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자하신 우리의 구원의 주
(시편 103:1~14)
2024년 8월 25일 성락교회 썸워십2(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편 103:1~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참 인자하신 분입니다. ‘인자하다’는 말은 자비하다는 말과 비슷하고, 또 긍휼하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자비하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도 비슷합니다. 어찌 보면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 사랑하여서 관대하고 친절하고 자비하는 것, 그것이 인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그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거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이 순간이 있고, 우리의 믿음이 있고, 우리 소망이 있고, 우리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자하신 주님의 모습을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가 불쌍히 여기셔서 어떤 행동을 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시고, 저들을 축복하시고,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거라사인의 지방의 무덤 사이에 사는 귀신 들렸던 자가 주님으로 인하여 치료를 받고 그가 주님을 따라가려고 했을 때 주님은 ‘하나님이 널 얼마나 긍휼히 여기신 것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점도 주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또 4천 명을 먹이실 때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하셨고, 5천명이 먹이실 때도 ‘내가 또 그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굶어서 먹질 못 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이 하늘의 어떤 소식을 듣기 위하여 저렇게 다가왔구나.’ 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 ‘이렇게 나를 따르는 것은 목자 없는 양들 같으니, 저들이 불쌍하도다.’ 하셨습니다.
또 나인성 과부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시고, 또 그가 친히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세리는 어떤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미 세리로 내 속의 모습을 이미 겉의 모습과 동일하게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난 가망도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 됨을 고하고, 하나님께서 자비 베풀어주시기를, 하나님의 인내를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속에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 함께 있던 바리새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데 “난 이렇게 훌륭합니다.” 하고 자기 신앙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자랑했습니다. 주님은 ‘이 바리새인이 아니라 오히려 저 세리, 온 세상에 낙인이 찍힌, 외형적으로 보나 속으로 보나 어디를 봐도 가망이 없는 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세상이 보는 눈과는, 우리가 흔히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보통 추측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그 인자심을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셔서 죄인을, 연약한 자를, 불행한 자를, 괴로운 자를, 고통받는 자를, 아픔이 있는 자를, 힘없는 자를, 의지할 자가 없는 자를 위해 계십니다.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정말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부차적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불쌍한 자를 위해서, 아픈 자를 위해서 다가오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은 여기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을 상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에 분투하여서 뭔가 큰 일을 이루는 자를 기뻐하실 것이다.’ 부분적으로 맞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엄격해서 ‘1등만 나오라 그래! 1등만 데려 갈게! 어디 보자. 시험 쳐!’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제시하신 어떤 수준에 닿으려고 열심을 내고, 그래서 어떤 수준이 되면, 영성 있으면 “어, 그래 합격!” 하고, 영성이 없는 자들은 “아, 왜 이렇게 신앙이 없어? 기도가 부족해. 뭐가 부족해.” 하고 떨어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은 과거 우리교회에서 많이 보였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그런 모습을 볼 때 제가 아는 신앙과 너무 달라서 괴로웠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 하나님은 마음 아프고, 힘 없고,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벗어나기 어려워서 힘들어하는 이런 사람들 마저도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죄 졌으니 너 구원 안 해!’ 하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죄 지은은 사람 교회 오지 마시오. 나가!” 하는 식으로 목사가 막 비판을 합니다. 목사가 호통치는 거, 마땅치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와 있다면, 영혼들이 와 있다면, 많은 죄인들이 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이 “주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주님, 감사합니다. 날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경쟁하고 피곤해서 항상 좌절되게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오면 의로운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 모습을 보면 기도할 때도 왠지 맹숭맹숭한 것 같습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생각도 나고, 어디 가려우면 손이 거기 가서 긁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들에 비하면 내 수준은 거의 바닥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야, 나는 더 내려갈 데가 없구나.’ 하면서 좌절감이 듭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교회 왜 다니나?’ 싶습니다. 전부가 신앙에 열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완전히 꼴찌구나.’ 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찬양도 같이 부릅니다. 같이 찬양을 부르지만, 같이 마음을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좋지만, 그 찬양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여전히 높은 경지에 있고 나는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뭔가? 여기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가 보다.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으로는 뒷문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예배당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잉태되어서 교회에서 태어났고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영광과 능력을 통해서 자격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런 것에는 자신 없습니다. 