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의 조건” 復活の条件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우연히 어쩌다가 예견치 않게 불행히도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누차 말씀해오셨을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계속해서 예언되어 왔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해주셨고, 죄인들을 용서해주셨으며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시기도 하셨지만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 만약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을 뿐이라면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인데, 거기서 끝나버린다면 예수님이 죽으시든 우리가 죽든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아야 하는데, 단지 죽으셨을 뿐이라면 용서를 받은 것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참혹한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 목전에서 죽으셨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통해서 모두 용서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대속, 즉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것이 안 됩니다. 부활이 없이 단순히
죽기만 하셨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죄는 아직도 용서 받지 못한 상태에 있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어서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증거가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이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이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혹 헷갈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예수님의 부활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을
보더라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죽은 아이를 엘리야가 살린 기록이 있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9장에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고,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는 상태에 있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베드로가 죽은 여제자 다비다(タビタ)를 살린 기록이 있고,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의 설교를 3층 창에
걸터앉아 듣고 있던 유두고(ユテコ)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가 길어지니까 깜빡 졸아서 그만 3층에서 떨어져서 죽고
맙니다. 하지만 이를 바울이 살렸다는 기록이 있지요.
이렇게 본다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도 별로 신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릅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처럼 죽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있었지만 이를 두고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이 때 살아났던 나사로가 아직도 살고 있나요? 유두고라는 청년이 아직 살아서, 아휴, 그때 바울
선생의 설교가 얼마나 길었는지 몰라요, 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들도 비록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수명이 되면 다른 사람들처럼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은 이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죽었다가 또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죽으시고는
거룩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6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죽음이 들어오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에 부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기 때문에 죽음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도 문제를 한 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두 가지 성경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대부분 모두 알고 계시리라 여겨지는 내용이니까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부활절, 정말 큰 잔칫날이지요. 잔칫날에는 포도주가 빠지면 안 된다고 하니 우리 포도주에 관한 두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이적을 행하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이적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갈릴리 가나 지역에 혼인잔치가 있어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함께 이 잔치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혼인잔치라면 대단히 중요한 자리인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져버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요한복음 2장 6절~11절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11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宴会の世話役は、すでに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を味見した。汲んだ給仕の者たちはそれがどこから来たのかを知っていたが、世話役は知らなかった。それで、
花婿を呼んで、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イエスはこれを最初のしるしとしてガリラヤのカナで行い、ご自分の栄光を現された。それで、弟子たちはイエスを信じた。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맹물을 포도주로, 그것도 순식간에 최고의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돌항아리에 물을
부었는데 이를 가져갈 때 색깔이 변했다는 기록은 없으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는 흰 포도주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갈릴리는 갈릴리 바다가 있고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모두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을 만큼 생선이 풍부한
어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잔치에도 아마 다양한 생선요리가 있었을 것인데, 생선요리에는 흰 포도주가 맞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신경을 쓰셔서 굳이 적포도주가 아닌 흰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자, 두 번째 내용은 포도주를 담아두는 부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2장 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まただれも、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ぶどう酒は皮袋を裂き、ぶどう酒も皮袋
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るものです。」
새 포도주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산성이 강하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 넣을 경우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숙성이 덜된 새 포도주는 반드시 튼튼한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잘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돌항아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포도주 새 부대가 나왔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이 돌항아리와 새 부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셔서 물을 붓기 전의 돌항아리와, 새 포도주를 붓기 전의 새
부대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부으라고 명하시기 전에 돌항아리 안에는 그 때까지 있었던
포도주를 다 마셔버렸기 때문에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 부대라고 하는 것은 아직 사용을 하지 않아서 아무리 독한 새 포도주를
붓더라도 견딜만한 상태의 부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빈 항아리와 빈 부대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과주스를 마셨어요. 그런데 조금 남은 상태에서 콜라를 따라서 마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과주스 맛이 안 남아 있을까요?
아니요.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음료를 마시기 위해서는 모두 비우고 깨끗이 씻은 다음에 부어야 합니다.
저도 가끔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잉크색을 검은 색을 썼다가 파란 색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대충 아무렇게나 파란색 잉크를 넣으면
되나요? 아니요. 안에 검은색 잉크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파란색 잉크를 넣으면 색깔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빨간색 잉크를
넣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여서 상당히 지저분한 색깔이 나오게 됩니다. 본래 색깔이 나오게 하려면 그 잉크통을
깨끗하게 닦아낸 다음에 새로운 색깔의 잉크를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회사에서 경력사원과 신입사원을 비교해 본다면, 경력사원을 뽑으면 곧바로 일을 시켜서 회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신입사원은 어때요? 회사 일은 고사하고 서류 하나 작성하지 못합니다. 서류는 무슨, 전화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신입사원이에요. 그러니까 신입사원을 뽑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몇 개월 동안 교육을 시킵니다. 전화 받는 법, 명함을
주고 받는 법, 옷 입는 법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도 신입사원들한테 돈을 받아 가면서가 아니라 꼬박꼬박 월급을
주면서 교육을 시켜요.
