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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敎案)<1>
서교(西敎.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생긴 교·민(敎民) 사이의 분쟁이나 선교사와 지방 관청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된 사안(事案). 영문으로는 ‘Anti-Christian Movement’(반그리스도교 운동)으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교안 대부분이 반그리스도적 성격을 띤 분쟁이요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교안은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는 역사적 용어이지만, 교안이 발생한 시기는
양국이 서로 다르다.
[발생 배경] 교안은 동북아 3국이 전통적으로 쇄국 정책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개항 이후에 발생하였으며, 근대화의 진전과 더불어 소멸되어 갔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항과 동시에 근대화 운동을 지향하면서 세계사의 조류에 합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한 뒤에는 전국 각지에 있던 척화비(斥和碑)를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나, 이것은 종래 양이(洋夷)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척사(斥邪) 대상이 되어 온 서양인들이 한반도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된 역사적 전환이었다.
교안 발생의 첫 번째 배경은 바로 이러한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와 그에 따른 대그리스도교 정책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에는 신앙의 자유에 관한 규정은 없지만, 종래에 취해 온 박해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1886년에 한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이 맺어지면서 서양인이 ‘호조’(護照)라는 조선정부 발행의 여행증을 소지하면 내지(內地)를 여행할 수 있었으며, 또 ‘교회’(敎誨)라는 명목으로 전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양인들은 외교권의 보호 아래 국내 각지로 여행하며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고, 지방의 신자들을 관리하거나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외교적 조약에 의해 국가 정책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박해로부터 묵인, 자유로 전환되었지만 그 과정은 음성적인 외교 술책에 의한 것이었고,
이러한 정책 변화에 따른 국가 시책을 지방 관료나 일반 국민들에게 명확하게 선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1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와 서양인 배격의 척사(斥邪) 의식에 젖어 온 지방 관료나 지방민들의 반그리스도교적 감정은 쉽사리 소멸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안에는 천주교 성직자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내지 전교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충돌이 야기될 수 있는 감정적·사회적 여건이 잠재하고 있었다.
교안 발생의 두 번째 배경은 교회측에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정치적으로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는 이단(異端)으로 배격되어 오다가 신앙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그 동안 억눌리고 짓밟여 온 데 대한 반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과격한 행동을 취하는 예도 없지 않았으며, 그래서 일반 지방민과 마찰을 빚고 충돌하는 사례가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이들 교민들과 달리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한 사람들은 신앙적인 의도가 아닌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천주교에 의탁하여 행패를 일삼거나 문제를 일으킨 자탁교인(藉託敎人)과 사이비 교인(似而非敎人)들이었다. 이들은 관료들의 토색과 행패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입교했으며, 또한 한때 동학(東學)에 가담했다가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호신책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자들이었다.
셋째로, 이 무렵의 천주교 성직자나 프로테스탄트 목사에게도 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었다. 서양인들은 한미조약, 한불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에 약정된 치외 법권(治外法權)의 혜택을 누리며 조선 국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이른바 ‘양대인’(洋大人)들이었다. 그들은 교인들을 감싸는 의식이 강하였으며,
조선의 사회 실정에 어두운 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교인과 지방민 사이의 분쟁에 직접 간여하여 교인을 두둔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자탁 교인이나 사이비 교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회 규범와 법 질서를 위반하는 과잉행동을 취한 예도 있었다.
[유형] 교안은 한불 조약에 의해 전교 활동이 보장되면서 천주교 성직자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국내 각지로 진출하여 공공연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고, 신자임을 숨기고 있던 교인들을 상대로 사목 활동을 펼 수 있게 된 1886년부터 발생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의해 일제의 보호 정치가 시작되고 우리 정부가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종결되었다. 이와 같이 20여 년에 걸쳐 발생한 100여 건의 교안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천주교 성직자나 프로테스탄트 목사 폭행으로 야기된 교안 : 종래 사교(邪敎)의 지도자로 간주되어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천주교 성직잔 새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내지로 진출, 전교 활동과 사목 활동을 하며 각지에 교회를 건립하자 이에 자극된 지방 관료나 지방민들이 그들을 핍박하고 폭행하는 일이 생겨났으며, 심지어는 교회를 파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가 현지 관료와 교회 책임자 사이에서 수습되지 못하고 중앙으로 비화됨으로써 마침내 외교 문제화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예로는 1888년 원산(元山)에서 도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지방민에 의해 추방되고 교인들이 위협당한 일, 1889년 대구(大邱)에서 지방민 70여명이 로베트(Robert, 金保祿) 신부의 숙소를 습격하여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1890년 전주(全州)에서 보두네(Bsudounet,尹沙勿 ) 신부, 안변(安邊)에서 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 대구에서 다시 로베트 신부가 지방민들에 의해 폭행 당하거나 습격 당하고 그들을 따르던 교인들이 폭행을 당했다.
