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장산에 가다
오랫동안 경상남도에 살아온 나에게 단풍이란 마치 먼 길을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보고 싶지만 만나기 힘들어 온라인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 그런 존재라고 할까. 경남에도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분명 있을 터지만 겨울에도 눈 한 번 보기 힘든 곳이라 그런지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아름다움은 덜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진해에서 숱하게 봐왔던 벚꽃보다 먼 길을 떠나야 볼 수 있는 단풍에 더 열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단풍명소는 경남에서 정말 먼 지역이었다. 특히 대중교통으로 가는 건 더 힘들었다. 설악산으로 가려면 부산을 통해서 속초까지 가야했으며, 오대산으로 가려면 부산에서 강릉으로 갔다가 진부까지 가서 농어촌 버스를 타야 했다. 단풍으로 가장 유명한 내장산에 가는 건 강원도의 산들보단 나은 편이었다. 내장산이 위치한 정읍에 가려면 전주에서 한 번만 버스를 갈아타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장산에 가려면 굳은 결심을 하고 가야했다. 전주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 되지도 않을 뿐더러, 첫 차도 시간이 늦어 내장산에 도착하면 점심 먹을 때가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단풍철의 내장산은 평일에도 사람들로 붐벼 서 있을 틈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단풍철에 인기있는 산은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최고라 정읍에서 하루 자고 내장산으로 향하는 첫 차를 타기로 했다. 정읍에서 내장산으로 가는 버스는 해가 뜨기 전부터 있어 아침 안개가 자욱한 내장산의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국립공원 이야기 35 - 내장산 국립공원
내장산 국립공원은 1971년 11월 27일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8호로 지정된 곳이다. 전라북도 정읍과 순창, 전라남도 장성에 걸쳐있는 산으로 최고봉은 763m인 신선봉이다. 높이로만 따지면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내장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건 호남 5대 명산이자 한국의 8경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내장산과 백양산 그리고 입암산으로 이루어진 내장산 국립공원은 기암괴석으로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늦가을에 드러난다. 단풍으로 가득한 내장산의 풍경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엄청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명불허전 내장산! 그러나 아쉬운 날씨
내장산은 다른 의미로 명불허전이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요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내장산의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주차장엔 차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고 있었으며, 내장산 단풍을 담으러 온 사진가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장산에 오기 전에 본 오대산 단풍이 워낙 아름다웠기에, 더 유명한 내장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막연한 기대를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내장산 단풍 명소인 우화정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우화정은 사진사들이 내장산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 중 하나다. 우화정뿐 아니라 우화정으로 향하는 길도 온통 단풍터널이라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안개가 낀 단풍터널은 온통 단풍나무밖에 없는 내장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풍나무들이 자연적으로 이렇게 많이 생길리는 없을 터지만 오래 전부터 심겨온 단풍나무는 내장산이 터가 잘 맞는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우화정은 몇십년전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정자라 건물 자체로는 전혀 매력이 없다. 우화정이 세워진 연못 위로 단풍의 반영이 비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한국 단풍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전통 목조 건축 양식으로 정자를 대체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화정 뒤편으로 내장산 중턱에 올라갈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지만 영업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케이블카는 단풍철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타지도 못 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단풍철에 내장산을 찾아 단풍터널을 보고 산에 오르고 싶다면 케이블카부터 타는 것이 낫다. 단풍터널의 아름다움에 빠져 둘러보다가 케이블카를 못 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케이블카 타는 건 진즉 포기하고 내장사로 향했다. 내장사로 향하는 길이 바로 내장산 단풍터널로 그 아름다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대산 월정사에 전나무길이 있다면 내장산 내장사에는 단풍터널이 있는 것이다. 내장산의 단풍터널이 시작하는 내장사 일주문 양옆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다. 일주문에서 내장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면 대한민국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해외로 떠나기 아까운 계절이 있다면 바로 늦가을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단풍을 볼 수 있는 시기에는 굳이 외국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장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8년에 재건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가 얼마 없다. 다른 국립공원에 오래된 사찰이 남아 그윽한 역사를 전하고 있는 것과 다른 모습이다. 내장사가 소실되지 않고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다면 가을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을지 상상을 해 본다.
내장사를 뒤로 하고 내장산 능선을 한바퀴 돌기 위해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등산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찍기도 힘들다. 내장산 능선의 시작은 서래봉이다. 서래봉에서 시작하는 내장산 능선은 불출봉・망해봉・연지봉・까치봉・문필봉・장군봉을 포함하고 있다. 내장산 능선은 원형 경기장 같은 형태로 한가운데 내장사가 주인공이 되어 지켜보는 형태다. 날씨가 좋다면 저 먼 능선 너머 백양산까지 보였을 테지만 이상하게 연무가 끼어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저 아래 내장사도 흐릿하게 보이니 말 다했다. 원래 계획은 능선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지만 연무 때문에 더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까치봉에서 내장사로 내려왔다. 내장산 종주는 다음에 날씨가 좋을 때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내장산 단풍의 라이벌은 옆동네 백양산!
하산을 마친 뒤의 내장사와 우화정은 마치 축제가 열리는 행사장 같았다. 월요일인데도 발 디딜 틈 없는 내장산은 가히 단풍의 천국 아니 사람의 천국이라 불릴 만 했다. 일찍 와 내장산의 조용한 풍경을 사진으로 담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내장산 단풍터널은 사람 반, 단풍 반이라 할 수 있을 정도라 돌아가는 길엔 사진 찍는 걸 포기했다.
내장산 단풍이 물론 아름답긴 했지만 오대산 단풍과 비교해 딱히 특출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대산 선재길이 오히려 길이도 더 길고 사람도 적어 단풍의 아름다움을 더 만끽할 수 있었다. 내장산 단풍터널과 어우러진 내장사의 목조건물이 인상적인 것 외에는 오대산에 비해 우위에 설만 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물론 오대산에 찾았을 때 날씨가 좋았던 탓도 있다.)
하지만 내장산 국립공원에 내장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내장산의 남쪽은 백양산이라고 하는 단풍 명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장산보다 백양산의 단풍이 더 아름답다고 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백양산의 단풍의 명성 또한 자자하다. 다음 가을에는 백양산에 꼭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2020년 가을 기차를 타고 전라남도 장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