난 하나님이 나의 부족한 거, 나의 못난 것도 받아 주시고, 내 죄를 어떻게 하면 없애려고 애를 쓰시고, 보이지 않게 하시고, 내 약점이 보이지 않도록 주님으로 커버해 주시고, 어떻게든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게 하시고, 세상에 험난한 것이 있어도, 많은 역경을 겪어도 일어나게 해주고, 사람으로부터 미움 많이 받고, 오해를 많이 받고, 또 이간을 많이 당해도, 그래도 희망이 있도록, 그래도 앞을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도록 격려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의의 세상입니다. 불의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삶은 우리와는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에 세상 삶의 환경이 모든 것에 표준으로 보면 안 될 것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정말 죄를 이제는 극복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의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기쁨을 얻고, 원래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의 일을 할 때 이 사람이 용기가 생겨서 ‘나, 하나님 일했다! 나, 하나님 닮은 일을 했다! 나, 교회에 유익한 일을 했다! 나, 주님께 유익한 일을 했다! 우와, 나는 악으로 가득한 자인데, 이제 나는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선하게, 착하게, 친절하게,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또 나를 참고.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도, 저렇게 하고 싶어도 성도를 위해 하고, 교회를 위해 하고. ‘우와! 나도 이렇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본질은 더럽고, 본질은 지옥 자식이었으나, 나는 하나님이 새 피조물로 만드시고 날 새롭게 하셔서 비록 옛날 습관이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 이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의로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닮은 이런 성품, 의로운 성품, 거룩한 성품,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을 위해 하고 싶습니다. 날 용서하시고, 날 위로하시고, 내게 소망 주시고, 나를 보듬어 주시고, 나를 쓰러지지 않게 일으켜 세우시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을 닮은 이것을 하겠습니다! 오늘 넘어지고 내일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하겠습니다. 내 평생 많은 죄악이 있어서 지옥에 갈지, 천국에 들어갈지 확실치 않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하더라도, 나 하나님을 위해서 이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베푸시는 당신의 인자하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강조하거니와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를 찾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자,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남이 보지 않을 때에도, 또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은 하나님을 돕고 그를 기쁘게 하려는 이 마음이 살아있는 자. 외면치 않으십니다.
교회에서는 엄청나게 사람들 앞에서 영광 받고, 존경받고, 신앙에 연륜이 있는 그런 자인데 그가 속으로는 ‘누가 보나? 하나님이 보나?’ 하고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아프게 하는 그런 것 말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18~22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그를 바라는 자는 외면치 않습니다. ‘아, 저분을 보니까 신앙이 연륜이 많고, 직분도 많이 감당하고 되게 수준이 높구나. 근데 나는 낮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되겠지…. 노력해야겠다…’ 교회에서는 이런 거 없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주제이고, 오늘 우리 주님은 똑같이 주를 찾는 자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자를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받으십니다. ‘경외한다’는 말에는 ‘두려워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란 “나 하나님, 좋아해요! 하나님, 좋아해요! 다음에 봐요,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쉽게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진노의 하나님.
그런가 하면 교회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모습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입니다. 말로는 신앙적인 것을 말합니다. ‘영감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합니다. 그가 “나는 말이야~전도할 때~” 하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기가 팍팍 죽습니다.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은 어떨까요? 삶의 패턴, 어떤 루틴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 가고, 주중에 새벽기도 하고, 수요 예배 가고, 모임에도 좀 가면 다 된 거고, 사회생활도 좀 하고, 이렇게 하나의 패턴입니다. 이런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종교성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종교성에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내 하나님을 섬기고, 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를 향한 진실한 마음, 그의 나라와 그의 교회를 위해 애쓰는 내 진실한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종교성만 가지고는 아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였을 때는 ‘하나님! 우리 완전히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진 모습으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장로고, 권사고, 목사고, 전도사고, 지난주에 처음 온 새 신자라도, 다 똑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인자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심 때문에 오늘 제가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날 살려주신 것 때문에 제가 이렇게 건장하게 살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각입니다. 건장하게 살아 있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자를 위한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이사야 66:2~3
또 다른 말씀은 시편 50편 말씀인데, 오늘 구약의 말씀을 여러 개 함께 보고 있습니다. 왜냐면 시편에는 보다 본질적인 우리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또 아버지, 성령, 우리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본질적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상황적인 역사를 통해서 단시간에 주어진 사도들의 사역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시 50:16)라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법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시편 50:17~21
‘네가 인간들에게 하듯이 내게 그렇게 하면 속을 줄 알았지? 그렇게 하면 네 옆에 사람들 속았으니까. 사람들은 네가 큰 소리로 기도하고 많은 일을 하는 걸 보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보는데 너 실제로는 그렇지 않잖아. 아니잖아.’ 하시면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1~23
할렐루야!
