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잠
이재연
해변은 까닭 없이 낡아갔다
흰 거품뿐인 해변의 가장자리에
끝이 뒤로 밀리고 밀리는 오솔길이 생긴 것도
그해 겨울 내가 버리고 온 성난 파도 때문이다
떠날 때 없던 길로 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여름뿐인데 해변은 낡아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해변이 자꾸만 뒤를 따라오는
그때 그 적막을 지우기 위해
파도는 벼린 작살을 등에 꽂은 채 먼 바다로 돌아갔다
다시 왔다
시절이 다가와 물었다
눈이 벚꽃 잎처럼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겨울이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네가 아니었다
아니 너인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바다는 예민했다
아무 말 하지 않을 걸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채
시절 하나 모래 속에 파묻어 버렸다
어설프게 줄을 서고 어설프게 흩어지는 모래 속에
글자를 남기는 긴 손가락은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해변의 필체 해변의 쓸쓸 해변의 소멸
다시 부르지 않을 이름이 삐뚤삐뚤 앞에서 걸어온다
감정은 날렵하게 물속에 잠기지 않는다
물에 젖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밤의 파도는 해변의 감정을 다 지우고
모든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 와
먼 섬 하나 잠재울 것이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더웠던 여름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깊은 밤 허리에서
받침이 떨어져 나간 네 이름을 주워 바다에 던지면
떼 지어 날던 갈매기들이 부끄럼 없이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너에게 끝없이 상냥하였던
그해 여름
우리는
두 손을 활짝 폈다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름이 어지러웠을 뿐
검은 유혹과 건물들이 가득 찬 거리를 바라보며
흰 비누 거품을 만들어 내 얼굴을 문지르다가
불현듯 집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바다를 미친 듯이 찾았다
어디를 가도 갸글갸글 입 속의 냄새가 꽃을 피웠다
지독했다 더위와 함께 미쳐가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도 입장료는 필수였다
입장료 없는 일요일은 불가능했다
노래를 부르기도 어설픈 나이였고
사이다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기도 어설픈 나이였다
표정도 없었고 소원도 없었다
단지 너를 배반할 수 있는 나를 원했다
밖이 보이지 않아도 좋았고
네가 다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사방에서 목청을 높이는 여름이었다
신발을 벗어들고 들판을 가로질러도
생은 우리를 향해 나쁘지 않게 낄낄거렸을 뿐
우리는 지문처럼 어지러운
시장 골목길에 고여 있는 한 줌 어둠이어도 나쁘지 않았다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강을 건넜고 가을을 건넜다 너는 아무것도 없는 나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살 오른 갈매기들이 떼 지어 나타나 먹이를 사냥하여 도망가는 작은 바닷가 허름한 식당구석에서 세균이 득실거리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희미하게 흰 밥을 먹었다 방향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남쪽으로 흘러갔다 아니 북쪽이었는지도 몰라 날짜를 골랐다 동그라미를 쳤다 동그라미가 깨졌다
그렇게 쏟아지던 우리 사이
흐르는 구름, 바람
손 흔드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한동안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데에 전염했을 것이다. 언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불완전한 현실 너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전혀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열중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현장과 구조를 바라볼수록 우리 삶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은 정작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스템의 원리가 작동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삶과 세계는 불완전해 보인다. 치열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 이면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들은 팔랑거리는 잎 하나에도 순간을 집중시키는 놀라운 햇살의 따뜻함과 고요와 평화가 공존하고 있다. 그런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불협화음 속에서도 삶은 조화와 균형이라는 섭리가 함께 한다는 것을 느낀다. 삶의 본래가 그러한 것이겠지만 적당히 행복해도 불안하고 불안해도 행복한 시간들이 공존하고 있다. 마냥 숲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한 그루의 나무를 마냥 지켜볼 수 없다면 위안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자연 속에서만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안은 곧 자기 자신의 내부적 역량에서도 나타나지 않겠는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의 접근은 달라지고 세계의 모순과 고통과 갈등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주체와 세상과의 갈등은 존재한다. 그 갈등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갈등 자체를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갈등을 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갈등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다. 이즈음 갈등과 고통의 질서 속에 있으면서도 갈등과 고통이 아닌 방법으로 갈등을 넘어가고 싶다는 인지적 상황을 주시했다. 밖이 소란할수록 소란을 소란으로 대응하지 않으려는 것은 내가 요구 한 것이기보다는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변화의 사이클이 빠르다. 현대사회의 불안과 고통은 복합적이고 자본주의적이다. 자본주의 지배 형태에도 고통은 잠복해 있다. 고통으로 예술을 말하려는 경우, 고통의 부정성이야말로 지배적 질서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점점 첨예해지는 우리 사회의 대립적 갈등 속에서 고통이 아닌 아름다운 미적 형상화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시인은 몰라도 예술은 스스로 안다. 나무와 그 나뭇잎에 미끄러지는 햇살로 위안을 받아 따뜻해졌다. 밖이 소란해도 안은 따뜻해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밖으로부터의 어떤 압박 없이도 어떤 시는 나에게도 타자에게도 하나의 위안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다른 별의 위치에 와 있는 것만 같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자유를 생각하지만 빠르다. 혼자 느리게 가는 자유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빠르다. 생의 위안은 어디로부터 느리게 오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