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악마가 튀어나왔나 봐!”
오늘 말씀은 ‘씨뿌리는 사람’ 비유 이야기다. 여기에서 세 종류의 땅이 나오는데 돌밭과 가시덤불 땅 그리고 좋은 땅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씨뿌리는 사람’은 하느님이요, 씨는 ‘말씀’이며 땅은 그 말씀을 듣는 우리다. 얼핏 보면 간단한 비유 말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태 13,11ㄴ),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13,12), 또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라고 하시면서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라고 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돌밭이거나 가시덤불 땅이거나 좋은 땅 중 어느 거라도 이는 우리의 과거 경험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순수한 마음 상태였다면, 양육은 그 순수한 마음에 ‘경험’이라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성장하는 유아의 마음 세계에 탄력성과 강력한 회복력을 만들어주어 ‘환난이나 박해’(마태 13,21)에도 굽히지 않는 의지를 선물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이유로든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방임을 경험한 유아는 작은 일에도 걱정(마태 13,22, 참조)하고 쉽게 흔들리며 내적 확신이 약해 사소한 일에도 의심이 잦아 숨 막히는 생활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어찌 됐든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만들어지지만, 성인이 된 지금 ‘내 마음(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에 의하면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마태 13,15)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쉬운 길을 택한다. 어쩌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길을 피하는 것은 본능에 충실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인간의 본능은 마지막 안전과 생존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은 안전장치지 생의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본능 저 너머에 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님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의 내면이 좋은 땅으로 만들어지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각’, 즉 깨달음은 양육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 과정인 일생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양육과정에서 ‘돌밭’이 되었다고 해도, ‘가시덤불’만 가득한 땅이 되었다고 해도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다양한 세상 경험’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이치를 깨닫고 진리를 자각할 ‘책임-자유의지’가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마태 13,11ㄱ)이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마음이 ‘돌밭’이라면 또는 ‘가시덤불’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표현만 다를 뿐 ‘너 자신을 알라!’는 오래된 물음과 같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자각하고 깨닫는 일’은 우리 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간다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자기(Self)’를 아는 일이 그렇게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착한 아이’가 자기를 알게 되면 ‘자기(self)’가 얼마나 헛된 것(타인의 욕구와 시선으로 표현되는)을 쫓아 살아왔는지를 깨닫고 자각하게 될 텐데 마냥 신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돌밭과 가시덤불’ 자체가 우리 각자의 잘못은 아니다. 나약하고 온전하지 못한, 원죄적 인간의 사랑이 빚어낸 충만하지 못한 비 구원적 상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자기(self)’가 돌멩이거나 가시덤불이 아닌 한에는 그것들을 ‘치워내는-성찰을 통한 자각하는’ 과정은 우리에겐 기회요, 초대요, 축복이요, 선물인 셈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기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는데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고 무례하게 굴어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무신론자라면 ‘자기를 찾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하여 진리라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찾아가는 자각과 깨달음을 통하여 가장 ‘나다워짐-자아성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밭에 널브러진 돌멩이와 가시덤불은 내 삶을 왜곡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매우 고약하게 만든다. 이모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이모에게 충동적으로 불같은 화를 낸 뒤, 이모에게 하는 말, “이모 미안해! 악마가 튀어나왔나 봐!”라고 울며 잘못했다고 하더란다. 맞다. 널브러진 돌멩이와 가시덤불을 그대로 두면 ‘악마가 튀어나온다.’ 사실 우리에게도 ‘참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한순간을 살아도 진정한 ‘나’로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많은 사람이 돌멩이와 가시덤불을 찾아내는 고통과 제거해야 하는 아픔을 피하고자 적당한 타협을 하는데 이는 욕망일 뿐이다.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로마 8,21) 얻기 위해서는 피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야 55,11)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마태 13,2b)
눈 있는 사람은 보고,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시편 115,5; 135,16; 예레미야 5,21; 에제키엘 12,2; 마르코 8,18 참조) 구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 루카 11,9 참조)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머뭇거리지 않고 성찰하는 사람, 귀찮고 불편하다 하여 내버려 두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어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세상살이에는 큰 복을 누리지 못할지라도 구원의 길은 활짝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self’를 내셨는데 ‘나-열매’로서 돌아가리라. 그러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마음을 가꾸는 농부-성찰하는 사람’이 되리라.
첫댓글 농부가 되어 보겠습니다.ㅎㅎ
농사짓는게 힘들어요.
농사를 안지어봐서요.
구원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농사는 어렵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농사는
'나' 농사 짓기입니다
라자로 신부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