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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기자: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우호 협력을 위해서 서독을 방문한다. 그곳엔 외화를 벌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지하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과 궂은 일을 마다않고 간호사로 일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방독 사흘째 박 대통령은 서독의 탄광지역인 함보른에서 350여명의 파독 노동자들을 만난다.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강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애국가가 담긴 조국은 그리움이자 북바치는 설움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294번째 시간 오늘 송년기획으로 6, 70년대 해외로 향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특별히 라이브 드로잉을 담당하고 계시는 김정기 작가님이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김정기/화백: 반갑습니다.
이시원/배우: 누군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직접 뵈오니 반가워요.
김정기: 저도 작업실에서만 뵙다가 이렇게 직접 뵐 수 있어서 신기합니다.
최원정: 그림 그리실 때 역사 공부를 하시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애요.
김정기: 알고 있는 건 얇습니다만 그런데 많이 준비해 주셔가지고 그 준비된 내용 가지고 제 나름대로 상상이나 공부된 내용들을 첨가해서 그리고 있습니다.
최원정: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향할 곳은 독일입니다. 1960년대 많은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로 향했는데 그 영상을 보셨잖아요. 육영수 여사와 많은 간호사분들이 눈물 흘린 장면이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거기가 어디냐 하면 뒤스부르크 라는 곳인데 거기가 함보른 이란 지역이거든요 (함보른 Hamborn-독일 뒤스부르크시에 위치 공업이 발달한 탄광지역). 서독에서 탄광산업으로 발달했던 유명한 지역이거든요.
허진모/작가: 박 대통령이 서독에 간 때가 1964년입니다. 이때는 물론 전용기가 없어서 일반 여객기를 타고 장장 26시간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는데 우리 파독 근로자들 광부와 간호간호사 봤을 때 고생한 티가 너무 역역했던 거죠. 그리고 이제 고국을 떠난지 1년만에 애국가가 나오니 눈물보가 터져서 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그런데 진짜 해외에서 아리랑만 나와도 뭔가 뭉쿨한 게 있잖아요. 해외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애국가 나오니 울 수 밖에 없어요.
허진모: 해외에 안가도 군대 가서 한달 만에 엄마 얘기만 나와도 눈물이 터져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장: 저는 짧게 출장가도 그래요. 짧게 가서 거기서 태극기 나오면 뭉쿨해요.
최원정: 우리도 이런데 저분들은 얼마나 울컥하셨겠어요.
박태균: 60년대에 특히 6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가 너무 못살았어요. 세계 최빈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 (1963년 1인당 국민소득 가나 $200, 필리핀 $190, 한국 $120) 이었어요. 그 당시 돈을 벌기 위해서 피를 팔기 위해 사실 헌혈을 했어요. 그리고 머리를 잘라서 팔고 이러던 시대였기 때문에 독일에 가서 돈을 번다고 하니까 거기 갈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는 정도였고 그런 상황에서 67년까지 18,000명이 독일로 갔구요.
이시원: 다니엘~ 한국에서 자리 잡는데 얼마 걸렸어요?
다니엘: (한국생활 13년차) 지급도 아직 자리가 안잡혔어요.
이시원: 해외에서 자리 잡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해외에서 젊은이들이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같은 동포로서 울컥했을 것 같애요. 그래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분 미안합니다. 외국에서 이런 고생을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이런 불행을 겪게 하지 맙시다.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박상영/작가: 하필 왜 이역만리 멀리 독일에 까지 파견하게 된 걸까요?
박태균: 그 당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문제하고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19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았잖아요. 이 정책이 58년부터 바뀌기 시작합니다. 돈을 줘서 너희들이 이걸 가지고 개발을 해라. 그 대신에 이 돈을 갚아라 이렇게 되었는데 계획이 있는 나라에만 돈을 주게 되어 있는 겁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와서 처음에 계획을 만들었는데 미국이 보기에는 이 계획가지고는 돈을 갚을 수 있는 걸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 쪽에서 처음에 만든 계획에 대해 돈을 안주겠다 해서 굉장히 위기가 되었던 게 뭐냐면 63년이 되면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 밑으로 떨어져요. 어기서든지 빨리 차관을 구하는 것이 그때로서는 급선무였다 그때 이제 박정희 정부에서 주목을 한 게 바로 서독입니다.
다니엘: 그래서 그 당시는 독일에서 돈이 굉장히 많이 돌았어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왔는데 진짜 얼마나 왔냐면 100만명째 노동자한테 포르투갈 사람이었는데 오토바이를 선물로 줄 정도였어요 (2011년 독일에서 영화화된 이야기).
박태균: 영화가 있잖아요. 터키에서 노동자가 들어왔는데 줄을 서서 들어오다가 한 사람이 딱 서서 들어왔는데 그 사람이 100만번째 사람이 된 거예요. 그리고 이 터키 노동자는 100만1번째가 된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 포상을 못받았어요.
이시원: 참 격세지감인 거 같애요. 요즘은 다니엘이 이렇게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고~
최원정: (다니엘을 향해) 해외 파견 오신건가요?
다니엘: 오토바이 아직 못받았는데~
이시원: 당시 그분들은 말도 안통했을텐데~ 과연 낯선 나라 서독에 왜 많이 가려고 했을까 그게 궁금하거든요.
허진모: 1차 파독 광부모집을 할 때 (1963년 8월) 190여명을 모집을 했는데 2895명이 왔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5:1 정도가 됐었죠. 이렇게 높은 경쟁율을 뚫고 합격자들을 보니까 73% 이상이 고졸 이상의 고학력자 이었다고 하구요. 그리고 서울법대생도 있었구요. 명문대생들이 많았던 거죠. 고급 인력도 많았는데 교사 출신도 있었고요 경찰도 있었고 장관 보좌관 출신도 있었습니다.
이시원: 다 일하는 이유는 밥 벌어먹고 살자는 거잖아요. 대우가 좋거나 그랬나요?
박태균: 당시 1966년에 파독 간호사가 월급이 최고 800마르크를 받았다고 그래요. 그 당시를 보면 장관 월급 52,490원 보다 많았다 (파독 간호사 월급 약65,000원) 라고 얘기를 해요. 광부월급도 보면은 160달러 정도, 한국 돈으로 그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5~6만원 정도였어요. 그 당시에 한국 9급공무원의 월급이 4천원이었다고 하니까 10~15배 정도의 높은 월급을 받았던 거죠.
허진모: 제가 준비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1달러 지폐 한장을 꺼냄), 1달러, 예년(1966년)에는 이것으로 짜장면으로 하면 8그릇, 그리고 담배로 하면 담배도 많았지만 그중에 화랑담배를 기준으로 하면 54갑, 시내버스를 33번을 탈 수 있었고요. 극장에서 영화를 10번을 보고 돈이 좀 남았다고 합니다.
