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조각처럼 잘 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저기서 시계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에는 없는 계절을 파는, 소매가 긴 스웨터로 감춘다고 감췄지만 손가락을 보니 거미의 종족이에요 땀이라고는 흘릴 줄 모르는, 카펫가게의 상인처럼 공중에 척척 펼쳐놓는 상술로 하룻밤에도 무성한 계절을 팔아치우지요
늙은 테이프처럼 늘어진 시간 속으로 예고 없는 눈보라가 휘날려요 영하라는 말은 춥디추웠던 옛 연인의 이름, 나는 그리움을 코트 깃처럼 세우고 무릎이 푹푹 빠지는 이름 속으로 들어가요 라라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처럼 눈이 빨개지면서
눈보라 속에서 만났던, 네 개의 다리 중에서 겨울이 망가진 안락의자는 누가 쓰다가 버린 기호일까요 완벽하게 균형을 상실해버린, 어떤 감동도 휴식도 줄 수 없는,
저 그런데 말이에요 벽난로가 어떻게 생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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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작가상은 문장을 지키는 작가를 위해 작가의 영역을 지키자는 취지로 지난해 제정됐다. 상상인과 선경작가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선경산업이 주최한다.
이성혁 문학평론가와 이병률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위원들은 "삶의 다양한 양상을 투시해 깊은 곳까지 드러내며 서정을 형성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당대 사회의 문제를 파헤치고 드러내려는 성실함은 신뢰감을 더해줬다"고 평가했다.
한혜영 / 1954년 충남 서산 출생. 1994년 《현대시학》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 동시집 『개미도 파출소가 필요해』. 현재 미국 플로리다 거주.
재미 한혜영 시인 "문학으로 외로움 버티며 살아요" 등단 35주년,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출간
"미국 플로리다에서 33년을 살다가 시애틀로 이사한 지 3개월이 됐네요. 플로리다에 있을 때도 한인이 거의 없었어요. 해외에 오래 살면서 문학으로 외로움을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올해 등단 35주년을 맞은 재미동포 한혜영(71) 시인은 1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집중해야 할 어떤 것이 필요했는데, 문학이 내게 큰 힘이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작품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특별한 목표를 두지 않고 한 편 한 편 잘 쓰자는 마음으로 문학의 길을 걸어온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그간 틈틈이 써온 시 60편을 묶어 최근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아동출판 상상아)를 출간했다.
동시 이외에도 시와 시조, 장편 동화, 장편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온 시인이 2019년 펴낸 동시집 '개미도 파출소가 필요해'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동시집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3년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됐다.
"나이 많은 집게들은/ 늙은 사자처럼 이빨이 시원치 않다 / 먹잇감을 사냥할 때의/ 젊은 사자처럼/ 꽉!/ 물고 있어야 하는데/ 빨래가 조금만 몸부림쳐도 놓쳐버린다"(시 '치과로 간 빨래집게' 일부)
이 표제작은 오래된 빨래집게와 새 빨래집게의 특징을 대비하면서 빨랫줄에 걸린 빨래와 빨래집게를 떠올리게 한다. 빨래집게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상 속 친근한 소재다.
시인은 "어린이들이 읽는다고 너무 쉽게 자연을 소재로 아름다운 낱말만을 동원해서 쓰는 시여서는 안 된다"며 "어린이들이 읽기 쉬운 시, 이미지가 잘 그려지고 메시지가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또 "동시를 쓰다 보면 어려서부터 잠재적으로 내재한 것이 나도 모르게 끌려 나오곤 한다"며 "동심과 시가 적절하게 잘 어우러져야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노크하면서 예의를 갖추는 상황을 예로 들며 '변기'를 소개하고(시 '퀴즈'), 담과 지붕을 넘어 다니며 옥상에 널어놓은 생선을 먹는 고양이의 관점에서 동화적 상상력을 풀어내기도 한다.(시 '도둑고양이')
충남 서산 출신인 시인은 1989년 잡지 '아동문학연구' 봄호에 동시조로 등단했다. 1994년 '현대시학'과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시와 동시를 함께 써왔다.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와 뱀 잡는 여자' 등 4권, 동시집 4권, 시조집 1권, 장편소설 1권, 장편 동화 11권 등 21권의 책을 펴냈다.
추강해외문학상 신인상(1997), 미주문학상(2006), 동주해외작가상(2020), 해외풀꽃시인상(2021) 등을 수상했다.
뱀 잡는 여자 / 한혜영
혼자 있는 저녁 무렵 뱀이 들어왔다 베란다에 자살테러범처럼 毒을 품고 잠입한 독사 놀란 새들은 새장을 떠메고 허공 높이 화르르 날아오르고 함께 날아올랐으나 이내 추락했던 나는 엉겁결에 움켜잡은 삽자루를 미친 듯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한껏 끌어당겼다 놓아버렸던 팽나무 가지처럼 탱탱하게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뱀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솟구쳤던 삽날 섬뜩하게 내리꽂히는 순간 똬리
탁! 풀어지면서 노을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세상에…… 세상에…… 저 진홍빛……
무장해제하고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보고서야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도대체 여자 나이 몇 살이면 뱀을 때려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뱀 한 마리 잡는 사이네 나는 부쩍 늙어버린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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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 한혜영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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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 한혜영
휘청휘청 돌아가는 연못 낡은 턴테이블 앞에 쭈그려 앉습니다 예스터데이∼ 흐느끼는 물풀 위로 한 떼의 시간이 꼬리를 끌며 지나갑니다 촌스런 전나무도 이런 팝송 하나쯤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거리고 오렌지는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지는데 난데없이 튀어 오르는 판! 금이 간 청춘 위에서 깨어진 노래 알갱이들이 딸꾹 딸꾹 튀다가 구르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복제되는 비틀즈 파장과 파장 사이 떠오르는 수천 개 입술이 복화술을 쓰듯 오물거리기 시작합니다 뒤죽박죽 엉키는 세월, 시린 물 속으로 곤두박인 나무그림자에 매달린 여자 하나가 어제의 한 고비를 넘지 못해 마구 휘둘립니다 펄럭이던 지느러미 위험하던 시절의 판… 판을 꺼야하는데…… 후미진 구석에 앉아 가슴으로 적갈색 커피를 폭폭 끓여대며 짝사랑했던 더벅머리 그 날의 디제이는 긴 긴 외출 중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첫댓글 빈집_기형도(1960~198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