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酒)님 예찬 / 양선례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술도 음식이라 자꾸 먹으면 는다고 말한다. 처음 본이와도 스스럼없이 말을 섞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기에 나의 겉모습만 보고는 ‘말술’을 마시게 생겼다고 한다. 여행 가는 사람들의 술 실력과 멤버들의 분위기에 따라 소주나 와인을 챙기기도 하고, 밥 먹는 자리에서 “이 안주면 술이 있어야 하지 않남?” 하면서 술을 주문하는 사람도 나지만 술 실력은 별개의 문제다. ‘양을 사양하되 잔을 사양하지는 않는 미덕(?)’으로 주는 술을 받기는 잘하지만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는 못한다. 서너 시간 이어지는 긴 술자리에서 기껏 김빠진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니 주량이라고 내밀기도 부끄럽다. 하여 나는 술 잘 마시는 멋진 여자가 참으로 부럽다.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가 작고 왜소한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남들과 똑같이 마셔도 체구가 작기에 쉽게 취했다. 한 잔으로 기분이 좋아지면 골목 입구 들어서면서부터 노래를 불렀다. 술을 드시지 않으면 남들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안내는 순한 분이셨으나 드시기만 하면 남의 눈치 전혀 안 보는 용감한 사나이가 되셨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읍내 한복판에 살았기에 아버지가 취한 날은 온 동네가 다 알았다. 노래는 집 마당까지 이어져서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불러재꼈다. 그러고도 술이 덜 깨면 숨죽여 눈치만 보던 우리 남매와 하루 종일 노동으로 고단했을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말이 비수보다 더 무서운 흉기가 된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술 마신 사람 곁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일 년 365일 중 360일 이상 술을 마시는 남자랑 산다. 상처를 넘어 증오까지 이른 술에 관한 인식을 바꾼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나는 학보사 수습 기자였고 선배들 십여 명, 지도교수님과 함께 여름방학을 맞아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다. 졸업한 선배가 발령받아 있는 완도의 작은 섬 학교 교실에서 2박3일간의 일정이었다. 당시는 서슬 퍼런 80년대 중반 군부정권이었고, 불법서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달 정학이 쉽게 내려지던 시절이었다. 술잔을 부딪치고 다양한 건배사를 하면서 토론은 밤새 이어졌고 선배들의 얼굴도 불콰해졌으나 어느 한 사람 주정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논리는 정연했고, 말투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술을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주사를 부리는 줄만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발견한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세상의 잣대를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술 마시는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겠다는 신념도 그때야 깨졌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양씨치고 술 못 마시는 사람 못 봤어.”라고 호기롭게 외쳐대는 사촌 오빠들을 보면서 자랐기에 나도 술을 잘 마실 줄 알았다. 실력이 뽀록난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대인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막걸리 집에 신문사 선배들과 앉았는데 한 학년 위의 언니가 소주 두 잔을 마시고는 펑펑 우는 것이었다. 언니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딴 살림을 차려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엄마와 자신의 설움을 쏟아내면서 언니는 꽤 오래 울었다. 그런 언니를 다른 선배들이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나 역시 쌓인 설움이 많았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고가 전혀 없는 낯선 도시로 대학을 왔기에 외로웠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을 왔던가 후회도 되면서 한바탕 속 시원히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여고시절 동창이자, 함께 자취하는 친구는 장로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입학하자마자 씨씨(CC) 동아리에 들어갔다. 키 크고 이쁜 신입생 후배를 아낌없이 챙기는 선배들 덕에 그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미팅에 불려 나갔다. 아직 친구를 만들지 못한 나만 저녁밥 해 놓고 친구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캠퍼스의 초여름은 저리 싱그러운데 낙동강 오리알처럼 서러웠다.
백림약국 맞은편 막걸리 집에서 신문사 바로 직속 선배랑 1학년 수습기자 몇 명이 모였다. 소주 두 잔만 마시면 그 선배처럼 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두 잔을 단번에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고 자취방까지 걸어오는데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만 붉어졌을 뿐, 정신은 또렷했고 걸음걸이도 양호했다. 역시 나는 우리 아버지 딸이 맞아. 술 잘 먹는 아버지의 유전자가 몸속에 흐르는구나.