이시원: 1달러로 많은 걸 할 수가 있었네요~
박상영: 그리고 서독가면 한 달에 160장을 쥘 수 있는 거니까 짜장면 그릇으로 따지면 정말~
이시원: 짜장면 그릇으로 따지면 1280그릇~
최원정: 오늘 우리의 제목이 1달러의 눈물이잖아요. 그러니까 1달러가 굉장히 의미가 있네요.
박상영: 이 정도면 진짜 지원자가 설 수 밖에 없었겠어요.
이시원: 진짜 이거 아메리카 드림~ 코리안 드림 한 것 같은데 당시에 젊은이들 저머니 드림!
다니엘: 이 개그치다가 재가 엄청 욕 먹었어요.
--------(이광용 아나운서 등장 확성기로) 긴급모집~긴급모집~ 서독에서 3년간 일할 광부를 모집합니다. 20살에서 35살까지만 지원 가능한 서독행 대망의 금의환향의 기회를 절대~ 절대~ 놓치지 마세요. 자~ 자~ Ticket to the Germany(젊은이)~ 젊은이들 팍팍 지원하세요(이광용 퇴장)------
이시원: (다니엘을 향해) 이거 한번 지원해 보세요 독일말도 잘 하니까!
다니엘: 독일 갈수도 있는데 그리고 잠깐만 만35이니까 딱 커트라인인데~ (손들고) 지원 할게요.
박상영: 나도 할 수 있지~형보다 어리니까~대한의 건아로서 내가 빠질 수 없지~지원하겠습니다.
이광용: 그런데 이 서독행 티켓 아무나 받을 수 없겠죠. 자~ 여기 있는 이 모래주머니 자루를 번쩍 들 수 있어야 통과!~
박상영: 이거 몇 킬로나 되는 거예요?
이광용: 평소 돼지고기 즐겨먹죠. 돼지고기 딱 100근~ 몇 킬로그램입니까?
이시원: 60 킬로그램, 근데 영화 국제시장(2014년)에서 파독광부 뽑을 때와 똑 같은데~ 저거 설정인줄 알았거든요. 진짜 했던 거예요?
----------------(동영상) 심사관: 자~ 1번부터 시작, 1번후보자: (60킬로 모래주머니 들어올리지 못한다), 심사관: 실격, 2번후보자: (60킬로 모래가마니 들어올린다)~, 심사관: 합격~
이광용: 이 모래주머니 들기는 달리기, 역기들기, 턱걸이와 함께 파독광부를 뽑는 정식체력시험의 중요한 과목이었어요. 자~ 딱 잡아 그리고 들어~~번쩍 어깨에 올려~일어나~
박상영: (60킬로 모래주머니 들지도 못한다~)
이광용: 젊으니~ 나가는 길은 저쪽인데~ 튼튼하게 생긴 젊은이 (다니엘)
다니엘: (60킬로 모래주머니 들어올리지 못한다)
허진모: 얼굴 빨개 졌어~다니엘
다니엘: 이거 마동석 아니면 못들 것 같은데요
박상영: 60킬로 들고 하는게 뭐가 필요합니까, 이유가 있어요?
이광용: 파독 광부들은 탄광을 지탱하기 위해 매일 60킬로그램이 넘는 동발(갱도를 받치는 기둥)이란 쇠기둥을 쉴새없이 뽑고 세워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절대적으로 체력이 필요했던 거죠. 막장에 도착해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이걸 치우고 얘기를 계속 하죠~
이시원: 둘 다 불합격인 건 가요?
이광용: 보셨잖아요 (당연한 소리), 뒷 쪽을 보시면 파독 광부들이 일했던 탄광을 재현해 보았습니다. 광부들은 이렇게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갱도(60센티미터)를 파고 들어가며 장시간 작업을 해야만 했는데요~
박상영: (갱도 들어가려다 빠른 포기)~
다니엘: (갱도 안으로 기어들어가다) (여기서) 가만히 있는게 아니잖아요.
이광용: 그렇죠, 가만히 있는게 아닙니다. 이 안에서 작업도구(곡갱이)를 들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다니엘: (곡갱이) 이걸 어떻게 일하죠, 각도 자체가 안나오는데~
이광용: 지하 천미터를 내려가면 지열 상태가 35도를 훌쩍 넘어갑니다. 누구나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조금만 일해도 작업복이 금새 땀으로 젖기 때문에 파독 광부들은 이 갱도 안에서 움직이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다니엘: 아니~ 머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일하는 각도도 안나오고 그리고 탄광이잖아요. 계속 석탄 가루도 날렸을텐데~ 그것 들이마시면서 작업을 해야 했으니까 엄청난 고문이었을 것 같애요.
이광용: 광부들은 작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 갱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탄광 안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죠. 석탄 가루가 묻은 빵과 물로 말이죠. 당시 한 파독광부의 일기엔 “굴 속에서 이렇게 머리가 아파보기에는 처음이다~6시간 시종일관 기어다니면서 일을 하였다” 여기에 어둠과 열기 그리고 탄광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작업을 해야 했던 우리 파독 광부들~이들이 탄광으로 내려가기 전에 서로에게 건넨 인사말은 귈뤽 아우프(Glu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귈뤽 아우프~
최원정: 저는 지금 저걸 보면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막장이 갱도의 맨 마지막이란 뜻인데 그만큼 험하고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리고 그만큼 진지한 삶의 터전인데 우리가 저~ 막장을 굉장히 안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 말을 안썼으면 좋겠어요.
박상영: 막장 드라마 라는 이런 단어도 쓰지말고~
최원정: 도이치 드림이 이렇게 힘들었구나 어려운 일이었구나 느끼게 되는데요.
다니엘: 엄청 힘들었고 사실 귈뤽 아우프는 행운(Gluck)이라는 뜻이거든요. 쉽게 말하면 행운을 빌다 라는 뜻이지만 16세기 정말 광부들만 쓰는 표현으로만 탄생한 거예요. (글뤽아우프Gluck auf-팔 수 있는 광석을 발견하는 행운을 빈다 살아서 돌아오라). 광부들이 탄광에 들어가서 두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어디 들어가서 광석이 나타났으면 하는 행운을 비는~ 왜냐면 그걸 못꺼내오면 월급을 못받으니까 고생만 하는 거구 또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살아서 돌아오라 탄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옛날에 잠깐 에센에 있는 탄광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가끔씩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정말 덥고 힘들었다고~
박태균: 지금도 탄광사고가 많이 나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환경이 얼마나 더 열악했겠어요. 사고들을 보면 파독된 광부 26명이 돌아가셨고 17명이 병사를 했다 라고 합니다. 폐에 석탄이 차 가지고 병을 앓거나 또 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분이 많았다는 얘기죠.
허진모: 그리고 파독 광부 대부분이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파견이 됐던 거죠. 사실 저 중노동을 하면서 말 배우기가 쉬웠겠습니까. 게다가 광산이라는 곳이 일종의 특수직업 전문용어가 많이 있다 보니까 더 더욱 외우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제가 옛날에 독일어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광산용어 몇 개를 가져와 봤습니다.