또한 수원(水源) 갈암리에서 빌렘(Vilheim, 洪錫九)신부가 폭행 당하고 교인들이 추방당한 일, 횡성(橫城)에서 르 메르(Le Mrre, 李類斯) 신부가 부녀를 겁간한다는 모함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진주에서 보두네 신부(1982), 예산(禮山)에서 라푸르카트(Lafourcade, 羅亭默) 신부(1894), 회령에서 브레(Bret, 白類斯)신부(1898), 강경(江景)에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신부(1899), 인천(仁川)에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신부(1900) 제천(堤川)에서 부이용(Bouilon, 任加彌)신부(1900) 등이 역시 위협을 당하거나 숙소를 습격당했고, 교인들이 폭행당하는 분쟁이 교안으로 확대되었다.
천주교 성직자와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무기 사용에 의해 일어난 교안 : 당시는 치안 질서가 허술하고 산야에 맹수가 횡행할 때였으므로 내지로 여행하는 서양인들은 무기를 휴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직자들도 호신용으로 육혈포를 소지하였는데, 그 사용으로 인해 살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외교 문제가 된 사건들이 있었다. 이에 속하는 교안으로는 1895년 원산에서 브레 신부가 숙소에 침입한 지방민에게 발포한 사건 처리 과정에서 원산 경무서와 충돌한 사건과, 1897년 칠곡(漆谷)에서 파이아스(Pailhasse, 河敬祚) 신부의 발포로 발생한 살인 사건, 1903년 봉산(鳳山)에서 발생한 지방민 사망으로 인한 사건 등이 있었다.
양인식아(洋人食兒), 양인음혈(洋人飮血) 등 유언비어 유포로 일어난 교안 : 1888년 서울 등지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어린이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는 허황된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발생한 교안이다.
이러한 교안은 중국에서도 벌어진 일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서양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이요, 음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외교 문제화되었다.
교인과 지방민과의 분쟁에 성직자가 간여하여 발생한 교안 : 정부의 정교 자유 허용책이 점차 전국에 알려지면서 그 자유를 누리려는 교인들과, 반대로 오랜 박해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반 지방민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립과 비방이 일어나는 예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교·민(敎民) 상힐 사건(相詰事件)이 관청에 제소되고 관계자들이 체포,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 경우 서양 선교사들이 치외 법권을 이용하여 관청의 처사에 간섭하거나 관련 지방민을 사적으로 연행 구금하여 사사로이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문제가 생겨 교안으로 확대되는 일이 있었다.
교인으로서 부당하게 핍박당하고 있다는 호소를 듣거나 스스로 관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런 사례로는, 1897년 통간(通奸)한 죄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진주 경무서와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와의 분쟁, 교·민 사이의 산송(山訟) 문제에서 야기된 폭행 사건에 데샤예(Deshayes, 曺有道) 신부가 개입한 일. 함남 문천(文川)에서 교인 처벌 문제에 대해 라프르카드 신부가 개입한 일,
충남 진위(振威)에서 교·민 산송 문제에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가 개입함으로써 야기된 교안 등이 있다. 또 1901년 전주 신부관에서 자행된 보루네 신부의 사판(私判)문제, 1902년 장호원에서 푸줏간 과세 분쟁에 신부가 개입한 일,
1903년 천안(天安)의 상송 문제에 사잘레(Chizallet, 池土元) 신부가 개입한 일, 임천(林川)에서의 채무 관계 분쟁으로 체포된 교인을 공베르(Gombert, 孔安國) 신부가 무단 석방한 사건 등으로 발생한 교안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1899년의 강경포교안(江景浦敎案)과 1903년의 해서교안(海西敎案)은 그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소요 시간이 길어 관계 기관과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장경포교안은 염상(鹽商) 조홍도와 교인 김치문 사이에 소금 값 문제로 폭행 사건이 교안으로 발전하게 된 경우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와전되어 천주교를 비방하는 소요로 발전되면서 강경포와 황사포 주민들이 집단 난동을 부리게 되었고, 여기서 베르모렐 신부가 개입하고 나서자 흥분한 민중들이 교회 건물을 습격하고 신부를 폭행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으며, <한성신문>,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에 연일 소요가 보도되었다.
