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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그러함’이라는 생장점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이영숙
1.
인간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생존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동심원의 중앙에 있는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타자에 대한 관심도와 기대감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근접해 있는 가족, 친지, 친구, 이웃을 비롯한 인적 관계망과 동시대라는 사회적 관계망, 당대가 공유하는 문화적 관계망이 한 생을 감싸고 있지만, 인간 개개인의 생활권은 같은 이유로 세계에 비해 협소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기억력도 이에 비례한다. 학습과 사고와 추론을 하기 위한 인간의 기억 과정은 그중 의미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대뇌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인간은 집중과 탐구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결과물은 지식과 지혜의 형태로 생산자의 내부에 축적되거나 지적 소비자와 공유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지성을 확산시켜 왔다. 학문, 과학, 예술 등의 영역으로 체계화되고 개념화되고 미시적으로 분류되는 가운데, 과거에 대한 주석과 현재에 대한 해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상상력을 빌려 글로 표현된 형태를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른다.
문학은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고대 수메르인들이 처음 문학을 ‘했을’ 때부터 문학이 한 그루의 나무였던 사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딛고 이후의 문학이 뿌리와 몸통과 줄기와 잎이 더 무성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양적으로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질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독자적인 완결성을 가지고 문학은 그때, 그 자체로 존재해 온 생명체다. 인류는 그 그늘에서 쉼과 에너지를 충전해 왔으며, 새 그늘은 늘고 늘어 문학사를 거느리고 현재에 이르렀다.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대주제는 과거완료 시제로 쓰였지만, 과거와 현재를 포괄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현재진행형 시제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게중심은 과거에 놓이되 방점은 현재에 찍자는 의도로도 읽히고, 문학의 본질을 다시금 환기해야 할 현재 상황의 특이점에 주목해달라는 요구일 수도 있으며, 문학에 있어 과거와 현재라는 분리할 수 없는 지점을 분리해보라는 까다로운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현재를 과거의 반동이라 했을 때 과거는 현재의 여명이나 척후라고 할 수 있을지, 문학사에 등장한 무수한 저자와 그들의 작품(창작자 관점), 그들에 대한 무수한 정의(비평가 관점)와 더불어 독자의 자리(독자의 관점)도 같은 비중으로 마련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인지, 현재가 호명한 과거이면서 과거가 예지한 문학의 미래에 관한 오래된 담론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라는 것인지……등의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이 광활한 질문의 추상성을 일부라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체, 곧 현상의 제시가 유효해 보인다. 지식의 저장고에서 꺼낸 선대의 지적 자산들에 의존한다거나, 이미 발화한 누군가의 견해에 대한 재현이나 부연, 혹은 정보의 나열에 머무는 우를 피하기 위한 방편적 측면도 있다.
2.
먼저, 문학은 가장 안전한 대화 상대(였)다. 인간은 대내외적인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언어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의 확증편향과 각종 이해관계로 인해 오해와 불신과 갈등 상황 속에 자주 놓인다. 어휘력이나 표현의 미숙함, 인식의 한계 등으로 내면의 진실은 전달되기 쉽지 않으며, 그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절연의 상태로 나아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말이 아니라 글이라는 언어적 방식을 매개로 하는 문학은 다르다. 시를 예로 들어보자.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중략)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박지웅, 「잘 가」 부분, 《모던포엠》, 2020, 7월호
이 시는 좀체 회복되지 않을 실연의 상처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현실의 비유적 재현이지만, 이별을 통고한 “여자”와 그에 대한 “나”의 시적 대응을 통해 정서의 파문을 오래 지속시킨다. “여자”가 떠나자 세계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도래하게 되는 과정은 현실을 초월해 있다. “냉장고”를 중심으로 “여자의 혀”는 “차가웠다”, “가장 낮은 온도”,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사후의 세계”,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핏물이 덜 빠졌다”라고 변주되었다. 구슬들을 한 편의 시로 꿰는 동안 시인은 얼마나 강도 높은 통증을 겪었을 것이며, 시를 들여다보며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래 지체되었을 것인가. 꼭 들어맞는 시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단어를 불러냈으며, 무엇보다 얼마나 지난한 몰두의 시간을 가졌을 것인가.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런 몰두와 무관하게 전개된다. 설혹 이별의 당사자라 하더라도 생존을 위해 시간의 정해진 패턴대로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나날을 살아가야 한다. 오히려 감정 연기를 하면서라도 내면을 숨겨야 하므로, 도무지 슬픔과 아픔의 심연에 도달할 여지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통해 정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시인이 ‘몇 달을 걸려 뺀 핏기’를, ‘아직도 덜 빠진 핏물’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면서 우리는 시 한 편을 통해 단숨에 이별의 심연에 도달한다. 