다니엘: 발음해 봐요
허진모: 독일어로 작업복을 아르바이트안주크 arbeitsanzug~
다니엘: 나쁘지 않았어요.
허진모: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 (단어장을 다니엘에게)
다니엘: 이거 잘 안쓰는 단어~ 어려운 단어들이네~확실히 작업복은 이제 아바이트안쓰쿠~
일동: 발음이 전혀 다른데~
다니엘: (허진모씨 발음은) 오스트리아 악센트예요. 그리고 도구상자는 게래트코스텐 gerat kosten 이란 말을 쓰고요 그리고 동발 세우기 스템펠 셋젠 Stempel setzen
박태균: 안외우셔도 돼요~
이시원: 소통이 중요한데 소통이 안돼서 일어나는 사고도 많았을 것 같애요.
최원정: 저렇게 일이 고되고 힘들었다는 소문이 다 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원자들은 끊이지 않았다고 그러더라구요. 먹고 살아야 되는게 더 간절~ 간호사분들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던데~
허진모: 그렇죠,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은 정말 전문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떠날 때 사진을 보면 대부분 한복을 입었습니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그런데 막상 서독에 가서 그들한테 맡겨진 임무는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거죠. 환자 옮기기 씻기기 대변을 처리하는 업무들이 주어졌던 거죠. 사실 그 당시에 독일 간호사의 업무 중에는 지금의 간병업무가 크기는 했데요. 그게 간호사의 업무이긴 했는데 힘들고 기피하는 일이 우리 파독 간호사들에게 주어졌던 거죠.
다니엘: 저의 엄마와 막내 이모가 둘 다 간호사라서 환자 옮기는게 진짜 힘든 일이래요. 왜냐면 여성 혼자서 이를 테면 100킬로가 넘는 사람도 있으니까 100킬로 넘는 환자를 옮기는 그런 작업들은 정말 어렵죠~
박상영: 60킬로도 힘들었잖아요.
허진모: 독일여성도 그렇게 힘든데~
박태균: 오로지 이분들은 어쨌던 내가 돈을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살려야된다 이 의지가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애요. 이런 분들이 거기가서 받은 월급을 송금을 다한 거죠. 자기 생활비를 빼고는~ 일년 반 정도 일을 하면은 70만원 정도 되는 집들을 서울이나 미아리 지역에 살 수 있었다 라는 거예요. 내가 이걸 참아서라도 우리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보겠다.
다니엘: 한국 간호사분들과 광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빨리 친해질 수 있어서 나중에 정말 좋은 인상을 받아서 독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Korea Lotus Blume(대한민국에서 온 연꽃) 라고 부르기도 하고 코리안 앤젤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허진모: 해외에 나가서 이렇게 송금을 보내오신 분들을 해외산업역군 이라고 불렀는데요. 그만큼 이분들이 보내온 돈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합니다. 64년부터 75년까지 파독근로자의 국내송금액이 1억137만 달러,
이시원: 이건 정말 맨몸으로 가서 벌어온 돈이잖아요. 추가적인 재료비나 인건비가 드는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상품을 만들어서 팔아서 얻는 수출액보다 해외 노동자들이 보내온 돈의 수출기여도가 1.66배 더 높다고 해요. 그러니까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내온 외화가 실제 수치보다도 더큰 수치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상영: 역시 경영학도 다운~
박태균: 이렇게 되니까 1965년에 해외개발공사를 만듭니다. 그렇죠,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독일뿐만이 아니라 미국, 다음에 남미, 이런 데에 다 보내야 된다. 지금도 그 지역에 계신 많은 교포들 중에는 이 시기에 나가신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최원정: 돈벌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해외파견 노동자가 있습니다.
------------(동영상) 기자: 과거 무역업자나 특수층에서만 드나들던 한국은행 외환과에는 최근 일반 서민고객이 붐비고 있어 그 이유에 대해 외환과장 홍성묵씨는 “요즘 돈을 찾는 사람들은 전과는 달리 서민층이 부쩍 늘었는데 이런 현상은 월남에 진출한 기술자들로 부터의 송금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에요. 지난 4월에는 겨우 5백여 건에 약4만7천불이 되던 것이 이달 들어서는 2천3백건에 40만불을 넘어섰습니다.” 기자: 1965년 전투 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된 이후 정부는 민간인 기술자들을 선발 베트남에 파견하기 시작한다. 국내보다 훨씬 좋은 임금 조건에 6만여염의 민간인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파견됐다. 이들이 벌어드린 외화는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
최원정: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 기술자가 베트남을 향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잖아요. 6만여명이나~
박태균: 굉장히 많이 갔는데요. 우리의 파병규모가 워낙이컸죠. 65년부터 해서 73년초까지 총30만명이 넘게 갔기 때문에 5만에서 6만명 되는 베트남에 갔던 근로자 문제는 거의 묻혀 있었던 거죠. 제가 실제로 연구를 해보면서 그 당시에 베트남에서 송금했던 액수를 보니까 파견됐던 근로자들이 보냈던 송금 액수가 군인들이 보냈던 송금액수와 별 차이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임금 차이가 있는 거예요. 군인들은 가서 전투수당을 받았죠. 이분들은 근로자로 가서 월급을 받았어요. 1968년 파월 노동자들의 송금액을 보면 약1억6600만 달러, 이 액수를 저희가 생각을 해보면 1970년에 10억달러 수출을 할 때 송금액이 지금 1억6600만 달러에요. 굉장히 큰 액수죠.
허진모: 이분들이 했던 일은 미군의 요구에 의한 군사기관 시설을 만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군수물자를 하역하고 보관하고 운반하고 여기에 필요한 항만접안시설 창고 길 이런 걸 하는 거였죠. 70%는 미국계 회사에 취업을 하고요 30%는 한국계 회사에 취업을 했다고 합니다.
박태균: 여기 보면 근로자 모집하는 신문광고인데요. 여길 보면 모든 일이 다 있어요. 가능한 한 더 많은 분들을 베트남에 보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드리겠다.
이시원: 당시 월급이라고 해야 되나 돈은 얼마나 받았어요?
박태균: 월급이 최저 400달러 까지 준다는 부분이 있어요. 당시에 400달러를 받는 다는 건 한국에서 일반 노동자가 받는 월급의 15배 정도 예요.
최원정: 파월 기술자들이 의외의 분야에서 활약을 했다죠.