결국 이 교안은 천주교 진위대의 현지 사태 수습과 중앙 정부와 프랑스 공사관 사이의 외교 절충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1903년 신천(信川), 장연(長淵), 안악(安岳) 등 황해도 각지에서 발생하여 재령(載寧), 해주(海州) 등지로 파급된 해서교안은, 관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빌렘 신부를 중심으로 집단 행동을 취한 교인들과 이들이 사판 행위를 했다고 비난하는 지방민들이 도처에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중앙 정부가 해서 안핵사(海西安?使) 이응익 (李應瀷)을 현지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케 하는 한편 프랑스 공사와 외교적 담판을 거듭한 끝에 종결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교·민 상힐 사건과 성직자가 개입하여 생긴 교안은, 첫째로 서양 선교사가 사건을 교인에 대한 박해로 인식하고 교인 보호에 나서면서 외국인의 치외 법권을 이용하여 간섭하거나 과잉 행동을 취함으로써 야기된 교안이 있고,
둘째로 관료들의 자의적인 법해석으로 불이익을 보게 된 교인의 입장을 수호하고 정당한 법 처리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발생한 교안,
셋째로 사이비 교인이나 자탁 교인들이 양대인의 힘을 빌려 자기 야심을 관철시키려는 음모와 공작 등으로 야기된 교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교안(敎案)<2>
교인과 지방민과의 분쟁에 의한 교안 : 여기에 속하는 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서양인과 관련되었거나 서양 종교를 믿는다는 시비에서 시작된 경우가 있고, 재산·전답·금전 등의 경제 문제, 불법 탈취·매도 물건의 점퇴 등 경제 행위에 따른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묘역·밀장(密葬)·굴총·이총(移塚) 등의 산송 분쟁, 무단 입주, 무단 개간, 무단 벌채 등 불법적인 재물 행위, 채무나 보상 문제, 인신 매매나 간통 등이 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회 문제로 교·민 사이에 사단이 일어났을 때 지방 교회와 지방 관아 사이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로 조사 보고된 것은 60여 건에 달한다. 사소한 다툼에 교회와 관아가 휘말리게 된 이런 사건들은 양측 모두에게 골치 아픈 교안사(敎案事)였으며, 그 원인과 책임은 교·민 모두에게 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 조직에 의해 야기된 교안 : 이 경우는 동학, 황국협회(皇國協會), 상무사(商務社), 일진회(一進會) 등 사회 단체나 향약계(鄕約契)와 같은 사회 조직에 의해 집단적으로 야기된 교안을 말한다.
동학은 반서교(反西敎)의 민족 종교이자, 강한 역사 의식을 지닌 착양창의(斥洋倡義)의 종교 단체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했을 때 동학 농민군이 발표한 사대명의(四大名義)를 내걸었던 동학교도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학교도들이 각처에서 교회나 선교사 집을 습격, 파고, 약탈하였고, 성직자와 교인들을 폭행, 추방하는 사건이 일어나 특히 동학 세력이 강성했던 전주나 충남의 덕산(德山), 간양동(干陽洞), 노성(魯城) 등에서 교회 건물과 사제관이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난리를 피해 서울로 올라오던 죠조(Jozeau, 趙得夏) 신북 동학교도의 사주를 받은 청국군에 의해 공주에서 학살되었으며, 이 문제를 두고 조선 외부와 각국 외교 공관 사이에 뒷처리를 위한 외교 절충이 벌어졌다.
