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새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상제께서 본댁에 간수했던 선대의 교지를 찾아 옥새가 찍힌 부분을 도려내고….” (예시 18절)
옥새는 국사(國事)에 사용되는 관인(官印)이다. 제왕의 인장으로서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옥으로 제작한 것을 옥새, 금으로 제작한 것을 금보(金寶) 혹은 금인(金印)이라 하였으나, 옥새로 통칭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01 「예고새인조(禮考璽印條)」에 부여(夫餘) 예왕(濊王)이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옥새는 역대 국왕에게 대대로 전해졌으며, 그 쓰임은 외교문서와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문서에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각종 행차 시 그 위의(威儀)를 과시하기 위하여 행렬의 앞에서 봉송(奉送)되기도 했다. 또한 시대의 변천과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크게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국인(國印)과 국내용 어보(御寶)로 구별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까지의 국인(國印)은 대부분 중국 역대왕조의 황제들로부터 받아 들여왔고, 기타의 어보(御寶)들은 국내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명종 2년(1172) 금나라에서 금인(金印)을 보낸 것을 비롯하여, 요ㆍ원ㆍ명나라 등에서도 여러 차례 고려왕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왔었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에게 보낸 금인(金印)에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란 인문(印文)이 있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어보(御寶)들이 제작 사용되었는데, 교서ㆍ교지 등에 찍는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諭書)에 찍는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시험의 문서에 찍는 ‘과거지보(科擧之寶)’, 왕이 지은 글에 찍는 ‘규장지보(奎章之寶)’ 등등이 있었다.
한편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옥새제도 대신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국새(國璽)제도가 시행되었다. 1949년 5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가 제작되었고, 1970년 3월에는 인문(印文)을 한글 전서체(篆書體)인 ‘대한민국’으로 고쳤다. 국새는 총무처에서 관장하여 왔으며, 정부조직 개편으로 98년 2월 28일부터는 행정안전부 의정국 의정과에서 국새와 함께 대통령직인, 국무총리직인을 관리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ㆍ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ㆍ한국민속사전 편찬 위원회, 『한국민속대사전』, 민족문화사, 1993
01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