신앙생활은 회개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모습, 그러니까 ‘턴(turn)’ 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린 자기의 삶을. 과거에는 신앙생활에서 자랑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 투쟁하고, 남과 경쟁해서 올라가고 하는 인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자기를 우월하게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습니다. 우월하게 보이는 그런 데서 성도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신앙이란 저런 거구나.’ 하면서 신앙의 개념을 계속 구축해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 신앙이 이런 거구나.’ 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조심하지 않으면, 영혼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는 선하신데 또 인자하십니다. 선하시니까 인자하신 것입니다. 그의 선하심도 너무 소중하고 우리가 닮아야 될 것이지만, 결국 그가 인자하셔서 나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자비이시고 긍휼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따르고, 그 은혜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본질이 뭘까요?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이 은혜를, 복음을 통하여 내게 주어진 이 선물을 또 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의무가 있습니다. 이거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일을 해야 됩니다. 지금은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평생에 할 일이 뭘까요?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평생의 삶을 이어가는 그 에너지가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와 감사와 사랑입니다. 나를 생각하시는 그 인자하심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1]’라고 했습니다. 그가 인자하시면 나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끝까지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 감사하라.[2]’ 하는 문장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찬양합니까? 옛날에는 찬양을 하나님 앞에 작품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부분적으론 맞지만, 전체적으로 찬양의 목적을 설명하는 제대로 된 정의는 아니라고 봅니다. 찬양은 구원받고 사랑받는 자들이 기뻐서, 은혜 받은 자들이 기뻐서, 우리가 즐거워서 뛰고 가슴 벅차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무슨 예술을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쁘게 찬양을 연습해서 “하나님, 찬양 받으세요~” 하면 하나님께서 ‘어이구 신나! 고마워!’ 하시는 걸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소고 치고 장구치고 나팔 불고 밤새 춤을 추고 놀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축제가 뭡니까? 이스라엘 절기들이? 춤추고 노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영광!” 하는 것 말고도 “하나님, 우리 신납니다! 우리 기쁩니다! 우리 좋습니다! 우리 서로 함께해서 너무 행복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찬양은 우리의 행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같은 경우에는 찬양을 하면 세게는 하는데, 그 찬양하시는 분들의 상당수가 차갑고, 이기적이고, 경쟁하고, 무관심하고, 이간하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고요. 나는 그들 사이에 끼지도 못하는데 거기서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예수 믿으러 온 것이니까 예수에 대한 찬양을 부른다’는 식으로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동호회에 가서 동호회 성격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군대 가서 군가 부르는 식으로 찬양합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노래하는 것을 원치 않고, 인생 최고의 노래를 여기 교회에서 다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자하셔서 내가 그를 의지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찬양이 바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고,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우리 교회에 처음 왔다 하면 무엇을 보여주고 싶습니까? 우리의 근엄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된다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저 사람들은 완전히 올인했다. 그리고 참 행복해 보인다. 아니, 세상이 이렇게 험난하고 이렇게 구질구질한데, 만만치 않은데, 부자도 아니고, 건강한 것도 아니고, 나라의 정치 상태도 안 좋은데, 이렇게 거친 세상에서 뭐가 저렇게 행복하지?’ 사람달은 이해 못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나빠도, 정말 아무 가진 것이 없고, 내 과수원에 아무것도 없어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도 ‘아무것도 없어도 내 영혼은 기뻐하라. 내 영혼은 기쁘다.’ 하는 말씀을 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우리 교회는 누가 오든지 기쁘기를 바랍니다. 찬양을 신앙생활의 부수적인 것으로 보지 말고, 진짜 중요한 콘텐츠로 봐야 합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그분을 향한 감사와 영광과 기쁨이 노래로 나오는 것입니다. 심취해 있는 것입니다. 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취해서 우리 인생 마지막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집에도 가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직장에도 가야 되고, 또 여러 가지 일들 해야 되고 하니까. 