아니, ‘단숨에’가 아닐 수도 있다. 시인이 오랜 시간 자신의 심연과 대화하면서 시를 쓴 것처럼 우리는 시와 대화해야 할 수도 있다. 이제 시인의 심연은 시의 심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내가 원할 때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만나주며, 비록 오해(오독)가 있을지라도 화내지 않고, 내가 몰라서 여러 번 질문해도 이미 시 속에 답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면서 내가 발화할 충분한 시간을 준다. 기다려준다. 문학만큼 안전한 대화 상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또 하나, 문학은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바꾸는 장치(였)다. 투표할 때 외의 일상적 삶에서 우리는 자신이 정치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정치가가 관여된 영역이나, 집회 참석 등의 정치적 행위가 동반되었을 경우를 정치라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의 개념은 좀 더 포괄적 의미로 다루어져야 한다. 신문을 읽는 것도, TV 뉴스를 보는 것도, 유통되는 담론에 대해 동료와 의견을 나누는 것도 정치적 행위다. 더 나아가 경제와 문화 활동을 하는 것도, 의료 행위도, 자원봉사도 정치 행위에 속한다. 그것은 시스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부분은 없다. 정치의 부재나 과잉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여 일테면 복지가 좋아지는 것도 모두 정치의 자장에 속한다. 문학은 사람들이 정치가 아니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말해주는 장치다.
그해 봄 나는 한낮의 거리에서 계엄군에 체포되고 구금되었으며, 교도소와 국군통합병원과 다시 광주교도소에서 상무대 헌병 대 영창으로 108일 동안 끌려다녔다. 총부리가 나를 겨누기도 했고, 포승줄로 엮이기도 했고, 군 헬기를 타고 응급실로 옮겨가 수혈을 받기도 했다.
―심영의, 『오늘의 기분』 부분, 푸른사상, 2020
5ㆍ18의 현장성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이 소설은 고발과 증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대뜸 봐도 정치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학이 정치만을 보여주기 위해 쓰이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르포나 역사가 될 것이다. 각기 다른 소설적 주체를 통해 한 시대의 폭력과 광기를 미스터리 기법으로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지식인의 자의식을 굵직한 선으로 그려나간다. 정치적 테마라 하더라도 소설은 전쟁 속에서의 인간, 재해 속에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재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다.
휴남동 가정집들 사이에 휴남동 서점이 문을 열었다.
문만 열어놓았을 뿐 영주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점은 아픈 동물처럼 숨을 헐떡이며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서점이 뿜 어내는 은은한 분위기가 동네 사람들을 끌어들였지만, 이내 발걸음이 줄었다. 몸속에 피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얗게 앉아 있는 영주 때문이었다.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부분, 클레이하우스, 2022
대뜸 봐도 인간을 향한 이 소설은 ‘휴남동 서점’을 중심으로 주인공과 인물들의 삶과 일상을 세밀한 필치로 그려냈다. 문학이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바꿔주는 장치라고 했으니 찾아보건대, 다만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인 등장인물들 틈에서 과연 어디에 정치 행위가 들어 있을까. ‘영주’발發, 정확하게는 ‘휴남동 서점’발 수평적 연대가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상처에는 사회적 맥락이 연계되어 있다(열심히 일하면 계약직으로 올려주겠다는 계약 당시의 회사 말만 듣고 8년을 착취당하다가 결국 계약직으로 자퇴해버린 ‘정서’처럼). 이들의 수평적인 연대는 결국 서로 위무하는 상처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세상을 좀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저자의 창작 의도는 정치가 아닐 수 없고, 독자의 참여와 공감은 세계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정치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며, 이런 목록을 찾아내서 들려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문학은 플랫폼이(었)다. 공정과 상식을 드높이 외치지만 공정과 상식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수저계급론으로까지 비하된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서게 된 줄이 대학과 유학으로, 그리하여 대기업이나 고급공무원으로 이어지는 금수저가 있는가 하면, 백수로 이어지거나 삼포세대(三抛世代)에서 칠포세대(七抛世代)로까지 진화한 흙수저가 있다. 개인의 성장 능력에 대한 기대 대신에 출신 성분이 중요해지면서 계급사회는 점점 더 견고하게 구축되는 중이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이란 측면에서 문학은 ‘그나마’ 열린 문을 가지고 있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제정한 최초의 신춘문예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신춘문예나 다수 문예지의 등단 제도가 그것이다. 조건 없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문학의 장이 플랫폼에 기반했음을 말해준다. 시인/작가들이 출신 성분, 학력, 경제적 상황 등과 관계없이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풍토가 문학 장에는 있던 것이다. 다만, ‘그나마’라는 제한적 수사를 덧붙인 것은 문학 역시 자본과 제도―고학력화, 문예창작과라는 제도권 교육 출신자들의 포진, 특정 대학이 특정 장르를 장악하는 권력화 양상, 응모 시에 생년월일을 밝히라는 주최측의 폭력적인 요구 등―로부터 부자유한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매체에서의 문학-플랫폼이 활성화되고 있는 가운데 접근성이 떨어지는 노후 세대의 경우, 이는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차별적 요소가 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3.