이렇게 본다면 신입사원을 뽑는 것보다 경력사원을 뽑는 것이 훨씬 이득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회사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력사원보다 신입사원 뽑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뭐겠어요. 경력사원은 다른 회사에 있다가 옮겨온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회사 업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하는 방식은 순수한 우리 회사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옮긴 사람은 대체적으로 봤을 때 두 번 옮길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반면에 신입사원을 뽑아서 제대로 써먹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키워놓으면 정말 그 회사에 애사심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을 보더라도 학교를 마치고 몇몇 회사에서 근무를 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첫 직장에 대한 애착이 제일 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시기 원하시는 그릇은 바로 다름 아닌 빈 그릇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순종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엇을 타셨습니까.
요한복음 12장 14절~15절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イエスはろばの子を見つけて、それに乗られた。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ある。
「恐れるな、娘シオン。見よ、あなたの王が来られる。ろばの子に乗って。」
예수님은 그 많은 짐승들 중에서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나귀는 어떤 나귀냐 하면,
마가복음 11장 2절을 봅니다.
마가복음 11장 2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向こうの村へ行きなさい。村に入るとすぐ、まだだれも乗ったことのない子ろばが、つながれているのに気がつくでしょう。それをほどいて、引いて来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기에 멋있고 빨리 달리는 말이나, 힘이 좋아서 무거운 것도 질 수 있는 황소가 아니라, 비록 어리고 힘도
없고 빨리 달리지는 못하지만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고르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다른 주인을 태워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 쓰시기에 불편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그 전에 섬겼던 주인의
가르침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짐승 다루는 법을 잘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오른발을 치면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만약에 전 주인은 오른발을 치면 왼쪽으로 가라고 가르쳤다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말이나 소라고 하더라도 어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생각대로 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자기를 비운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내가 가진 경험, 하물며 내 생각이나
내 고집을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거듭난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비교하는 것은 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좀 비교를 해본다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함께
했던 제자들의 교육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베드로나 요한 같이 대부분 고기잡이를 하던 서민들이었고, 그나마
세리였던 마태가 조금 학식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사도 바울은 압도적인 경력을 자랑합니다. 요즘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고시출신이지요. 좋은 학교를 나와서는
행정고시 같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후 고급관료로 등용되어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굳건히
믿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는 그야말로 이단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열성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때까지 쌓아왔던 지식과 경험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있던 당시, 사도행전 9장 1절~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1절~7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かして殺害しようと息巻き、大祭司のところに行って、
ダマスコの諸会堂宛ての手紙を求めた。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出し、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立ち上がって、町に入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告げられる。」
同行していた人たちは、声は聞こえてもだれも見えないので、ものも言えずに立っていた。
이 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삶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가 하면, 그는 양쪽에서 쫓기게 됩니다. 유대교 쪽에 있어서 그는 배신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라고 했더니만 오히려 예수를 전하고 있으니 배신자이지요. 그러니 그를 잡으려고 좇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는 원수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을 잡아서 죽이자고
난리들입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상황에 놓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고하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今私が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いのち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御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のです。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경험은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였다. 이제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 자랑은 내 학벌이나 내 경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리고 나아가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날 주님께서 오셨을 때 부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 우리 고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만, 정말 말은 쉽지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제가 이렇게 집 근처 골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좌우에 일시정지 표지판이 있고 제가 가는 쪽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나가면 양쪽에서 나오는 차는 정지를 해야 하는데, 제가 이렇게 가고 있으니까, 옆 차가 서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놀라서 경적을 울렸지요.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어요, 만약에 지나가면서 미안하다고 고개라도 좀 이렇게 숙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니, 이 아주머니가 계속 저를 째려보고 지나가는 거예요.
아, 정말 그 순간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걸 당장 그냥 확…… 그러면서 든 생각이 뭐겠습니까. 뭐? 내 생각, 내 고집을 비워?
그게 생각과 고집을 비운 사람의 모습인가요? 아니에요. 비우긴요. 자기 고집과 혈기로 똘똘 뭉친 사람의 모습이지요.
그러면서 아, 내가 이렇게 부족한 데도, 여러분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든 생각이,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여러분보다 믿음이 크게 좋아서거나, 여러분보다 크게 많이 알아서가
아니지요. 단지 제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요. 아직도 우리 안에 고집이 있고 우리 안에
혈기가 있고 그렇습니다. 없는 것 같다가도 자기도 모를 때에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아, 나도 아직 멀었구나.
주여, 이 믿음이 작고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何を見張るよりも、あなたの心を見守れ。いのちの泉はこれから湧く。
아무리 많이 성경을 읽었어도, 아무리 교회에 다녔어도, 우리는 아직 우리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고, 돌항아리와 새 부대, 그리고 새끼 나귀처럼 우리 마음을 비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마지막 날에 영광된
모습으로 부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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