이처럼 찬양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충분히 서로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우리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감사! 우리 서로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우리 서로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고, 우리 함께 있는 것이 굉장히 미래 지향적이고, 우리 안에 충만한 기쁨이 하나님 앞에 전달될 수 있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의 찬양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스타일이 좀 바뀌었어.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약간 이렇게 바뀌었어.’가 아닙니다. ‘약간’이 아니라 완전히 새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는 앞에 있는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다음 세대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세대가 있는데, 그들도 자기들이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앞길을 열 수 있도록 미리 여기서 큰 길을 닦아주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아이, 몇 십년, 몇 백 년이 가더라도 바로 내 시대를 똑같이 따라 해야 돼. 다 지금 찬양하고, 똑같은 성경 보고 똑같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는 그때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100프로 하나님의 인자로 그들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권에서, 그때 세상이 얼마든지 자기를 끌고 가고 유혹하고 하더라도 이 찬양의 음성과 찬양의 곡조로 빨려 들어가서 이 세상의 음악에 빠지지 않고 여기 음악에 들어와야 합니다.
곡 잘 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옛날 고서에도 보면 마귀가 온갖 좋은 곡조를 다 가졌다 그러는데, 세상 음악은 돈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작곡을 하니까 재능있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갑니다. 기독교회에는 음악적으로 세상보다는 조금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이 좋아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찬양을 많이 하고, 많이 보급하고 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주어진 심각한 우리의 노력입니다. 진정한 노력입니다.
나는 그 아픈 기억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아무 마음은 없고 사납고, 냉랭하고, 으시대는데 거기서 다 찬양하는 것. ‘그게 좋은 것이다. 종교성이 최고다.’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제는 매일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찬양을 드립시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들도 준비하여서 그들의 삶이 찬양으로 충만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에 자기들의 미래를 탁 정해 놓고, 거기에 자기를 안주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꿈을 그려갈 수 있도록 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지난 시대의 성도들과 오늘날의 성도들의 조화가 어렵지만 그냥 이해하고 해야 합니다. 저는 어떻겠습니까, 찬양하는데? 저도 나이 드니까 곡조가 잘 외워지지 않습니다. 가사를 똑바로 하려면 곡조가 틀리고, 곡조를 똑바로 하려면 가사를 틀리고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아유, 나는 이거 곡조 어려워서 못하겠다.”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나보다 더 바쁜 사람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합니다. 그런데 저도 이 찬양 외우느라고 시간을 엄청 들입니다. 여러분 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는데, 거기에 더해서 진짜 노래를 공부하는 노력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천재처럼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저도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들도 ‘아, 어려워~’ 하지 말고 저만큼은 흉내를 좀 내셔서 그렇게 해보면 ‘아, 이게 소중하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나도 우리 성도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쁜 시간이지만 곡조를 많이 공부하다 보니 그만큼 저의 다른 부분을 잘라내야 합니다. 잠을 줄인다든지.
우리 주님 안에서 행복합시다. 찬양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을 수 있도록 하기 바랍니다. 우리 찬양할 때 우리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온 하늘의 능력과 권능이 충만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할 때,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에 모시는 우리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인자하신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인지하신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내 하나님, 인지하시는 하나님, 나를 살리려고 애쓰시고, 날 살리려고 목숨을 던지시고, 날 살리려고 오늘도 성령으로 부르시고 역사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난 정말 찾아갑니다. 신실한 자,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 회개하는 자를 받으시는 우리 하나님, 따라 가렵니다! 오늘도 나를 받으시고, 이 부족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부족한 만큼 주여! 당신의 큰 인자하신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아 주시옵소서!’ 다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출처]20240825 인자하신 우리의 구원의 주(시편 103:1~14) 성락교회 썸워쉽2(주일연합) 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