안심은 일렀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네 발로 사방을 기었다. 그 밤의 고통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나는 지금도 두 잔은 고사하고 단 한 잔의 소주도 마셔본 적이 없다.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술 체질이 아니구나. 온 몸이 거부했다. 맥주 한 잔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물론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잔기침이 나면서 공기가 부족한 듯 거칠게 숨을 쉬어야 했다. 머리를 가누기가 힘들어 노래방 의자에 길게 누워서 한숨 자고 일어나야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마신 술이었는데 깨어나면 이미 파장이었다. 그걸 알게 된 동료들이 더 이상은 술을 권하지 않았다. 결혼 초기 술 좋아하는 남편이 소주 한 병을 터서 마실 때 딱 한 잔만 같이 마셔주는 것을 소원으로 삼고 여러 번 술사부가 되기를 자청했으나 끝내 포기했다. 말술 마시는 시댁 식구들 모임에서도 나는 잔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이 유행할 때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교직원들의 전부 참여하는 학기말 워크숍을 멀리는 못가고 학교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장흥 수문 리조트로 갔다. 저녁식사와 한 학기 동안의 교육과정 반성과 재구성도 마치고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리조트 주변에는 노래방이 없어서 다시 학교 근처로 와야 했다. 자정 넘어서까지 신나게 놀고 택시를 부르니 아뿔싸, 그 시간에는 운행하는 택시도 대리기사도 없었다. 결국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은 내가 전 직원을 4번에 걸쳐서 실어 날라야만 했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이나 갈 것인데, 기분 좋게 취한 직원 한 명이 그래 가지고 어떻게 교장 나갈 거냐고 놀렸다.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는 중인데 기름을 부었다.
세대 차이나는 젊은 교사들과 어울리려면 기분 좋게 마시는 술자리가 최고일 텐데 그런 재주가 내게는 없다. 술의 힘을 빌려 용감해지는 사람들이 부럽다. 속이야기도 하고, 서로의 치부도 적당히 보여주고, 그러다가 깨어나면 어제보다 더 친해진 ‘공범’들끼리 눈도 찡끗하고 싶다.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는 그런 인간적인 사람도 되어 보고 싶고, 술 마신 다음날 속풀이 해장국도 먹어보고 싶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의 음주는 담배처럼 기호식품이 아니던가.
나는 술 잘 마시는 여자가 부럽다. 술이 맛있다는 단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분위기 맞춰줄 정도의 술실력이면 좋겠다. 소주 한 병쯤은 즐겁게 마시고 적당히 붕 뜬 기분에 취해 세상을 눈 아래로 보고도 싶다. 소맥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고 다시 소주 한 병을 자작으로, 그것도 저녁마다 마시는 남편과 함께 산 지 30년이 되었다. 주제 파악은 정확하게 했으면서도 지금도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소주잔에 따른 눈꼽만큼의 맥주일망정 힘차게 소리친다. “한 잔 따라 보시오.”
첫댓글 서생님 글 재미있어요.저도 슬 잘 억는이가 부럽답니다. 우리 아버지는 밀밭 옆에도 못 가는 분이었는데 우리 자매들 다 술을 못 억어서 맥주 반잔에도 취한답니다. 좃ㅈ은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둘로 나뉘었어요.
아버지는 잘 드시고, 엄마는 한 잔도 못 마셨거든요.
그래선지 우리 남매도 주류와 비주류가 반반 나뉘었어요.
저는 주류하고 싶은데...이번 생에선 포기해야겠네요.
좋은 글
완전 공감합니다. 제가 공인 대리기사입니다. 모든 종류의 차를 몹니다. 그리고 술 많이 드시고 늦으신 선생님 대신 수업 올려서 하거나 땜방도 많이 했답니다.
하하
공인 대리기사?
저도 남의 차 대리 많이 했습니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숙명인가 봅니다.
선생님 글과 많이 다르지요?
술 잘 마시지 못해도 분위기 잘 맞춰 주잖아요. 그 정도로 분위기 잘 맞추면 충분해요.
술 마시면 재미없다해요.
잠 잔다고요. 하하
선생님!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건배 맨트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꽃은 반쯤 핀 것을 보고 술은 적당히 취할 만큼 마시라" 만발한 꽃은 화사하지만 금방 져버리는 것이고 술은 취하면 실수하게 됩니다.여기 글쓰기 방에 계시는 분들은 술 못 마신다고 속상해 하시지 마시고 우리 글쓰기의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가시기를 바라며 제가 "인생의 목표에 하면" 매진하자 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목표에"..... 술은 못 마셔도 맨트나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인생의 목표에 / 매진하자
기억하겠습니다.
담에 짬뽕에 미치다에서 만나면 건배하시게요.
대부분 어느 집이나 한쪽은 술이 과해서 탈이 나고 다른 한쪽은 술을 못 마시는 것 같아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하하 그런가요?
그 기분에 공감을 못해서 자주 다툼도 생긴답니다.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여즉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거든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꼭 건배 제의 하세요.
나이가 드니 친구보다는 집사람과 마시는 술이 최고더라고요. 교장선생님! 도전을 멈추지 마세요. 응원합니다.
하하
꼭 명심하겠습니다.
제 도전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