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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드리 바람은 미친 바람"
김홍성, 1990년 1월 사람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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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 날려 보낸다는 세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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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10년 전 그 생선장수 아낙네가 됐다.
양양 장 이튿날 신새벽, 양미리와 도루묵을 한 보따리씩 이고 지고 육십리길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두메산골을 찾아간다.
양양에서 논하리, 논하리에서 송천, 송천에서 공수전, 공수전에서 큰양아치, 큰양아치에서 영덕과 서림을 거쳐 허위 허위 조침령을 넘는다.
좋게 말하느라고 조침령이지, 소금 장수 남정네들은 좆칠령이라고 부르는 고개, 왜 그리 힘겨운가.
조침령 영마루 위에서 쉬 소피 한번 시원히 보고 쇠나드리로 내려선다.
점봉산 남쪽 고원 쇠나드리 바람은 미친 바람. 소가 바람에 날아갔대서 쇠나드리라는데 사람인들 못 날릴소냐, 양미리 도루묵 생선 보따린들 못 뺏을 소냐. 사납게도 분다.
봄에는 흙바람, 여름에는 비바람, 가을에는 낙엽바람, 겨울에는 눈보라에 칼바람이 몰아치는 쇠나드리를 지날땐 이승과 저승이 오락가락 한다.
이 바람이 언제가는 경운기를 뒤집기도 했다지,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 아이고 아이고 용을 쓰며 견디기도 한다.
쇠나드리에서 진흙동까지 십리길, 진흙동에서 다시 맞바위 부락까지 오릿길, 눈 쌓인 겨울에는 초생달 뜬것 보고야 맞바위 부락 김진철씨(74세)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김진철씨 집은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10여년 동안 양양 생선장수 아낙네가 생선 팔러 와서 묵던 집. 그 집에 내가 왔다.
생선장수 아낙네도 아니고 버석 버석 소금장수도 아니고 그저 할일 없는 나그네로 신세지러 왔다.
김진철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때만 해도 이곳엔 많은 사람이 살았다. 이 골짝 저 골짝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개 짖고 닭 울고, 소도 움머 움머 우는 동네들이 골짝기 마다 있었다.
지금은 10호밖에 남지 않은 맞바위 부락만해도 10년전까지는 20호가 넘게 살았다. 지금은 3호가 남은 바로 윗동네인 진흙동에도 10여호, 지금은 아예 사람 그림자도 없는 선목 벌막골 영가리 등에도 20~30호씩 사람이 살았었다.
양양 생선장수 아낙네는 이들 두메산골 사람들에게 비린 것을 가져다 주고 대신 콩이나 팥을 받아다가 양양 장에 가서 팔았다.
양양 생선장수의 도루묵이나 양미리는 생선이 아나라 약이었다. 젖 안 나오는 산모는 그것 먹고 젖이 나왔으며 얼굴에 버짐 핀 아이는 그것 먹고 화색이 돌았다.
맞바위 부락은 비린것 구경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만큼 깊고 깊은 두메 산골이었던 것이다.
그 생선장수가 발길을 끊은 것은 벌써 10년전 일이다. 폭설로 조침령 넘는 길이 막혀 보름 동안을 맞바위 부락 신세를 지고 돌아 간 그 얼마 후부터 그녀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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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서 만나 부부가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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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조침령 윗쪽 태백산맥은 넘나드는 또 하나의 고개인 반부등령으로 군사 도로가 뚫리고 거기로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차가 다니면서 다리 품 팔아 생계를 잇던 소금장수, 방물장수, 생선장수 등 행상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했던 것이리라.
1톤, 4톤씩 짐을 싣고 다니는 차에 비하면 산비탈 등짐은 고작 해야 좁쌀 서말......
그 무렵 쇠나드리엔 늙은 신혼부부가 흘러와 살았다.
미친 바람이 몰아쳐서 다들 버리고 간 척박한 땅에 그 부부는 옥수수 밭을 일궜다. 경운기로 일궜다.
그때만 해도 반부등령 길이 뚫리지 않아 내외는 경운기를 조각 조각 분해하여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잔설이 채 녹지 않은 조침령을 넘어와서 조립해 썼다.
이 고장 저 고장 떠돌며 날품을 팔다가 영동고속도로 공사장에서 만나 부부가 된 이들 내외의 전 재산이 이 경운기였다.
그들은 바람이 덜 심한 땅을 골라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옥수수는 잘 자라 주었다. 쇠나드리 그 미친 바람에 넘어지지도 않고 잘 자라 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병이 들었다. 고된 노동 탓일까. 남편은 아내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피를 토했다. 옥수수 알이 영글기 시작하던 여름에 아내는 이미 병이 중한 남편을 데리고 하산했다.