------------------(동영상) 이광용: 베트남전이 장기화 되면서 미군은 군수품 보급에 차질을 빚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의 한 운송기업이 이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어 군수물자를 운반하게 되는데요. 출발은 남베트남에 있는 작은 항구 꾸이년(Quy Nhon)항이었습니다. 박사님! 꾸이년항은 대체 어떤 곳이었습니까?-------------------
박금수/박사: 꾸이년항은 남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항구인데요. 베트남 내륙으로 향하는 주요도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항구가 작아도 너무 작았던 거예요. 그래서 꾸이년 항에는 당시에 하역작업을 하지 못한 미군의 대형 선박들의 정체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업이 하역작업과 운송작업을 한방에 해결해 주겠다고 하자 처음 미군의 반응은 오~ 노! 댓츠 임퍼서블 (야~안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업은 당시에 이 용역만 우리에게 맡겨주면 100일안에 작업을 착수해서 사흘마다 한 척씩 이 하역을 완료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기한을 어기게 되면 하루당 만불의 벌금을 내겠다고 하면서~
이광용: 무슨 신기술이라도 개발한 건가요?
박금수: 당시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는데요.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비엔나-소시지~
최원정: 비엔나 소시지가 왜 여기서 나와~
이광용: 전설의 도시락 반찬, 비엔나 소시지~
이시원: 도시락 먹고 힘내서 성공했나요?
박금수: 그런건 아니었구요,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 작전, 그래서 이 당시에 항구가 작으면 대형선박이 접근하기가 어렵잖아요. 이때에 어떤 아이디어를 냈느냐 하면은 바지선 있죠? 무동력 바지선, 바지선 30척을 이렇게 줄줄이 비엔나 처럼 엮어서 왔는데 어디서부터 왔느냐 홍콩에서부터 와요. 홍콩에서 그 거친 바다를 뚫고 베트남까지 줄줄이 비엔나가 딱 붙는 거예요. 줄줄이 하역작업을 신속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바지선들은 수심이 얕은 지역에서 쉽게 하역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쭉 끌고 와서는 한번에 초고속으로 하역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광용: 그런데 말이죠~ 일단 하역을 했다고 쳐요. 하역후에 전쟁터에서 물건을 운반하는게 쉬운일이 아니잖습니까?
박금수: 베트남전의 특징은 전후방이 따로 없다는 거에요. 서울과 부산 정도의 거리가 되는 중부 내륙까지 군사물자를 수송하는 동안 언제 어디서 베트남 공산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미군이나 한국군의 호위를 받을 수도 있었죠. 하지만 수송단 스스로 습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빛을 발한 것이 바로 충성! 대한민국 전역군인의 파월이었습니다.
이광용: 오~ 전역군인! 충성!
박금수: 수송물자를 트럭에 실으면은 다음에는 바로 지프차인데 지프차가 그냥 지프차가 아니라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차가 앞뒤에서 호송을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이 지프차에는 군인이 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역 군인출신 수송단의 민간인 직원들이 타는 것입니다. 철모! 자, 이렇게 철모를 쓰고요~ 방탄조끼를 입습니다.
이광용: 거의 군인인데요~
박금수: 그리고 지급받는 것이 바로 실탄~ 이 실탄과 함께 자동소총까지 지급을 받고 호송작업을 진행합니다. (이광용 아나에게) 자~ 총기를 드리겠습니다. 수송물자를 호송해 봅시다. 자~ 갑시다. 쭉~ 운전해 가다가 저기~ 적이다. 뚜두 뚜두~ 적이다 뚜두 뚜두~ 수송관은 비록 민간인 신분이지만 군인생활을 통해서 다져진 전투력을 바탕으로 험한 전장을 뚫고 수송작전을 완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광용: 전역군인의 파워로 우리 기업은 1주일이 걸리던 수송기간을 무려 이틀로 단축을 시킨 거죠. 확 단축을 시킨 거죠. 목숨을 건 수송작전은 그림으로도 그려져서 미국 국방성 수송박물관에 까지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역사저널 그날 이광용, 박금수~ 보람찬~ 하루 일을~
최원정: 민간인 신분으로 저렇게 전장을 뚫고 다녔다. 정말 대단한 거 같애요. 우리가 웃으면서 봤지만 너무~ 위험한 일을 맡은 거 아닌가요.
허진모: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기업은 베트남에 대거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데요. 1967년부터 70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들어온 외화가 우리나라 전체 외환보유고의 40%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병을 하면서 미국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내는데요. 1억5천만불을 얻어내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사용합니다. 파월기술자하고 파월군인들의 총수를 합치면 전체 경제활동 인구대비 7% 정도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7%가 내는 경제효과 영향은 그 비율을 훨씬 넘었던 거죠.
다니엘: 너무나 위험하니까 그냥 목숨 값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는 것 같애요.
허진모: 이들을 그래서 군번없는 군인 이렇게들 많이 불렀죠.
최원정: 방탄 조끼 입고 그랬지만 실제로 죽는 분들도 있지요?
박태균: 그럼요, 굉장히 위험한 데를 갔구요. 호치민 루트라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이시원: 아니요~
박태균: 호치민 루트라는 게 있어요. 북베트남 쪽에서 직접 내려오는 게 아니고요. 옆에 있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서 내려옵니다. 이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거친 루트를 우리가 호치민 루트라고 했거든요. 이 루트로 들어와 가지고 남베트남의 중부로 내려오는 거예요. 이제 여기에 한국군과 근로자들이 활동했던 데 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지역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것이죠. 일하다가 폭탄이 터지기도 하고 중간엔 갑자기 총을 쏘기도 하고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하다보니까 운수기업에서 69년초까지 파월 직원이 16명이 죽게 됩니다. 저는 제일 안타까웠던 사건이 베트남에 갔었던 근로자들이 돌아온 이후에 거기 파견되어 가 있었던 기업빌딩에 불이 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임금이 체불이 된 거예요. 이분들이 목숨걸고 가서 일했는데 임금이 체불이 되니까 임금 내놓으라고 그 회사로 몰려간 것이죠. 이것 때문에 얘기하다가 흥분을 해 가지고 방화를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분들이 방화죄로 처벌을 받아요. 이 사건이 1970년대 초에 굉장히 상징적으로 베트남 전쟁 때 근로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구요.
이시원; 교수님,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걸고 돈 벌러 일하러 가는 건지~ 싸우러 가는 건지 모르는 환경에 처했었는데~ 그래도 돈은 많이 벌었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경제에 많은 도움은 되었나요?
박태균: 엄청난 도움이 됐죠. 그런데 저는 굉장히 궁금한게 있어요. 뭔가 요시기에 한국이 제1차 외환위기가 일어납니다. 요때가 가장 많은 파월장병과 파월 근로자들의 돈이 들어올 때예요. 돈이 들어올 때인데 부실기업이 많아지고 외환위기가 오는 거에요.
박상영: 외환이 계속 들어오는데 위기가 닥친 다고요?
