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888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마18:18~35)
성경을 한 구절로 압축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어느 누굴 사랑한다고 한들 자기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처럼’은 숭고하고,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까지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은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의 기독교인이 많이 줄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20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심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사상의 빈곤, 기독교 사상의 몰락이 그 이유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요일4:16), 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성령의 열매이며(갈5:22), 믿음보다 큰 것이 사랑일진대(고전13:13) 그 근간이 흔들리니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4:8). 즉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요, 정죄하지 않는 것이요,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식어서 작은 일에도 정죄하고, 용서에 인색하며, 허물이 보이면 파헤쳐 망신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이 마치 정의를 구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아십니까? 온전한 사람, 완전한 사람은 아예 없다는 것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죄 없는 자가 없고, 허물없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대소의 문제이지 죄의 유무 문제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남의 허물을 들쑤시고 신나서 나발 불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긴 ‘남의 말은 별식과 같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을 정도니 남의 허물이야 산해진미겠지요. 아주 맛나겠지요.
요즘 대선후보들을 보면 자신의 정책노선을 펴기보다는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 정치판만 그렇습니까? 교회도, 회사도, 심지어 가족 간에도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들춰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는 두 마리 이상만 같이 놔두면 절대 그릇 위로 못 올라온다고 합니다. 서로 물고 뜯고 끌어내리기 때문이라네요. 하나님의 자녀가 게처럼 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해야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내가 먼저 남의 허물을 덮어줘야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상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우리가 먼저 얽힌 관계를 풀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풀리고, 소원하는 것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실린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온 장면이 나옵니다. 그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녀의 허물을 들춰내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이것을 두고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하는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허리를 굽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 ‘의인은 없다.’ 라고 쓰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시니 이들도 양심 있는 지라 다 뒷걸음쳐서 도망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너의 허물을 덮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허물을 덮으신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왜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니?” 라고 추궁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고 물으시며 지난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칼에 베어 손에 상처가 났는데 자꾸 그 상처를 들쑤시고, 긁는다면 그 상처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상처가 아문다고 해도 결국 흉터가 남는 겁니다. 상처는 싸매줘야 낫습니다. 남의 허물도 이와 같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하고 다니는 것은 진물 나고 있는 상처를 다시 후벼 파는 격이 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으니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통탄해하시겠습니까?
‘저 여자는 이혼한 여자래’, ‘저 사람은 사기꾼이래’, ‘저 사람은 어떻대’ 이럽니다. 여러분, 목욕탕에는 때가 있으니 가는 겁니다. 세탁소에는 옷이 더러우니 가는 거고요. 병원은 환자에게 필요한 겁니다. 죄인이니까 교회에 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런 사람이 왜 교회에 오냐고 하면 말이 됩니까? 그건 이렇게 더러운 옷을 왜 세탁소에 가져오느냐고 하는 것과 같고, 몸에 때가 너무 많으니 목욕탕에 못 들어온다는 것과 같고, 너무 쇠약해져 있으니 병원에 오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앤틱을 좋아해서 외국에 가면 앤틱 박물관을 자주 찾습니다. 거기에 보면 100년도 더 된 자동차들이 있는데, 그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비쌉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수리해 놓으니 값진 앤틱이 된 겁니다. 허물 많은 자들이 예수로 인해 변화되면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여섯 남자를 데리고 산 여인이 예수로 인하여 변화되더니 온 마을을 뒤엎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바울도 역시 허물 많은 자였지만 변화되더니 사도로서 유럽을 복음화하지 않습니까?
당신도 당신이 나온 웅덩이를 돌아보세요. 절대 남을 정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나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넣는 자와 같게 됩니다(마18).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허물이 없었을까요? 그도 급할 때 아내를 누이라 속인 허물이 있는 자요, 하나님이 마귀 앞에서까지 자랑하던 욥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 칭함을 받은 다윗도 다 죄와 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도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죄와 허물을 들추어 부끄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장점은 나팔로 불어주고, 단점은 귓속말로 잠자리에서 해주세요. 마귀가 듣지 못하게요. 그러면 천국 가정이 됩니다. 상대의 허물이나 죄를 사람에게 고하면 정죄요, 비판이지만, 하나님께 아뢰면 기도가 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가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할렐루야!
제일 값진 것은 사랑이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용서다
오늘날 위기의 원인은 기독교 사상의 빈곤이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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