시대, 사람, 패러다임이 바뀌니 문학 환경이 바뀌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문학과 독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필자를 동심원 중앙에 놓고 이 부분만을 주관적으로 스캔해 보자. 1960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을 넘기는 공교육의 시기, 경제적 가난이 독서를 가능하게 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 떠오른다. 그때는 대학생에게 입주 과외나 그룹 과외를 받는 그룹도 더러 있었는데, 대개 가난이 보편이었으므로 과외 대신 누군가에게 책을 빌려서 한국단편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나가는 그룹도 꽤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 버전으로 말하자면, 성적이 좋건 안 좋건 간에 반 친구들 여럿과 『테스』를 읽은 충격에 대해 자신이 아는 만큼씩의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어설프게 조숙한 중학생들이 많았다. 이는 고스란히 1980년대의 사회생활로 이월되어 휴식의 시간이면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이나 『등신불』의 만적이 소환되었고, 현재 50~70대에 속한 이들과 만났다거나, 강의실에서도 필요할 때면 작품 속 사건이나 등장인물을 비유로 들기 위해 소환하고 있으니, 한 번 읽은 책들을 오래 우려먹고 있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최소 청소년 필독 도서에 해당하는 책들을 읽는 게 당시에는 통과의례로 여겨졌던 것 같다. 독서가 직접적으로는 시험과 무관했는데도 말이다. 대학입시에 논술 과목이 생긴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독서 광풍이 불었는데 정작 중고등학교 교육에서는 독서를 사교육으로 떠넘겼고, 이마저도 논술이 독해와 논리 능력을 가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독서가 교양이던 시대는 그대로 저물고 말았다. 대학에서 필자에게 ‘글쓰기’니 ‘독서와 토론’ 등의 교양과목을 수강한 학생들은 대체로 1990년대 출생부터였는데, 물론 다른 과목이나 영상매체의 확산 등의 외부적 환경 변화는 별개로 친다고 전제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문학적 소양은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이 발표된 2005년 이전부터 그 징후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책이 있으면 어떻게든 읽으려고 했던 과거와는 달리, 책이 있고 돈이 있어도 대중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이제는 문학의 흥망성쇠를 독자라는 소비자가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대주제는 문학의 본래성을 짚어보면서 문학의 위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탄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삶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탄식과 동의어다. 낭만이 없어진 시대, 배려가 없어진 시대, 성적만 중요해진 시대, 물신적 사고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시대, 부자와 결혼하는 게 장래 희망이 된 시대, 부끄러움이 없어진 시대, 개성만 넘쳐나는 시대, 여성과 약자 혐오의 시대, 교양 없는 정치 엘리트들이 정치를 망치는 시대……. 두서없이 적어보았지만, 마치 자본주의의 폐해들을 열거한 듯한 느낌이 든다(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으므로 여기까지만!).
문학은 앞서 논의한 세 개의 에피소드, 즉 가장 안전한 대화 상태가 되어 작가와 독자가 함께 행복해져야 하고, 비정치의 정치화를 실행하여 우리 삶의 고상한 미적 의식을 복원시켜야 하고, 우리의 삶을 평등한 플랫폼으로 만드는 일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문학의 ‘그러함’이고, 이것이 문학의 ’그러함’이라는 생장점일 것이다.
―《예술가》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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