-----------------(동영상) 기자: 1960년대 후반 이후 무리한 외자도입으로 외채부담이 가중돼서 빚더미에 앉는 부실기업이 속출한다. 1972년 8월 3일, 정부는 기업이 질머진 사채를 유예하는 내용의 8.3조치를 전격 발표한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발표된 이 조치는 채무부담에 시달리는 기업들에게 커다란 특혜였다---------------
박태균: 그때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얘기하는게 있습니다. 이 문제는 기업가들의 모럴 해저드 문제다. 기업가들에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 왜 그러냐 수출하라고 돈을 꾸어주고 차관을 해주고 하는데 이걸을 수출을 위한 생산에 쓰지않고 다른데 쓴게 아니냐.
박상영: 땅을 샀구나!
박태균: 그것도 있습니다. 사실은 정부에서 다 조사를 해요. 부동산 가지고 있는 것도 다 파악을 하고 두번째는 재벌 총수들이 자기회사에다 사채를 주는 거예요. 자기 이름이 아니고 자기 가족의 이름으로 사채를 줘요. 그걸 위장사채라고 그래요.
이시원: 고리대금업을 위장으로 했네요.
박태균: 그 당시 사채이자가 엄청 비쌌거든요. 그거를 동생 이름 조카 이름으로 해서 빌려주고 자기 회사의 사채이자를 받아서 자기가 챙긴 거예요.
이시원: 들으면 들을 수록 화가 나는 게 국민들의 노력을 뒤에서 갈취하는 듯한 느낌을 지을 수가 없어요.
박태균: 8.3조치를 통해서 일단 위기의 경제는 한번 살리고 갑니다. 왜냐하면 8.3조치 라는게 시장경제에 반하는 것이지만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면은 사실 기업에 고용되었던 근로자들이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73년초에 파리협정이 조인이 돼요 (파리협정 1973.1.27-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체결된 베트남전쟁종결 약속). 미국하고 베트남이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미국이 나오니까 우리도 안나올 수가 없잖아요. 다 나왔어요. 나오니까 할 게 없잖아요. 갔다 온 근로자들이나 장병들이나 와 가지고 할 일이 없는 거에요.
최원정: 지금까지 계속 얘기해 왔던 많은 문제들이 있고 경제도 뭔가 삐걱되고 있고 그런데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동영상) 기자: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삼았고 원유값은 급등했다. 오일달러가 넘쳐나자 시작된 중동의 건설 붐, 1973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우리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중동건설사업에 뛰어든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달려간다. 오로지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그것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모래 바람 속에서도 사막의 기적을 일구는 원동력이 되었다.
최원정: 경제위기로 나라가 휘청일 때 중동건설 붐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많은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을 했죠----------------------
허진모: 사실 우리나라는 준비된 건설사들이 많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서 수많은 국가기관 사업을 해왔던 건설 노하우를 갖춘 기업들이 참 많았구요. 여기에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높은 기술력을 갖춘 기술인력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게 대거 중동으로 가게 된 거죠. 기술력은 엄청 높은데 가격은 저렴한 아주 가성비 좋은 기술자였던 거죠.
최원정: 또 우리 기업들은 빨리 빨리 문화에 굉장히 능하잖아요. 사우디 아라비아에 제일 먼저 진출했던 기업의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는데 정말 공사장에 횃불을 쫙 깔아놔서 3교대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했데요. 그걸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왕이 보고 한국 사람들이 정말 끝내준다. 최고다! 라고 칭찬을 하면서 그 이후에 우리 기업들의 중동진출이 더 쉬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박태균: 중동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석유값 오르고 하면서 돈은 분명히 많은데 국민들한테 경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돼요. 한국은 기업이나 근로자가 가면 너무 빨리 되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냐 이런 부분에서 한국의 건설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중동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이시원: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하는 기업이 바로 한국 기업이잖아요.
허진모: 한국인들이 얼마나 빨리 빨리로 유명했었냐면 단체로 어느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예약이 꽉 차서 받을 수 없다고 하다가 혹시 한국인? 빨리 먹고 가니까 받아줬다고 합니다.
박상영: 10분이면 가능하잖아요.
다니엘: 처음으로 짜장면 먹었을 때 관장님이랑 12명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는데 저는 그때 처음 먹으니까 한국의 파스타 개념이었거든요. 천천히 얘기하면서 3분에 다 먹어버리는 거예요. 관장님도 다 먹었지 하니까 네~ 하고 일어나는데 전 그때 막 시작했거든요. 진짜 빨리 빨리 먹는다~
박상영; 세 젖가락이면 끝나죠.
박태균: 70년대가 되면은요. 60년대 하고 차이가 있는 것 같애요. 1960년대 얘기할 때 보면은 해외인력공사 만들고 인력파견 몇 개년 계획 세우는데 이때는 이제 1970년대 기업이 이것을 합니다. 저희가 자본주의 국가 자유시장 국가로서 기업이 진출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같이 가고서 자본과 노동이 서로 결합되는 양상이 보이는 거구요. 또 이 시기는 다른 차이가 60년대는 정말 그때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너무 가난한 나라로 일했는데 70년대가 되면 중산층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박상영: 제가 사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라는 희대의 화제작을 쓰는 당시에~ 제 입으로~ 중동건설 노동자들을 직접 취재해서 썼었어요. 그때 건설현장에 계시던 노동자분들은 나이의 고하에 상관 없이 머리가 모두 백발이었다구요.
이시원: 모래 바람에 쌓여서~
박상영; 맞습니다. 모래 바람이 계속 불어와서 머리카락에 계속 모래가 쌓여서 이걸 털고 할 그런 기회가 없었던 거죠.
최원정; 눈 코에 다 들어갔을 거 아녜요.
박상영: 그렇죠 너무 시야를 확보하기도 힘들고 한번 입 열었다 하면 무조건 모래가 들어오고 모래와 바람이 많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속 눈썹이 길더라구요. 중동사람들 눈썹 길고~
이시원: 낙타의 속눈썹이 굉장히 길잖아요.
허진모: 저도 한번 가본적은 있는데 50도를 넘나드는 그런 곳에서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을 했어야 했던 거죠. 그러니까 필수품이 있습니다.
다니엘: 뭐가 많네요.
허진모: 선글라스~ 눈을 못뜨니까 선글라스를 써야 되고~ 여기에 또 스카프를 둘러야 돼요.
다니엘: 영화가 생각나네요, 톰 크루즈가 두바이에 가서 선글라스 쓰고 스카프를 두르고한
허진모: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입을 가리고) 입을 딱 가리고 이렇게 해서 하루 종일 일을 했다고 합니다. 잠시만 써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그런데 얼마나 한국인들이 부지런했던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잔업과 야간 작업 다하고 그리고 휴일 작업까지 다 했던 거죠. 모든 수당을 주는 일은 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남는 시간에는 현지인들의 집에 가서 별도의 시공을 하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투잡을 했다고~
박태균: 이게 인제 중산층의 꿈이란게 있었던 거 같애요. 그 당시에 중동 근로자들의 70년대말에 월급은 한 50만원 정도되는데~70년대 말에 있었던 유명한 사건이 현대아파트 사건이라는게 있어요. 현대아파트 라는 게 그 당시 1978년에 강남에 처음으로 지어지는데 고급아파트라고 권력층과 언론 쪽으로 뇌물을 주고 분양을 했다해 가지고 문제가 됐는데 현대 아파트 그 당시 가격이 나온 게 999만원으로 나왔어요. 천만원입니다. 그럼 50만원의 월급을 2년 정도 모우면 아파트를 하나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박상영: 좋은 시절이었네요.