그러나 남편은 시댁에 도착한지 사흘 뒤에 죽고 말았다. 그 여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시댁 홀어머니 살림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당분간이었다. 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 여자는 남편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보금자리 였던 쇠나드리를 찾아갔다.
경운기는 그대로 있을까? 옥수수는 얼마나 잘 영글었을까? 가슴 졸이며 찾아갔다.
나는 그때 그 여자의 길동무였다. 설악산에 가다가 갑자기 마음이 변해 오색 국민학교가 있는 마산리에서 곧장 단목령을 넘던 중 그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 여자는 걸음이 빨랐다.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른지 도무지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여자분이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릅니까?"
"어려서 고아가 된 탓에 온 산천을 다 헤멨어요. 누가 그러는데 제가 만신이 씌었데요. 만신이 되려고 그렇게 헤멨는지도 몰라요."
"만신이라뇨?"
"무당이요, 무당."
그 여자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설피밭 마을을 지나서 쇠나드리가 가까워지자 여자는 숫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산새들이 새카맣게 날아올랐다.
그랬다. 그 여자는 남편과 함께 일궜던 그 옥수수 밭을 달렸고, 그 산새들은 그 버려진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를 포식하다가 놀라 날아오른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 옥수수밭 건너편 산 밑의 양철 지붕집 헛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곧 통곡 소리가 그 헛간에서 울려 나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여자는 헛간 문 앞에 주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바람에 양철지붕 삐꺽이는 소리로 인해 더욱 스산한 헛간안에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전 재산이던 경운기가 고스란히 있었다.
그러나 해저에서 인양한 무슨 유물 처럼 녹이 새빨갛게 슬어 있었다. 그 여자는 그 경운기를 보고 그렇듯 오래동안 꺼이 꺼이 목놓아 울었던 것이다.
그 사이 옥수수밭에 다시 날아와 앉았던 산새들은 우리의 기척에 놀라 다시금 새카맣게 날아올랐다. 그 여자는 그 새들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먹어라, 어서 먹어라. 너희들이라도 배터지게 먹어라"
목쉰 음성을 들으며 나는 주먹으로 눈등을 쓰라리게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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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겨운 음식, 그 훈훈한 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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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추억으로 인해 미친 바람 몰아치는 쇠나드리 고원은 생선장수나 옥수수밭 여인에게 그랬듯이 내게도 저승같다.
그러나 거기서 시오릿길 떨어진 맞바위 부락은 고향같다. 맞바위 부락 사람들은 생선장수나 옥수수 밭 여인에게 그랬듯이 할일 없는 나그네인 내게도 먹을 것과 잠자리를 준다. 그리고 술도 준다.
나는 먹을 복이 많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갈때마다 잔칫날이다. 지난 봄에는 김종훈씨(58세)댁에서 막국수를 얻어 먹었는데 오늘은 마침 김재일씨 댁에서 텃고사를 지낸단다.
11가구 부락 주민 모두가 그 집에 모여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밥상에는 산중에서나 저자에서나 한결같이 보기 힘든 음식들이 놓여있다.
그 정겨운 음식들, 그 훈훈한 입담.....
유식하기는 김진철씨다. 젊어서 삼십년 동안 이장을 본 그는 이 마을 이름이 본래 문고개(門峴)였으며 왜군에게 패한 구한말 의병들이 들어오면서 생겼다고 한다.
마을 앞산에는 망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서 의병들이 망을 봤다는데 날이 좋으면 동해바다와 그 바다에 떠있는 고깃배들까지 보인다고 한다.
김씨의 선친은 구한말에 이런 저런 이유로 가세가 기울고 세상에도 뜻이 없어 식솔들을 이끌고 이 마을에 들어 왔다고 한다.
진동리라는 현재의 행정구역 명칭은 왜정이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한다.
입담 좋기는 김재열씨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젊어서 한 때 투전판, 씨름판에서 날리던 한량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대대적인 산판이 벌어졌을 때는 너와집에서 코클에 관솔불을 밝혀 놓고 투전을 놀다가 순경이 들이 닥쳐 건너방에 들어가 숨었는데 그 숨은 곳이 왠 처녀의 엉덩이 뒤였다.
그 처녀는 근동 마을에 사는 친구의 아내가 되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어쩌다 한잔 마시면 그 친구에게 그때 이야기를 해서 좌중을 웃기는 김재열씨다.
그는 육이오때 연천지구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1급 5호 상이 군인이 되었다. 상이군인 자녀는 입학금 및 수업료를 면제 받는다. 그래서 그는 슬하의 다섯 자녀 모두를 고등학교 이상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부엌에 딸린 외양간에는 소가 한마리도 없다. 그 소도 자녀들 공부시키려고 팔았다고 한다.
육이오는 김재열씨에게만 쓰라린 체험이 아니라 김진철씨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안겨 주었다.
