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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무사 복원상. 대성동고분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상으로서, 가야무사의 모습을 출토된 유물들을 토대로 복원했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상설도록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늠름한 모습을 한 가야 기마무사의 위용이다. 검은색 투구와 찰갑으로 된 갑옷을 입고 말갑옷을 입은 말 위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러한 병사를 흔히 개마기병(鎧馬騎兵)이라고 부르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전쟁을 주름잡았던 이들은 고구려는 물론 가야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가야의 개마기병이 들고 있는 무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날을 가진 칼에 긴 자루가 달린 모습인데, 바로 앞서 말했던 월도를 들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이렇게 월도를 들고 있는 기마무사상을 복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대성동고분군 23호분에서 월도의 모습을 한 곡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 복천동 38호분에서도 곡도가 발견되었기에, 가야시대에 쓰인 무기로 추정하고 있다.
▲ 대성동고분군 출토 곡도자. 왼쪽부터 대성동 2호분, 13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이들은 실전무기로 사용되기보다 의기로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이와 비슷하게 대성동 2호분과 13호분에서는 곡도자(曲刀子)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각각 크기가 17.7㎝와 16.2㎝이며 날이 크게 휘어져있기에 실전에 사용된 무기라기보다 의식에 사용된 유물로서 생각되기도 한다. 그에 반해 대성동 23호분에서 출토된 곡도는 41.4㎝로서 제법 큰 편으로서 실전에 적합한 무기임을 알 수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당시 생활모습을 고증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가야무사상이 대표적이며, 병사들의 복원모형에서도 월도를 사용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월도가 생각만큼 널리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그 개체가 출토된 곳이 2곳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월도가 가야시대의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가야월도,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 월도, 모, 창
왼쪽부터 대성동 23호분 출토 월도, 대성동 1호분 출토 모와 창. 당시 무기들을 복원해 놓았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그럼 이 가야월도는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그 모습을 보면 당시 전쟁에서 널리 쓰이고, 특히 기병들이 활용하면서 적들의 목을 베는데 쓰인 무서운 무기라는 짐작이 간다. 중국이나 조선시대에서도 이런 월도는 뛰어난 무장들이 사용하는 두려운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월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과연 가야시대에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왜 극히 소수의 유물만 발견되고, 그 존재가 적극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걸까?
이러한 의문에 앞서 당시의 무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무기들 중 창 류, 즉 장병기(長兵器)를 살펴보면 주로 투겁창[矛]이 쓰였으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창(槍)도 쓰였다.
투겁창, 즉 모와 창은 겉모습은 흡사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모는 창날 아래에 자루를 끼워 넣을 수 있는 공간, 즉 투겁을 만들어 놓은 게 특징이다. 이에 반해 창은 창날의 아래에 철심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슴베라고 부른다. 즉 슴베를 자루에 끼워 넣는 형식이다. 둘은 당대에 널리 사용된 무기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모가 선호되었다.
그럼 월도는 어떤 구조일까? 크게 봤을 때 월도 또한 슴베로 자루와 부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날의 아래 끝부분에 뒤로 돌출시켜 놓은 게 특징인데, 자루와는 직각으로 연결된다. 복원된 모습을 보면 월도에 있는 작은 구멍에 끈을 연결해서 자루에 더욱더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는 사실 다른 무기들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이다.
앞서 말한 모와 창은 주로 상대방을 찌르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당시엔 이런 모와 창을 이용한 보병의 단체 접전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활과 함께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 월도는 그 공격이 찌르고 베는 게 가능하여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확실히 당시의 칼들에 비해서는 길이가 길기 때문에 훨씬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의문이 가는 문제가 있다. 바로 전쟁터에서 적들을 벨 때, 연결된 부분이 과연 얼마나 잘 버텨주느냐의 문제이다. 찌르기와는 달리 베기는 전면적으로 내리치면서 공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을 주며 상처도 깊게 크게 난다. 하지만 그만큼 무기 자체도 충격이 오기 때문에 결합 부분이 튼튼해야 한다.
하지만 가야 월도의 경우 투겁을 사용한 게 아닌 슴베를 측면에서 부착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구력은 떨어질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끈으로 자루와 연결하였지만 이 효과도 그렇게 크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가야 월도가 널리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을 것이다. 효율적인 무기로 생산되었으나 사용할 때는 그 내구성이 생각보다 떨어져 전투 도중에 많이 못쓰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로 실전적인 무기로서 쓰이기보다 피장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의장용 무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야월도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
그럼 가야월도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월도라는 무기를 살펴봄에 있어서, 그 기원이 칼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본래 월도 같은 대도류의 무기들은 손잡이가 짧고 날이 긴 칼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루를 길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인하여 날의 무게를 늘여서 베는 것과 동시에 무거운 무게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가야월도의 경우엔 이런 절차가 없이 바로 만들어졌다는 게 주목된다. 가야월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류가 되는 무기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아마 철겸(鐵鎌), 즉 낫이 기원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2가지로 하나는 월도의 날이 반대쪽에 있을 경우 이는 낫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슴베쪽에 살짝 말려진 부분의 모습이 철겸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슴베 끝부분을 말려 자루에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부산 복천동 145호분과 123호분에서 출토된 철겸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뜬금없이 철겸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고대시대 이후로부터 낫은 훌륭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고대의 낫은 주로 상대방을 찍어 내리는 식으로 공격하였으며, 주로 기병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장병겸(長柄鎌)이라고 하여 주로 판옥선 위에서 적과 싸울 때 쓰던 무기가 있었다.
가야월도는 이러한 철검 기술을 바탕으로 반대쪽에 날을 세워보면서 만들어진 무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막상 사용해 보니 그 효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실전무기보다는 의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발이 이뤄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