그런 동학으로 인한 교안은 비단 동학교도들의 그리스도교 박해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학 농민 운동 후 정부가 동학도들을 색출, 처벌하는 동학 탄압이 시작되자 외국인의 치외 법권 아래 보호를 받고자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이른바 사이비 교인과 자탁교인들이 교세와 선교사 힘을 믿고 행패를 부림으로써 야기된 교안도 있었다.
한편 황국협회와 상무사는 보부상(褓負商)들이 중심성원이었던 사회 조직으로, 보수 집권 세력과 연개되어 있었으며, 정치적 문제에도 집단적으로 간여하여 문제를 일으킨 바 있었다.
그 후 1901년 황해도 옹진(甕津)과 송화(松禾)에서 상무사 소속 보부상들이 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이 빈발했는데, 황해도 일대를 휩쓴 해서교안에서는 상무 사원들의 난동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또 1898년에는 황국협회 회원 김영수(金永洙), 박유진(朴有鎭), 홍종우(홍鐘宇) 등이 기독교 정동 교회(貞洞敎會)와 천주교 종현 성당(鐘峴聖堂)을 파괴하고 교인을 축출할 것이라는 협박장을 공동 명의로 수교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교인 수백 명이 경무청으로 몰려가 항의 데모를 벌여 결국 교안으로 확대된 일도 있었다.
사회 조직에 의해 야기된 교안 : 1904년 말에 조직된 친일 매국 단체 일진회는 전국 각지에 하부 조직을 두었으며, 을사조약 이후 강대해진 일본 세력을 믿고 각종 비리를 자행하였는데, 이 일진회원이 천주교인이나 프로테스탄트인과 충돌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1905년부터 2년 간 전남 해안 도서인 지도(智島), 기재도(箕在島), 진도(珍島), 완도(莞島), 조도(鳥島), 소안도(所安島)나 해안 지방인 영광(靈光)의 이진(梨津) 등 각지에서 일진회원과 교인 사이에 분쟁이 빈발하여 <황국신문>, <대한일보> 등에 연일 보도되었고, 마침내 교안으로 발전하여 외교 문제화되었다.
향약은 유교적 예속과 윤리 생활을 선양하고 향풍(鄕風)을 진작하는 향촌 자치 규약으로서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척사 기풍이 강할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향약 계원과 교회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로는 1899년 안변 동심계(同心契) 계원들이 안변 일대의 공소(公所) 시설 10여 곳을 파괴한 일, 장성향약(長城鄕約) 소속 유림들이 교인들의 행패를 단속하라고 요구하며 소란을 부린 예가 있었다.
또 향약동심계(鄕約同心契), 오야향약동심계(梧野鄕約同心契) 등의 향약 조항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을 향약에서 영원히 추방하며, 무당·백정과 같이 향약에 가입시키지 않는다는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던 탓에 교안을 야기시키는 소지가 되기도 했다.
지방 관료의 이해부족에서 야기된 교안 : 한불조약 이후 중앙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종식시켰으나, 지방 관료가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개인 감정에서, 때로는 사사로이 교인들을 박해함으로써 교회와의 사이에 사단이 발생한 교안이 있었다.
또한 사이비 교인이나 자탁 교인의 행패를 단속하라는 중앙 관서의 공문, 지방 관서의 행정 계시, 지방 암행어사의 지시가 문제되어 외교 문제가 되는 교안 사례도 있었다.
사이비 교인이나 자탁 교인 문제와 관련된 대책이 전통적 박해 정책을 고수하려는 보수 관료의 조치, 이에 대한 교회측 대응이 서로 맞물려 교안이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예로는 1890년 경기 관찰사가 서양인과 야합한 비행 교안에 대해 단속한 일, 1891년 기장 현감의 외국인 비방 고시문(告示文) 계시, 1892년 이천 부사의 서학금단 고시(西學禁斷告示)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899년 진산 군수의 그리스도교인 추방령, 1904년 자탁 교인의 행패를 엄히 다스릴 것을 방으로 써서 붙힌 장성 군수의 전령문도 말썽이 되었다.
