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집 『적막강산』, 1963)
[작품해설]
이 시는 ‘무성한 녹음’과 ‘열매’를 위하여 떨어지는 꽃송이, 즉 낙화를 이별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깊은 통찰을 보여 준다. 시인은 이 작품을 25세의 나이인 1957년에 썼다고 한다. 17세에 등단하여 일찍이 그 조숙성을 세상에 드러낸 바 있는 시인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문학적 천재성을 널리 보여 주었다. 20대 중반의 청년이 썼다고는 하기 어려울 장도로 이 시는 차분한 어조로써 삶의 보편적 측면에 대한 깨달음과 체념, 생의 예지 같은 것을 펼쳐낸다. 물론 시인의 내부에 서려 있는 젊음으로 해서 감상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란 것은 아니더라도, 전후의 절망과 허무가 완전히 가셔지지 않은 당시의 문단 상황에서, 이같이 정제된 서정시를 보여 주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 시의 첫 연은 낙화의 아름다움을 서술하는 부분으로, 작품 전체의 주제와 인상을 집약하고 있는 경구이자 압권이다. 시인은 떨어지는 꽃을 보며 그 꽃의 사라짐을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딤으로 환치해 놓는다. 사랑과 이별 젊은이의 몫임에는 틀림없지만, 시인은 그것을 다만 젊은이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 범사(凡事)의 보편적 국면으로 확대시킨다. 그러므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낙화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랑하면서도 떠나야 할 것을 알고 떠나가는 연인일 수도 있고,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는 탐나는 자리라 하더라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떠나가는 사람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꽃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시는 이별이나 죽음도 그 참된 의미를 알고 이루어질 때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고귀한 깨달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3연은 1연의 내용을 구체화하여 사랑의 사라짐과 나의 떠남을 꽃이 떨어져 분분히 흩날리는 모습으로 보여 준다. 4·5연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사랑과 이별의 아픈 체험을 거쳐 나의 청춘도 사라짐을 노래한다. 4연의 결구행이나 다름없는 시행을 5연으로 굳이 독립시킨 시인의 의도는 이 시가 사랑의 별리나 젊음의 아픔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영혼에의 축복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1행으로 이루어진 5연을 중심축으로 전후가 상호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전반부의 ‘젊음 – 고뇌’와 후반부의 ‘성숙 – 인내’의 대립 구조흘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소 퇴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이 5연은, ‘낙화’가 여름날의 ‘무성한 녹음’과 가을날의 ‘열매’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 즉 통과 제의(通過祭儀) 같은 것임을 보여 줌으러써 우리네 삶도 그같이 무성한 녹음과 풍성한 결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청춘기의 고통을 슬기롭게 감내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6·7연은 이러한 깨달음이 심미적 의장(衣裝)을 통해 표현된 부분이다.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 내 영혼의 슬픈 눈’과 같은 표현은 내면의 추상적 사고를 가시적(可視的) 정경으로 나타낸다. 이는 고통의 인내가 냄녀적 아름다움과 관련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의도적 장면이다. 또한 지금 겪는 아픔이 성숙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슬픔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은 마지막 시행에서 물의 이미지를 이용, 눈물의 형상을 암시하고 비애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소개]
이형기(李炯基)
1933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50년 진주농림고등학교 재학시 『문예』 추천으로 등단
1956년 한국문학가협회상 수상
1966년 문교부문예상 수상
1976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2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부산시문화상 수상
1985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1990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동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시집 : 『적막강산』(1963), 『석초류』(1967), 『돌베개의 시』(1971), 『꿈꾸는 한발(旱魃)』(1976), 『풍선심장』(1981), 『보물섬의 지도』(1985), 『그해 겨울의 눈』(1985), 『오늘 냐 몫은 우수한 짐』(1987), 『심야의 일기 예보』(1990), 『죽지 않는 도시』(1994), 『알시몬의 배』(1995), 『절벽』(1998), 『존재하지 않는 나무』(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