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단일의식이 인간의 뇌를 자기수단으로 이용해 자기 자각하는 프로세스
9) 깨달음/우주 합일체험 이후의 삶은 유지될 수 있을까?
- 자아의 ‘일시적 탈락 현상’이 진정한 깨달음이라 한다면, 그 상태가 유지 되어야만 효용성이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만일 그 상태가 몇 분 몇 주일 혹은 몇 달 지속되다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이 새로웠던 상태에 대한 증표는 될지언정, 일관 된 걸림 없는 무애(無碍)한 상태를 늘 보여줄까?
- 깨달을 자아가 사라진 상태가 깨달음이라면, 걸림 없이 무애한 자아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어 보인다.
- 잠시 체험했다는 사람들도 그 체험이 사라지는 경우, 결국 또 다시 체험에 도전해야하는 건가?
그렇다면 깨달음에 단계가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제2전승에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같은 이렇듯 깨달은 이의 단계를 나누는 것 같다.
때로는 경계도 분명치 않은데 대각(大覺)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어,
자신의 깨달음이 미진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지에 소각(小覺)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상태를 얼버무리려는 건지, 미진한 깨달음 후에 더 큰 깨달음이 몇 번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 합일의 체험기억이 훗날 그 사람에게 어떤 임시적 자아탈락에 대한 증거는 줄지언정,
펼쳐지는 세상의 변화에 걸림 없이 살아갈 힘이 지속적으로 발휘될까?
지속적 발휘의 원동력으로 지속만 될 수 있다면 너무나 좋겠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일시적 자만심을 키우는 결과가 되기도 하니 문제가 되는 것 같다.
- 혹시라도 그 자만심을 이용해 신통을 부리려 한다든가
깨달았다고 하는 그것을 내세워 비즈니스화 한다든가 하면 곤란한 일이 되어 버린다.
- 체험은 없지만 선현들의 반야에 대한 진실을 깊이 이해하고 믿는 그러나 합일 체험이 없는
개인적 동기가 희박해진 소박해진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는 걸까?
- 단일의식이 뇌 속에서 자기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매뉴얼의 매커니즘을 확실히 모르다보니,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도 부풀리고 오해 착각하고 있음을 그림을 통해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10) 선현들 가르침의 재조명
- 유식 30송 첫머리에서 본 [由假說我法(유가설아법)]이라며, 선현들이 일러주신
‘나’라고 하는 주객이 가설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거 였구나 하는 점이
간단한 그림을 통해 한눈에 알 수 있다.
- 가상 설정 이유는 자아 아닌 單一意識이 생명축제의 장엄한 연극을 위해서 였으며,
단일의식의 自己自覺만 있고 행위자는 없으며,
좌/우뇌, 뇌량 현상이 마치 가상이 아닌 실재처럼 인간의 감각에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것 뿐이었음.
-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좌/우뇌에서 일어난 현상(과정)을 두고 그것을 실재화 하는 일은
음식 요리과정을 가지고 요리라고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됨.
- 8정도에 있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에 의한 바른 앎이 오히려 중요한데,
아무런 전제 없이 앎과 이해는 ‘알음알이’라 하며 무조건 깎아 내리려고만 하는 이들이
한번쯤 보고 가설(假設)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그들이 말하는 알음알이 프로세스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런 그림인 셈이다.
- 알음알이가 원래 가상의 ‘아(我)‘로 시작된 것이며, 결과임을 이런 그림을 통해 확실히
알고 있다면, 궂이 알음알이를 없애라고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가 없는데(A=A이므로),
그것을 가상이 아닌 실제로 여기는 듯(입으로는 늘 꿈과 같다고 함), 그것을 없애고
마음 내려놓으라는 식으로 강조한다면 이는 다시 알음알이를 실체 시 하며
그것과 싸우게 만드는 모양이 되니, 그렇게 말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더 힘든 우회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됨.
- '자유채널'의 강독에서 접근하는 방법은 가상임을 알기만하면 되므로 부담이 적고,
알고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닌 합일이니 깨달음에 부화뇌동(附和雷同) 될 필요도 전혀 없음을 알게 됨
- 좌/우뇌 그림 한 장의 바른 앎을 통해 선현들의 가리킴이 더 선명해져서 좋다. 얼씨구!~
첫댓글 얼씨구~~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