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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로마서 16:1-2】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 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개역개정)
※ 새번역
1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2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 핵심메시지
진정한 리더십은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적인 리더십은 지체들을 단순히 섬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로 세우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말씀 나눔】
서번트(servant leadership)리더십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권위를 앞세우는 리더십을 탈피하여 소통, 섬김, 배려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향상 시키는 일에 헌신함으로 조직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같은 의미로 이 리더십을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리더십의 개념은 1970년대에 등장 했습니다.
리더들은 ‘봉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부하들을 대하고,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노력합니다.
리더는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고 서로간의 친밀한 그리고 목표와 방향을 정해주고 일을 맡겨 줍니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일을 수행함에 지치지 않도록 하고 의견들을 조율하여 모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직원들이 직무에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업무 효율을 높이고 효과적으로 목표 달성을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서번트 리더십이 만능은 아닙니다. 부작용도 있습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직원들이 함께 헌신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번트 리더십이 자리 잡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리더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매우 크고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진행하려다 보니 리더가 유유부단해질 위험도 큽니다.
그런데 이 리더십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성경적인 리더십과 동일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는 서번트 리더십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리더십과 일치한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리더십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조직의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접근하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은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가복음 10:45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섬김은 성경적 리더십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섬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눅19:10).
예수님의 사명은 누가복음 4:18-19에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섬김과 희생을 통해 이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서번트 리더십은 리더가 조직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리더십은 리더가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리더십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지만 성경적인 리더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교회에서도 서번트 리더십, 또는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다릅니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조직 즉,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교회는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가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성경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리더십에 대한 생각과 방법들이 보완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성경적 리더십의 실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1절에 소개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라고 겐그리아 교회의 뵈뵈를 로마 교회들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동남쪽약 11km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곳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비롯한 아프로디테, 이시스, 디오니소스 등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였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겐그리아 교회 일꾼으로 뵈뵈를 소개하고 있는데 일꾼으로 번역된 단어(διάκονος:diakonos)는 집사, 사역자 또는 하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여 집사 또는 사역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겐그리아 교회 일꾼 뵈뵈를 로마에 까지 보내어 로마서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로마까지 간 것을 볼 때 겐그레야 교회 일꾼 뵈뵈는 신실하고 헌신된 사역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여자인 뵈뵈에게 편지를 전하는 전령의 임무를 부여 한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4:34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뵈뵈는 여성 사역자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여자는 잠잠하라 하였으면서 로마서에서는 뵈뵈를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하고 중요한 일을 맡긴 것일까요? 사도바울이 변덕이 심한 것일까요?
뵈뵈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다른 남성 사역자들을 제치고 로마에 바울의 서신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헌신적이고 믿을 수 있는 사역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뵈뵈가 사도바울의 편지를 들고 로마에 간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인가? 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사도바울이 편지를 뵈뵈를 통해서 로마에 전하게 될 때 사정을 좀 살펴보길 원합니다. 사도행전 18:18에 보면,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서원한 것이 있었는데 날이 차서 겐그리아에서 나실인의 규례에 따라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서원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 20:22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라고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결심에 대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에베소 장로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어떤 이는 사도 바울의 목을 안고 울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도 사도바울을 만류하는 손길들은 이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1장 4절에는,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만류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겐그리아에서의 나실인의 서약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같이 사도바울 자신도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살아서 다시 에베소 교인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20:25에,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결연한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직접 가고 싶었지만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도바울은 가는 길이 급하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뵈뵈에게 맡긴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뵈뵈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뵈뵈가 사도바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성 지도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바울이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사역자로 인정하기까지 뵈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뵈뵈가 헌신적이고 신실한 사역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뵈뵈를 ‘나의 보호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 당시에 겐그리아 항구를 지나면서 뵈뵈의 집에서 여러 날 체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뵈뵈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2절 하반 절에 보면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보호자로 번역된 단어(προστάτις prostatis)는 대부분 남성지도자를 의미하며 지배하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여성은 법적인 권리가 없었으며 남성들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남성들에게 사용된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사역자들이 홀대를 받는 것을 우려한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부탁한 요청에서도 그 분위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회로 보내며 그들에게 뵈뵈를 영접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뵈뵈를 로마로 보내면서 그들에게 여성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뵈뵈가 여성이지만 사역자로 자격이 있으니 순회전도자들을 맞이하듯이 적합한 예를 갖추어 맞이하라고 합니다. 주안에 하나 된 성도로서 주님의 사랑으로 예를 갖추어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제공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뵈뵈가 로마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달라는 것입니다.
뵈뵈는 로마 교회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도바울은 남성들에게 사용되던‘보호자’라는 단어를 여성인 뵈뵈에게 사용합니다.
보호자라는 뜻은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가지고 타인의 어려움이나 곤란함을 돕고 보호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뵈뵈는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성도들도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뵈뵈가 이렇게 여러 사람을 섬기고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사회적 위치에 있었고, 또한 그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남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빈민이거나 노예의 신분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뵈뵈가 이들을 섬김으로서 금전적으로 보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뵈뵈는 로마 법에 따라서 그들의 법적인 보호자 역할을 해 준 것입니다.