박태균; 그 참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내면서 내가 뭔가 하여튼 마련을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허진모: 제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 아버님 중에 중동에 가신 분들이 참 많았는데 그 친구네 집들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단 놀러가면 집이 좀 좋았어요. 어린 마음에 새장판이 약간 깔려 있었고 그리고 양담배가 있었던 걸로 볼 수 있었구요.
박상영: 그걸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거죠?
허진모: 친구가 자랑을 많이 했어요. 이거 모았다. 장난감도 있고 외제 물건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 아버지들이 돌아오셨을 때는 양옥집으로 이사를 갔었어요.
최원정: 티브이에서도 많이 나오잖아요. 중동건설 노동자들이 귀국 하면서 꼭 사오는 것들 쿠키 밥솥~ 여러분 알아요?
박상영; 저 할머니 집에서 초등학교 때까지 쓰셨어요. 부의 상징이라고~
최원정: 대형 일제 라디오도! 가족 생각으로 버텨낸 사막의 노동, 중동 기적의 원동력이 된 거죠.
박태균: 사실 당시 해외 건설에 수주액을 보면 매년 거의 60% 수준으로 계속 올라갔다고 하죠. 80년이 되면 거의 20만명에 가까운 건설 노동자들이 나갔구요. 수주액도 82억 달러가 돼요. 저희가 77년에 100억불 수출하잖아요. 82억불의 수주액을 했다는 거는 80년이 되어 2년~3년이 지난 걸로 따지더라도 전체 수출액의 반 이상이 되는 엄청난 액수의 외화를 벌어온 역할들을 하는 거죠.
박상영; 한국에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서독으로 베트남으로 중동으로 전 세계로 나가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이 당시에 경제구원 투수 같은 역할을 꾸준히 계속 해왔던 것 같애요.
다니엘: 지금 한국에서 산지가 만12년 됐는데 한번도 우리 경제개발에 제가 기여한 적 없는 거 같애요.
박태균: 한국경제 개발이에요? 독일이에요?
다니엘: 독일이요.
박상영: 어머니께 용돈 보내드릴 때마다 무역수지에 도움이 돼죠.
다니엘: 저도 시도해 봤었는데~ 부모님한테 용돈 한번 보내드려 봤는데 알베르토 형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요. 둘 다 혼났어요.
최원정: 아니~ 왜요?
다니엘: 우리 문화 아니라서~ 니가 나한테 왜 돈을 보내느냐
박상영; 이거 저희 엄마한테 보여드려야겠어요.
다니엘: 그래서 저는 여기서 번 돈을 제대로 한번도 독일로 보낸 적 없는 것 같애요.
허진모: 그런데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너무 빨리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 한국기업의 뭐랄까 최대 강점이죠. 빨리 빨리 정신은 공사기간 공기를 무리하게 단축시키는 일종의 관행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기업한테 맡기면 이거보다 더 빨리 해주겠지 하게 되고 점점 기대 수준이 높아진 거죠. 1988년에 이란-이라크전이 한창이었는데 우리나라 기업은 전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작업을 했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라크군이 공습을 해가지고 일하고 있던 노동자 13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박상영: 민간인 13명이 희생을 한 것이잖아요.
허진모: 안전불감증의 끝판왕이었죠.
최원정: 전쟁터에 근로자를 방치를 할 수가 있네요. 당연히 철수를 해야지~
허진모: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죠.
이시원: 문화가 그런 식으로 정착이 되어 버린 것 같애요. 지난친 성과주의에 따른 안전불감증, 그래서 결국 이런 희생도 나타나구요. 이건 우리가 고민하고 개선해야할 부분이긴 하겠네요.
박태균: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는가 1983년 20세 이하 월드컵 대회인데 우리나라의 청소년 축구팀이 세계 4강에 올라가요. 당시 4강에 진출한 팀이 한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폴란드예요. 그 당시에 자유세계에서 외채가 제일 많은 세 나라가 한국 브라질 아르헨티나였어요. 그 다음에 폴란드가 4강중의 한 나라인데 동유럽 국가 중에서 외채가 제일 많은 나라였어요. 70년대말에 오일달러를 벌어온 그 많던 돈이 날라가 버리고 외채가 제일 많은 나라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거예요. 또 한번 생각해 보는데 그 많던 돈이 다 어디로 갔을까? 저는 이 시기를 보면은 1960년대말하고 똑 같애요. 많은 기업들이 그렇게 들어온 돈을 부동산 투자에 썼다.
최원정: 아~ 또 부동산 투자야~ 투자가 아니고 투기였죠.
박태균: 기업은 번 돈을 다시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가치를 높이고 이렇게 가야 되는데~ 그러면서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됩니다. 70년대초 (1972년)에 했었던 부실기업정리(8.3조치)와 똑 같은 경제 구조조정(1979년 경제안정종합시책)을 하게 돼요. 이게 아무리 국민들이 열심히 벌어와도 실제 그 돈들을 어떻게 적재적소에 잘 쓰는가 이걸 잘 운영하는가 라는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거죠.
최원정;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라이브 드로잉이 방금 끝났습니다. 완성이 됐어요. 김정기 작가님! 저희 녹화 내내 아주 세심하게~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얘기를 좀 해주세요.
김정기/화백: (흑백으로 된 손으로 그린 그림), 우선은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했는데요. 거기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들에서 휴식 시간에 식사하고 있는 모습들 그리고 검은 때를 벗겨내는 샤워하는 모습들을 담았고요. 독일에 파견되는 간호사들 이야기에서 헤어지는 가족들의 모습과 그때 한복을 입고 파견되었다고 해서 그때 비행기타는 모습들 환자를 돌보는 모습들 여기는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들의 모습들인데요. 좀 위험했던 상황들의 표현도 있고요. 마지막으로 중동에서 뜨거운 열기와 사막에서 일하는 모습들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이시원: 한 장의 그림으로 담아낸 오늘의 이야기~
허진모: 밑그림도 안그리고 저렇게~ 화면을 볼 때 저기 뭔가는 있을 꺼야 그 위에다가 칠을 할꺼야 생각했는데 전혀 없더라구요.
박상영: 귀퉁이에서부터 그렸잖아요.
