이 미지의 생명체를 만난다는 설정은 [프로메테우스]와도 유사합니다. SF에서조차 드 팔마는 스릴러적인 구성으로 풀어내면서 그의 장기를 극대화 하려고 했던 것 같네요.

4) 초심으로 돌아가는가
- [팜므 파탈](2004), [블랙 달리아](2006), [패션, 위험한 열정](2013)


[미션 투 마스]의 실패 이후 그는 4년 만에 [팜므 파탈]로 돌아 옵니다. 호평과 혹평이 엇갈린 가운데 흥행 성적에서는 별 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지요. 이어서 완성된 [블랙 달리아]는 그의 작 중에 최악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화였지만 관객의 평가는 혹독하기만 했네요.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폴 버호벤의 [블랙북]은 [할로우맨] 이후 6년 만에 완성된 영화였지만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완전히 초심을 찾은 듯한 인상의 작품이었는데 드 팔마는 그렇지 못했네요. 그리고 [패션, 위험한 열정]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를 원작으로 직접 리메이크에 뛰어든 그의 도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내와 전세계적인 반응이 어떨지 모르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무얼 잘 하는지 정확히 깨닫고 있는 작품이라 항상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