김진철씨 부친은 육이오 당시 인민군들에게 납치되 끌려가다가 귀둔 근처에서 운명을 맞았다고 한다. 반공 청년단이었던 김진철시는 산에 피신해 있다가 마을에 내려와 그 비보를 듣고 귀둔까지 가 그곳에 쓰러진 주검들을 십여 구나 수습했다.
부친의 유골이나마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그것이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있다.
그 옛날 삼팔선은 설피밭과 쇠나드리사이, 그러니까 옥수수밭 여인의 녹슨 경운기가 있던 곳으로 지나갔다. 맞바위 부락에서 20리 밖이 삼팔선이었던 것이다.
육이오 직전, 국군 삼팔선 경비부대는 선목에 1개 중대, 상치전(윗 꿩밭)에 1개 중대, 그리고 갈터에 지서가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 주력 부대가 강릉을 지나 진부까지 쳐들어 온 유월 이십 칠일에야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육이오 이튿날 맞바위 부락에는 오랜 가뭄끝에 비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경비부대 국군들은 주민들의 모내기를 돕고 있었다.
그들이 전쟁이 난 줄 안 것은, 보금이 끊기자 보급을 타러 본대에 갔다가 거기 인공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미처 피난을 못한 주민들 중 젊은이들은 모두 산으로 피신했고 마을에는 어린이와 노인들남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진철씨는 당시 이장을 지낸 탓에 그 부친이 대신 화를 입은 것이었다. 그런식으로 화를 입은 사람이 맞부위 부락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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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 삶을 껴 안은 진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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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자. 그 미친 세월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자. 대신 홍천 현대 상회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양양 생선장수 아주머니처럼 지난 20년동안 맞부위 부락을 드나든 행상이다. 그녀는 40리 밖 면소재지인 현리에 장이 설때마다 맞바위 부락을 찾아와 잡곡을 사들인다. 그녀도 10년전부터는 트럭을 타고 다닌다.
그녀가 이곳 주민들에서 사들이는 물건은 예나 지금이나 눈물겨운 것들이다.
손바닥 만한 밭뙤기에서 거두는 콩, 팥, 질금콩, 옥수수 같은 잡곡 그리고 당귀, 작약, 백출, 황개, 황금, 만삼, 복령, 세신, 더덕 등 깊은 산골을 헤메며 캐내는 약초 뿌리 그리고 서럽도록 징그러운 뱀 따위가 고작이다.
맞바위 부락도 이제는 도로가 개통되고 전기, 전화가 들어온다. 부엌에는 프로판 까스를 사용하고 행상이 트럭을 몰고오게 되었지만 인심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들은 상인이 따로없고 주인이 따로 없이 그저 한 통속으로 지낸다.
이웃한 설악산 지역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래 급속도로 변해 왔다.
주변도로가 확장, 포장되고 각종 위락 시설이 들어 서면서 차량과 인파가 끝없이 몰려다니는 이름 그대로의 공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설악산 곳곳에 터를 잡고 살아 온 산천 사람들의 생활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외딴 너와집, 부엉새, 호롱불, 사투리, 감자와 강냉이 등으로 상징되는 소박한 인정, 그리고 애환..... 이것들은 토박이 삶과 함께 이야기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척박하면 척박한대로, 아니 자연이 척박하면 할수록 더욱 이웃과의 인정에 기대어 공동체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토박이들이 사라진 국립공원은 그 산세나 풍치가가 아무리 장려하다 하더라도 웬지 비애스럽다.
그런 설악산을 남쪽에서 애처럽게 마주보고 있는 산이 점봉산이다.
저 자신도 북쪽 기슭 태반을 설악산에 내준 신세이고 해마다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는 점봉산이지만 여전히 토박이의 삶을 껴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감동을 준다.
이 점봉산에 시원지를 둔 진동천은 이 겨울에도 얼음짱 밑을 흐른다. 흘러간 사람들의 이야기, 흘러간 세월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면서 진동리 부락을 차례 차례 지나 방동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오늘 밤 맞바위 부락에는 세찬 바람이 진동천 골짜기를 거슬러 쇠나드리로 몰려간다.
쇠나드리 바람은 미친 바람. 소가 바람에 날아갔대서 쇠나드리라는데 가난이들 못 날릴소냐, 원한인들 못 날릴소냐.
쇠나드리에서 1박 하는디
그 집 쥔장이 옆지기랑 같이 활동했던 대학산악연맹 학번 동기랍니다.
집사람 과거를 물어 볼까요? ㅋㅋㅋ...
간만에 산중에서 하룻밤이 기대가 됩니다.
다녀와서 말씀 드리지요
안녕히...
DE D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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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던데 기대한만큼 즐거운 산중의 밤이 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