김정기: 현장에서 바로 그리는, 보통은 작가들이 자기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제가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난 것까지 보여드리는 모습들, 그리고 보통은 라이브 드로잉할 때 관객들한테 물어봐요. 어떤 주제로 할까요. 그러면 던져주는 주제로 시작을 하고 끝을 맺죠~
이시원; 꼼수를 쓸 수가 없네요~
박상영: 듣자마자 바로 그리시는 거니까요.
최원정: 종종 스튜디오 나와서 라이브 드로잉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 한 장의 그림을 보고 나니까 우리 해외 근로자들 해외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해내셨고 이분들의 이런 노력들이 경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라는 실감이 됩니다.
박상영: 유엔에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건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 뒷편에는 세계 곳곳으로 파견된 노동자들의 어떤 노력이 있지 않았나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가치를 대우 받을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아닐까 싶어요.
다니엘: 세계 홍반장 같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히어로 같은~ 어디가든 뭐가 필요하면 빨리 빨리 해주는 그런~
허진모: 이 당시에 배 안고프고 고생 안하신 분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만 오로지 가족과 나라만 생각하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저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6.25 미군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애국심만 있다고~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그분들이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박태균: 많은 한국인들이 60년대, 70년대 우리 경제성장 과정에서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려고 고생하신 것처럼 지금의 한국에 와서 일하시는 그런 분들이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저희가 우리 교포들한테도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한국에 와 계시는 분들 한테도 사실은 그분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분들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가고 연말연시에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그런게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정말 그렇게 열심히 해서 들어온 돈들을 이 나라와 기업의 리더들이 이걸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에 고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원정: 이번 편이 올해 마지막 방송인데 역사에 길이 남을 2020년 모두가 힘들었잖아요. 다 툭툭 털어버리시고 내년에 더 건강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4회에서 정리).
① 1963년 8월, 1차 파독 광부 190여명이 출발했고, 1966년에 1차 간호사 파독이 있었다. 간호사 월급 최고 800마르크, 당시 장관 월급 52,490원 파독 간호사 월급 약65,000원, 광부월급 160달러 정도 한국 돈으로 환산 5~6만원 정도, 당시 한국 9급공무원 월급 4천원, 10~15배 정도의 높은 월급, 1966년 1달러, 짜장면 8그릇, 화랑담배 54갑, 시내버스 33번 탑승, 극장에서 영화를 10번을 보고 돈이 좀 남았다.
② 당시 말도 안통했을텐데 낯선 나라 서독에 왜 많이 가려고 했을까. 광부 190명 모집에 2895명이 왔다. 5:1 정도, 높은 경쟁율을 뚫고 합격자들 73% 이상이 고졸 이상의 고학력자, 서울법대생 명문대생들 고급 인력도 많았는데 교사 출신, 경찰, 장관 보좌관 출신, 먹고 살아야 되는게 더 간절했다, 간호사들은 정말 전문인력, 그들한테 맡겨진 임무는 환자 옮기기 씻기기 대변을 처리하는 업무들, 힘들고 기피하는 일이 우리 파독 간호사들에게 주어졌다. 100킬로가 넘는 환자를 옮기는 작업도,
③ 1964년 박 대통령 서독방문, 전용기가 없어서 일반 여객기를 타고 26시간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뒤스부르크시 함보른 지역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봤는데 고생한 티가 너무 역역했다. 고국을 떠난지 1년만에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눈물보가 터져서 바다를 이루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러분 미안합니다. 외국에서 이런 고생을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이런 불행을 겪게 하지 맙시다.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이런 말을 했다고. 6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가 너무 못살았다. 세계 최빈국이었다. 1963년 1인당 국민소득 가나 $200, 필리핀 $190, 한국 $120, 독일에 가서 돈을 벌려고 67년까지 18,000명이 독일로 갔다. 우리 근로자들이 독일로 가게 된 이유는 19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무상원조 정책이 58년부터 유상원조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63년에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해외 차관이 급선무였다.
④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생활비만 빼고 다 송금을 하였다, 일년 반 정도 모우면 70만원 정도 되는 집들을 서울지역에 살 수 있었다.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빨리 친해질 수 있어서 나중에 정말 좋은 인상을 받았다. 독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Korea Lotus Blume(대한민국에서 온 연꽃), 또 코리안 앤젤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4년부터 75년까지 파독근로자의 국내송금액이 1억137만 달러,
⑤ 서독에서 3년간 일할 광부 모집, 20살~35살 지원 가능, 파독광부 뽑는 정식체력시험, 60킬로 모래주머니 들기, 달리기, 역기들기, 턱걸이. 지하 천미터를 내려가면 지열 상태가 35도를 훌쩍 넘어간다. 누구나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조금만 일해도 작업복이 금새 땀으로 젖기 때문에 파독 광부들은 이 갱도 안에서 움직이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상황, 탄광 갱도 안에서 머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일하는 각도도 안나오고 계속 석탄 가루도 날리고 그것 들이마시면서 작업을 해야 했다. 광부들은 6시간 작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갱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탄광 안에서 식사는 석탄 가루가 묻은 빵과 물이다. 당시 한 파독광부의 일기엔 “굴 속에서 이렇게 머리가 아파보기에는 처음이다~6시간 시종일관 기어다니면서 일을 하였다” 어둠과 열기 그리고 탄광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작업을 해야 했던 우리 파독 광부들 이들이 탄광으로 내려가기 전에 서로에게 건넨 인사말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파독광부 26명 사망 17명 병사 폐에 석탄이 차 가지고 병을 앓거나 사고로 돌아가셨다. 파독 광부 대부분이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파견이 됐던 게 문제였다. 정부는 1965년에 해외개발공사를 만든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미국, 남미에도 보낸다. 지금도 그 지역에 계신 많은 교포들 중에는 이 시기에 나가신 분들이 굉장히 많다. 알려지지 않은 해외파견 노동자가 있다
⑥ 1965년 전투 부대 베트남 파병, 정부는 민간인 기술자들을 선발 베트남에 파견하기 시작, 국내보다 훨씬 좋은 임금 조건에 6만여염의 민간인 기술자들을 베트남에 파견, 이들이 벌어드린 외화는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 기술자가 베트남을 향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의 파병규모가 65년부터 73년초까지 총30만명 넘게 갔기 때문에 6만명 되는 민간인들이 베트남에 갔었는데 거의 묻혀 있었다. 당시 베트남에 파견됐던 근로자들이 보냈던 송금 액수가 군인들이 보냈던 송금액수와 별 차이가 없다. 군인들은 전투수당을 받았는데 근로자들은 월급을 받았다. 1968년 파월 노동자들의 송금액을 보면 약1억6600만 달러, 이 액수는 1970년 10억달러 수출할 때 송금액이 1억6600만 달러, 굉장히 큰 액수, 한국 근로자들은 70%는 미국계 회사에 취업을 하고 30%는 한국계 회사에 취업을 했다.