한계를 극복한 뵈뵈의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가정교회에서의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뵈뵈는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뵈뵈가 보여주는 리더십은
첫 번째,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보호자가 되어 주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사역자였습니다. 또한 그녀의 집을 오픈하여 사람들이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녀가 집을 오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편의 동의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남편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뵈뵈는 자신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성도들을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섬겨서 그들이 성도로서 성공적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역자로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보고 배우게 했습니다.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은 상대방을 온전히 세워줍니다.
가정교회의 리더십도 이와 같습니다. 헌신적인 섬김의 목적은 섬김을 받는 대상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 목녀들도 이러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을 오픈하여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마음을 열고, 목원들에게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목원들은 목자 목녀의 삶을 통해서 장차 나아갈 길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정교회의 제자교육 방식입니다.
뵈뵈가 보여주는 리더십
두 번째는, 뵈뵈는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뵈뵈는 가지고 있는 소유를 이용하여 조건 없이 성도들의 보호자이자 조력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간혹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많아서 도움을 주면서 생색을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주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도움과 섬김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여덟 살 아들과 엄마의 대화를 잠깐 소개합니다.
어느 날 여덟 살 난 어린 아들이 거실에 앉아 공책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을 보고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열심히 계산하면서
"엄마에게 청구할 돈을 계산하고 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지나서 아들은 한 페이지를 가득채운 계산서를 엄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그것을 크게 읽었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청구함.
우유심부름 1000원,
부엌청소 1500원,
설거지 2000원.
구두닦기 1000원,
식탁 차리기 500원.
합계: 6,000원.
아이 엄마는 이 청구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연필을 찾아 들었습니다.
"내 청구서는 뒷장에 써볼 께”
"엄마의 청구서요?” 아들이 놀란 듯이 물었습니다.
“그럼 엄마도 저를 위해서 뭘 하셨나요?”
“글쎄, 조금은….”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열심히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8년간 재킷과 양말 수선 0원,
8년간 식사 제공 0원,
8년간 설거지와 빨래 0원,
아들이 아플 때 100일 간 밤샘 간호 0원.
이 모든 것을 다 합하여 0원!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엄마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엄마 왜 0원이에요?”
“왜냐하면 엄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너를 위해서라면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야”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 자신의 청구서에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전부 다 받았음!”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면서 들인 노고에 대한 비용은 무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각 목장에서 목자 목녀가 목원을 섬기는 것도 무료입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목장에서의 목자․목녀는 영적으로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의 섬김은 대상자를 바르게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대가를 바라면 실망의 연속입니다.
결국은 그 실망감으로 인해서 사역을 그만 두게 됩니다.
많은 목자 목녀들이 실망하는 이유가 목원들에게 섬김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섬김 그 자체에 집중하면 목원들이 쉽게 변화되지 않아도, 목자․목녀가 원하는 만큼 따라주지 않아도 실망할 일이 없습니다.
뵈뵈가 보여주는 리더십
세 번째는, 뵈뵈는 헌신된 사역자의 본을 보였습니다.
당시 여성이 몇 달씩 걸리는 거리를 다녀온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겐그리아에서 로마까지는 육로로 약 2,100KM, 배로는 1,000KM로 3개월가량 소요되는 거리입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 할 때, 여성의 몸으로 이렇게 먼 거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인쇄술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않아서 로마서를 양피지나 파피루스 등에 손으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정도의 기록이라면 상당한 분량이었을 것입니다. 여성이 이 서신을 가지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갔다면 거친 뱃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배에서 3개월가량을 숙식하면서 로마까지 가야 되는 것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동행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행자가 있어도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려움 속에서도 뵈뵈는 로마로 보내는 사도바울의 서신을 훌륭하게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로마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택배나 우편 또는 메일이나 SNS를 이용하여 쉽게 전달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전달해야 했습니다. 군사 우편은 전령에 의해서 신속하게 이동하여 2주 정도 면 전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우편을 전달 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직접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낼 때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해 낼 수 없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던 사도바울과 같이, 로마로 서신을 들고 담대히 나아간 뵈뵈를 본 겐그리아 성도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자비로 로마까지 다녀온 뵈뵈를 본 성도들은 뵈뵈와 같이 헌신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후로 기록된 것은 없지만 초기 교회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뵈뵈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으로서 우리들에게 오늘 보여준 삶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원리와 유사합니다.
섬김 자체가 목적인 섬김은 단순히 봉사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섬김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섬김의 대상이 구원을 받고,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제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뵈뵈는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또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자신의 물질을 들이고 가정을 오픈하여 겐그리아 교회로 세웠습니다.
뵈뵈가 보여준 헌신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뵈뵈가 보여준 리더십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성경적인 리더십임을 알고 뵈뵈와 같이 온전히 성도를 섬기고,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올 한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직하게 잘 감당하는 성도,성경적인 리더십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찬양】
삶의 작은 일에도, 말씀하시면, 온 맘 다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너 어디 가든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주가 오신 이유, 모든 걸음 되시네, 예배자.
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 찬양: https://youtu.be/B8d7uWVAPEk
* 말씀: https://youtu.be/hovdD04o_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