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정원 (외 2편)
이화영
오랜 시간 땅거죽을 기어 없어진 다리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태양 아래 벗어놓은 허물처럼 오그라들어 잠든
숲속의 정적도 기억하지 못한다
빛이 들거나 어둠이 깔리거나 자박자박 얕은 물길을 통해
누군가 건너오는 소리
나는 너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다
달이 차면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욕망
가시 박힌 상처를 더듬는 일 따위는
처녀를 버린 후부터 잊은 지 오래
역광으로 터져버린 박주가리의 씨방이나 기억하라지
비릿한 달빛이 거울에 박힌다
물에 녹인 아스피린을 먹고
긴 목을 흔들며 모딜리아니의 여인이
동공 없는 파란 눈으로 내 아이가 자란 곳을 들여다본다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숨긴 암록의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다
깜깜한 숲에 또 다시 달이 뜬다
그 곳,
이브가 쫒겨난
무화과나무가 출렁이는
—《시인시각》2010년 봄호
드리궁틸*에 가면
꿈꾸는 것은 절대 금지
타는 갈증 일어도 제대로 땅에 발을 붙여 벼랑길만 지나시라
곧 하늘 열리며 부르는 소리 들리면
허공을 끌어안은 몸이 한때 야크였거나
그의 창자로 들어간 소금 한 줌은 아니었는지
잘 살피시라
저기 죽은 자의 살덩이 쪼아 먹는 독수리가
억겁을 돌다 내려와 탐하는 거라면
난자질로 삶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는 온전한 순간을 즐기시라
환상의 기대는 욕심의 무게
목숨은 족히 한번 죽음으로 영원할진데
주린 배 채운 새 큰 날개 펼쳐 데려간 영혼이나 잠시 그리워하시라
바람길 따라 떠나야 할 몸
마지막을 지켜본 친구들에게 쓸쓸한 미소나 보내주시라
천장사여, 자 이제
내 두피를 벗기고 뼈와 살을 잘게 부수어
햇살과 바람에 알맞게 섞어
몰려드는 독수리 떼에게 한 점 남김없이 던져 주시길
목울대 꽉 채울
딱딱한 부리에 찍혀 넘어 오는 소리 들으며
불온하게 맛보았던 이승의 꿈은 다 잊었다고
전해 주시라
*드리궁틸: 티베트에 있는 천장(天葬) 터
37도 2부
사랑할 때와 임신한 여자의 아침 체온은 같다
성스럽기도 하고 외설스럽기도 해서 입 밖으로 뱉어내기 조심스럽다 북극 이글루에 사는 이누이트 족은 남자 손님이 찾아오면 하룻밤 부인을 내어준다 뱉은 입김 쩍쩍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은수저에 상다리가 부러지는 밥상은 아니지만 지상에서 가장 붉은 심장을 보시한 뜨거운 온도를 내어주는 것이다
종족 보존을 위한 이누이트 족 남자의 마음은 밤새 하얀 고드름 창이 되었을 거다 강물이 찰랑대고 흙이 부풀어 바람이 달아지는 봄이 오면 여자의 둥근 배 위에도 봄풀의 뿌리가 자랄 거다
북극 반대편 보일러가 지글지글 끓는 방에 틀어박혀 고독을 믿지 않는 그들의 생존 방식을 영상으로 답습하며
문득, 궁금하다
내 남자의 체온은 하얀 결정체 몇 개쯤 맺혀있다 녹아내릴지
— 시집 『침향(沈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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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 1965년 전북 군산 출생. 2009년《정신과 표현》을 통해 등단. 시집 『침향(沈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