⑦ 베트남에 근로자들 월급 최저 400달러 정도, 당시 400달러는 한국 일반 노동자 월급의 15배 정도, 파월 기술자들이 의외의 분야에서 활약, 베트남전이 장기화 되면서 미군은 군수품 보급에 차질을 빚기 시작, 이때 한국의 한 운송기업이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어 군수물자를 운반하게 되는데, 출발은 남베트남에 있는 작은 항구 꾸이년(Quy Nhon)항, 꾸이년항은 남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항구, 베트남 내륙으로 향하는 주요도로와 연결되어 있었고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당시에 하역작업을 하지 못한 미군의 대형 선박들의 정체가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업이 하역작업과 운송작업을 한방에 해결해 주겠다고 하자 처음 미군의 반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기업은 당시에 이 용역만 우리에게 맡겨주면 100일안에 작업을 착수해서 사흘마다 한 척씩 이 하역을 완료해 주겠다고 만약에 기한을 어기게 되면 하루당 만불의 벌금을 내겠다고, 방법은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 작전, 이때 아이디어는 바지선 무동력 바지선, 30척을 줄줄이 비엔나 처럼 엮어서 홍콩에서부터 베트남까지 줄줄이 비엔나가 딱 붙어서 줄줄이 하역작업을 신속하게 하였다. 이 바지선들은 수심이 얕은 지역에서 쉽게 하역을 할 수 있었다. 이걸로 한번에 초고속으로 하역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⑧ 베트남전의 특징은 전후방이 따로 없다. 서울과 부산 정도의 거리가 되는 중부 내륙까지 군사물자를 수송하는 동안 언제 어디서 베트남 공산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 미군이나 한국군의 호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송단 스스로 습격에 대비할 필요, 대한민국 전역군인의 파월, 수송물자를 트럭에 실으면은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차가 앞뒤에서 호송을 하면서 간다. 바로 전역 군인출신 수송단의 민간인 직원들, 그들은 실탄과 함께 자동소총을 가지고 호송작업을 진행, 전역군인의 파워로 1주일 걸리던 수송기간을 무려 이틀로 단축,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국기업은 베트남에 대거 진출, 1967년부터 70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들어온 외화가 우리나라 전체 외환보유고의 40%를 초과, 파병을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1억5천만불의 차관 얻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파월기술자하고 파월군인들의 총수를 합치면 전체 경제활동 인구대비 7% 정도, 그런데 7%가 내는 경제효과 영향은 그 비율을 훨씬 넘었다.
⑨ 호치민 루트, 북베트남 쪽에서 직접 내려오는 게 아니고 옆에 있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서 내려오는 루트를 호치민 루트라고, 이 루트로 들어와 가지고 남베트남의 중부로 내려와서 여기서 일하는 한국군과 근로자들을 위협, 굉장히 위험한 지역, 일하다가 폭탄이 터지기도 하고 중간엔 갑자기 총을 쏘기도 하고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일하다 운수기업에서 69년초까지 파월 직원이 16명이 죽다. 베트남에 갔었던 근로자들이 돌아온 이후에 현지에서 임금이 체불이 문제, 베트남 회사로 몰려가서 말다툼하다 흥분해 방화를 한 사건, 방화죄로 처벌을 받다. 이 사건이 1970년대 초에 굉장히 상징적으로 베트남 전쟁 때 근로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보여주는 사례. 이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제1차 외환위기 발생. 가장 많은 파월장병과 파월 근로자들의 돈이 들어올 때 인데 부실기업이 많아지고 외환위기가 온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무리한 외자도입으로 외채부담이 가중돼서 빚더미에 앉는 부실기업이 속출한다. 1972년 8월 3일, 정부는 기업이 질머진 사채를 유예하는 내용의 8.3조치를 전격 발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문제는 기업가들의 모럴 해저드 문제다. 기업가들에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
⑩ 부실기업 문제는 기업들이 부동산을 사거나 재벌 총수들이 자기회사에다 사채를 주었기 때문, 사채이자가 굉장히 비쌌다. 기업들이 고리대금업을 했다. 8.3조치를 통해서 일단 위기의 경제는 한번 살리고 간다. 왜냐하면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면은 사실 기업에 고용되었던 근로자들이 문제가 되기 때문, 그런데 1973년 1월 27일에 파리협정이 조인이 돼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국군과 근로자들도 다 철수, 근로자들이나 장병들이나 다 나왔는데 할 일이 없없다. 이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삼았고 원유값은 급등했다. 오일달러가 넘쳐나자 시작된 중동의 건설 붐, 1973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우리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중동건설사업에 참여,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달려간다.
⑪ 우리나라는 준비된 건설사들이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서 수많은 국가기관 사업을 해왔던 건설 노하우를 갖춘 기업들이 참 많았다. 여기에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높은 기술력을 갖춘 기술인력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게 대거 중동으로 가게 된다. 기술력은 엄청 높은데 가격은 저렴한 아주 가성비 좋은 기술자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제일 먼저 진출했던 기업의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는데 정말 공사장에 횃불을 쫙 깔아놔서 3교대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걸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이 보고 한국 사람들 정말 열심히 일한다. 최고다! 라는 칭찬을 하면서 그 이후에 우리 기업들의 중동진출이 더 쉬워졌다고 한다. 70년대는 60년대 하고 차이가 있다. 60년대는 먹고 살 수 없어 너무 가난한 나라로 일했는데 70년대가 되면 중산층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⑫ 50도를 넘나드는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일을 했어야 했던 중동 근로자들 필수품은 선글라스와 스카프였다, 입을 딱 가리고 하루 종일 일을 했다고 얼마나 한국인들이 부지런했던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잔업과 야간 작업 다하고 그리고 휴일 작업까지 다 했다. 모든 수당을 주는 일은 다 했다고, 남는 시간에는 현지인들의 집에 가서 별도의 시공을 하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투잡을 했다고 여기에 중산층의 꿈이 있었던 것, 그 당시에 중동 근로자들의 70년대말 월급은 한 50만원 정도되는데 유명한 현대아파트 사건, 1978년에 강남에 처음으로 지어지는 고급아파트라고 권력층과 언론 쪽으로 뇌물을 주고 분양을 했다해 가지고 문제가 됐는데 현대 아파트 그 당시 가격이 999만원으로 천만원, 50만원의 월급을 2년 정도 모우면 아파트를 하나 살 수 있었다. 참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내면서 내가 뭔가 마련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⑬ 당시 해외 건설 수주액은 매년 거의 60% 수준으로 계속 올라갔다. 80년이 되면 거의 20만명에 가까운 건설 노동자들이 나가서 수주액도 82억 달러가 된다. 77년에 100억불 수출에, 82억불의 수주액을 했다는 거는 80년이 되어 2년~3년이 지난 걸로 따지더라도 전체 수출액의 반 이상이 되는 엄청난 액수의 외화를 벌어온 거다. 한국에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서독으로 베트남으로 중동으로 전 세계로 나가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이 경제구원 투수 역할을 꾸준히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