이러한 경우 자탁 교인에 대한 다스림이 지나쳐 교회와 교인에 대한 탄압으로 여겨지면서 교회측이 그 지시나 고시에 대한 취소와 시정을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외교 문제가 되었다.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 : 신축교안은 1901년 남제주군에서 벌어진 교·민 사이의 폭행 사태가 확대되어 상무사 조직을 중심으로 한 지방민들과 교인들이 총칼을 동원한 제주성 농성전(籠城戰)으로 이어진 끝에 7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는 참사를 빚은 사건이었다.
이때 조선군의 현지 파견과 프랑스 군함이 출동했다는 점에서 다른 교안과 구별된다. 교회측에서는 이를 ‘신축교난’(辛丑敎難)으로, 제주민인 ‘이재수(李在守)의 난’등으로 표현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신축민란’또는 ‘신축봉기’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만큼 그 성격은 매우 복잡하였으며, 우리 교안 사상 최대 규모의 사단이라 할 수 있다.
[처리 과정] 교안은 이처럼 교·민간의 분쟁, 성직자의 지방관 사이의 마찰 등이 현지에서 조정되지 못하고 조선에 주재한 외국 공관과 조선 외부 사이의 외교적 절충으로 결말을 짓게 된 사단들이다.
그 순서를 도식화하면 일차로 ‘교인 → 지방 선교사 → 주교 → 외국 공사관’으로 상신되거나, ‘지방민 → 지방관 → 내부 → 외부’로 보고되었고, 양국 외교 실무자 사이의 절충 합의로 종결되었으며, 그 처리는 역순으로 지방에 하달되었다.
그러나 그 처리 결과는 대부분 임시 방편의 해결이었지 근원적인 처리는 아니었다. 교안이 발생될 수 있는 원인 근원에 대한 교리와 정부 사이의 타결이 있어야만 교안이 완전히 종식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통감하게 된 교회와 정부의 절충으로, 1899년 천주교 조선교구 주교와 내부 지방 국장 사이에는 전문 9조의 교민 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됨으로써 20여 년 간 발발했던 대소 교안을 종식시킬 수 있는 약조가 마련되었지만, 그 실효를 채 보기도 전에 일본의 조선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외국 공관이 철수하게 됨으로써 교안이 자연히 소멸되었다.
[특성] 조선의 교안은 첫째, 중국의 경우와 달리 국내 문제로 종결되고 국제 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즉 서구 식민주의 세력이 침략적으로 이를 악용하기 전에 해결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둘째, 제주도 신축교안을 제외하고는 인명 피해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성직자 죠조 신부가 희생되었으며, 20년을 두고 사단이 빈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쌍방간 도합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셋째, 교안 발생은 대부분 교인과 민인 간의 개인적 다툼이었는데, 이에 치외 법권을 누리는 서양 선교사가 간여하게 됨으로써 교안화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 박해나 탄압을 위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민 사이의 이해 관계에서 생겨난 예가 대부분이었다.
넷째, 뿌리 깊은 반그리스도교 세력에 의한 조직적인 반그리스도 운동이 미약했고, 대개가 우발적, 일시적인 사안으로 종결되었다. 다만, 제주도 신축교안과 같이 민란의 성격을 띤 교안도 있었다.
다섯째, 종교적인 신앙심에서 순수하게 교안이 된 경우가 아닌 사람들 즉 자타 교인이나 사이버 교인이 교안의 발생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여섯째,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앙 정부의 정책이 박해에서 자유로 전환되었으나 외교 조약상 명문화되지 못한 탓에 지방 관료와 지방민들에게 혼선을 야기시켰고, 또 천주교 성직자와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누리는 치외 법권도 교안 발생의 큰 배경이 되었다.
끝으로 교안이 교회 당국과 정부 당사자의 실무적 차원, 즉 평화적 약조에 의해 종결을 짓게 되었다는 점도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는 근대 서양의 경우, 정·교(政敎)의 분쟁이 로마 교황청과 해당 국가 원수 사이에서 체결된 정교조약(政敎條約, Concordatum)에 의해 정치적, 외교적으로 타결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출처:가톨릭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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