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버스 - 교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어요 1077년 카노사의 굴욕과 교황권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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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05. 03:37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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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버스
교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어요
1077년 카노사의 굴욕과 교황권의 승리
중세 유럽 사회는 봉건 제도와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어. 바로 교회의 힘이 무척 컸던 거야.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의 힘도 막강해서 교황 앞에서는 한 나라의 황제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어.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이토록 큰 힘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걸 알아보려면 1077년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함께 떠나 볼까?
교황 자리에 오른 그레고리우스 7세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성직 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발표했어. 성직 임명권은 말 그대로 교회에서 일하는 성직자를 뽑는 권한인데, 그때까지는 성직 임명권을 왕이나 제후가 가지고 있었단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발끈하고 나섰어. 성직 임명권을 교황에게 넘겨주었다가는 교회를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라는 곳에서 제국 의회를 열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 자리에서 내쫓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단다. 그러자 그레고리우스 7세도 화가 났어. 그는 하인리히 4세가 더 이상 크리스트교도가 아니라고 파문하고는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지.
일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하인리히 4세에게서 등을 돌렸어. 사정이 어려워진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교황에게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고는 추운 겨울 교황을 만나러 이탈리아 북쪽의 카노사성을 찾아갔지.
하지만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만나 주지 않았어. 황제는 맨발로 눈 속에 서서 3일 밤낮을 눈물로 용서를 빌어야 했단다. 그제야 교황은 황제를 만나 주었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약속받은 다음에야 그를 용서했어.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해. 교황의 완전한 승리였지.
카노사성의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성을 찾아가 용서를 비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하지만 교황과 황제의 이 싸움은 뒷날 1대 1 무승부로 마무리된단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1080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황제 자리에서 내쫓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하인리히 4세도 만만치 않았어.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그레고리우스 7세를 내쫓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뽑더니, 2년 뒤에는 군대를 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새 교황의 취임에 대해 교황청의 승인까지 받았지. 눈물을 삼킨 채 쫓겨난 그레고리우스 7세는 3년 뒤 세상을 떠났단다.
결국 교황이 지고 말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라나 황제보다도 더 높았던 중세 교회의 힘과 교황의 엄청난 권위를 보여 주는 사건들이었어.
이번 정거장에서 더 알아보기 황제와 교황의 싸움을 가져온 성직 임명권 성직 임명권은 신부, 대주교, 주교, 수도자 등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에요. 당시 성직자는 큰 권력과 함께 교회와 땅까지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보통 나라의 권력자들이 직접 성직자를 뽑았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 운동을 벌이며 이 성직 임명권도 완전히 교회로 가져오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황제와 대립하게 되었지요. 왕권이 강해지게 된 사건인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왕권이 약해졌다면, 반대로 왕권이 강해진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은 아비뇽 유수예요. ‘유수’라는 말은 잡아 가둔다는 뜻이지요. 1303년,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대립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군대가 별장에 있던 교황을 공격하면서 교황의 권위를 위협해요. 이어서 1305년 새로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5세도 프랑스 왕의 간섭을 받아야 했지요. 뿐만 아니라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 남부인 아비뇽으로 옮기기까지 했어요. 이것이 바로 ‘아비뇽 유수’예요. 이 일로 교황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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