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진 종로의 랜드 마크였던 화신백화점
- 50여 년 민족 백화점, 기억을 더듬다 -
서울시 종로구 공평 도시유적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50여 년간 민족의 백화점으로 꽃을 피웠던
화신백화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내년 3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장에 시민들이 찾아 일본인들의 4개의 백화점 속에서 민족의 백화점으로
굳건히 지킨 화신백화점의 옛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화신 백화점은 공평 도시유적전시관의 바로 앞 종로타워가 서 있는 자리였다. 이곳은 조선 시대 육의전 중
으뜸이었던 선전(縇廛)이 있었으며, 화신백화점이 반세기를 넘게 종로의 랜드 마크로 자리매김했다.
4부로 구분하여 전시되었다. 1부는 ‘지금은 백화점 전성시대’로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30년 경성은 30만 인구의
도시로 히라타(平田), 미나카이(三中井), 죠지야(丁子屋), 미츠코시(三越), 화신(和信) 등 5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현재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의 남촌에는 일본계 백화점들이 사세를 확장, 대형화되었고 북촌에는 최남(崔楠)에
의해 건립된 동아백화점, 상회에서 백화점으로 거듭난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화신이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면서
조선인이 세운 유일한 백화점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2부는 ‘1937년 화신의 새로운 탄생’으로 화신백화점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화신 백화점은 지하 1층에서 지상
6층에 달하는 크림색 건물이 경성의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었다. 건물 위에는 네온사인이 쉬지 않고 빛나
경성 어디에서나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며 길이 약 19m의 전광판은 경성 시내의 이목을 끌었다.
민족백화점의 이름을 걸고 타 백화점들과 경쟁을 벌인 화신 백화점은 당대 최신 문화의 기호로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객 유치에 힘썼으며 고객들이 붐볐다. 당시에 백화점에 판매되었던 장신구를 비롯하여
구두, 핸드백, 넥타이, 모자와 모자 함, 화장품, 화장대 등 실물이 전시되었다. 당시 화신 백화점에서 말쑥한 신사가
되려면 410원 55전, 양장 숙녀가 되려면 메이커 업으로부터 시계, 반지, 외투 등 516원 5전이 들었음을 보여주었다.
3부는 ‘저물어가는 화신의 시대’로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화신백화점은 생필품 판매에 주력하거나, 전쟁 홍보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전시상황에 부응하였다. 화신은 군수회사인 비행기 제조회사까지도 설립하였으며 일제에
협력한 일로 박흥식은 반민특위 체포 제1호로 검거되기도 했다.
화신의 전성기는 빠르게 지나고 6·25 당시 불타 뼈대만 남았던 건물만 남았으며 1955년 신신백화점을 만들어 화신과
함께 백화점 사업을 다시 일으켜 보려 했던 노력은 최신 시설을 갖춘 백화점들의 등장으로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백화점 일부를 임대해 사용했던 신생이 1967년 건물 전체를 인수하면서 백화점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4부는 ‘지금은 사라진 종로의 랜드마크를 기억하며’로 1987년 3월 14일 건물이 헐리기 시작한 화신백화점,
반세기 동안 종로의 상징이었던 화신은 도시재개발 및 종로 확장계획과 맞물리면서 그 운명을 다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기억 속에 몇 차례 이름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화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시계 밑에서 동동거리며
약속 상대를 기다리던 일, 건물 안 물건들을 보며 즐거워하였던 일, 화신 앞 정거장에서 내려 종로를 지나던 일
등을 영상을 통해 들려주었다.
첫댓글 제가 여중, 여고를 다닐 때면 화신, 신신 백화점 앞을 지나 안국동으로 걸어갔었지요.
그 때 백화점은 감히 우리같은 학생은 들어가기도 어려운 곳이었는데
지나다 보면 그 백화점이 헐리고 엄청난 건물이 들어섰던데, 화신백화점에 대한 전시회를 하는군요.
전시회를 보시며 참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화신백화점 글과 전시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