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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묵상글 ( 연중 제3주간 금요일. - 뿌리기만 하면 된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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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30 02:25
- 뿌리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이나 걱정하지 말고 너는 그저 씨나 뿌려라!
그런데 씨만 뿌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된다고 하는데도
우리가 씨뿌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태평 농법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씨만 뿌리고 태평하게 내버려 두는 농법이지요.
힘들게 땅 갈아엎기나 비료나 농약 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된다면 농사짓는 것 너무 쉽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써야만 수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 농법에 대한 믿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씨만 뿌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신다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씨여도 문제없습니다.
우리 사랑이 겨자씨만큼 작아도 문제없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하느님께는
겨자씨처럼 작은 사랑으로 백배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랑이기만 하면 되고,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믿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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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의 다층적 의미!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성경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성경의 다층적 의미
2026년 1월 29일 목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지혜를 받아들인 방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 가지 해석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어지고 묵상되며 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의 여러 세기 동안,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같은 권위 있는 교사들을 통해 성경이 일곱 가지 “의미”로 읽히고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문자적 의미, 역사적 의미, 알레고리적 의미(상징적 해석), 도덕적 의미(윤리적 가르침), 상징적 의미, 종말론적 의미(역사의 방향과 성장), 그리고 원형적·보편적 의미(널리 합의된 상징성)라는 여러 층위에서 진지하게 탐구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층위들은 학자들 사이에서 깊이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평범한 신자들에게도 주일 강론을 통해 전해졌습니다(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들을 때 여러 가지 해석이 함께 제시되는 것은 신자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의 다양한 의미는 때때로 인간의 오감, 곧 듣기, 보기, 맛보기, 냄새 맡기, 만지기에 비유되곤 했습니다. 이는 같은 실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인식하는 다섯 가지 방식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이후 서유럽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인식의 길을 사실상 하나의 방식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곧, 이성적·문자적·역사적 해석만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지난 수 세기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성경은 거의 이 단일한 의미로만 압축되고 제한되어 왔습니다. 성경이 지닌 풍성한 영적 차원과 다층적 의미가 사라지고, 말씀의 깊은 신비가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에 대한 우리의 영적 접근은 심각하게 좁아졌다고 저는 봅니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가장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문자 그대로 한 순간에, 한 방식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체험이 지금 여기의 "나"나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저는 바로 그 체험의 전이(transference)가 모든 영적 텍스트의 본래적이고 변화시키는 기능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좁은 이성적·문자적·역사적 해석은 대체로 과거만을 바라보는 박물관적 신앙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변화의 영성보다는 거래적 종교를 낳습니다. 곧, 사랑과 봉사, 마음의 실제 변화보다는 개인의 획일성과 집단 소속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강화합니다.
사실 문자주의적 해석은 신약성경의 시작부터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같은 예수님의 사건을 전하는 네 복음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무류(無謬, inerrant)"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거듭해서 이야기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며, 하느님께서 어떠하신 분(무엇과 같으신 분)이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초대 교회 몇 세기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성 너머의(trans-rational) 세계와 그분의 이야기와 비유를 통한 가르침 방식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엄격한 교리적·체계적 신학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
곧, 간접적이고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이야기와 비유의 언어가 예수님께서 영적 실재를 가르치시는 데에 가장 선호하신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거의 모든 비유는 같은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비유, 은유, 이야기, 상징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세기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그분의 중요한 메시지들을 놓치거나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영성은 훨씬 더 빈곤해졌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올해 성경에 집중하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머물렀던 복음주의 공동체를 떠난 뒤, 마음에 남아 있던 불편한 해석들 때문에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눈과 귀를 열어, 제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제 영적 여정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Andrea C.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the Bible? (CAC Publishing, 2018), 9–12, 14–1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réj Richár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경과 우리의 관계는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신비로우며, 그럼에도 언제나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과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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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4:40 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곧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고 깨어 있든, 밤이든 낮이든 씨앗은 자라납니다.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의 신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하느님을 향한 의식의 씨앗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자라 곡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젖은 흙 속에 묻혀 잊힌 듯, 죽은 듯 머무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연약한 싹이 땅 위로 올라올 때, 그것은 아무런 방어도 없이 세상 모든 위험에 노출됩니다. 바로 그것이 삶이며, 오직 사랑만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번개와 천둥처럼 요란하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천히, 미시적으로, 겸손히, 다정히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몫은 기다리고, 듣고, 땅의 지혜로운 겸손을 배우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현존은 씨앗처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심겨져 자라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 즉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또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우리가 협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 당신이시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것이 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먼저 의식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복음 삼덕이라고 말하는 것이고요!!
다윗은 초기에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권력과 특권 속에서 방심하며 무너졌습니다.
"보다 → 욕망하다 → 취하다"라는 패턴은 창세기에서부터 반복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와가 보았고, 욕망했고, 취했으며(창세 3,6),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취했다."(창세 6,2)라는 구절에서도 같은 단어 laqach가 쓰입니다.
다윗 역시 이 오래된 패턴을 이어갔고,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움켜쥐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심지어 다윗은 자신의 충복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를 차지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회개하며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이제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이제 "취하는 사람"에서 "창조를 청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본인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힘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보아도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어둠 속에서 헤맬 때도 하느님께서는 절대 다윗 곁을 떠나지 않으시면서 다윗이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도록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다윗의 나라, 즉 이 세상의 왕국과 하느님의 왕국이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취함" 혹은 "차지함"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기다림과 수용"으로 자랍니다. 농부가 씨앗을 기다리듯, 신앙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느님 나라는 비록 그런 취함과 차지함의 세상에서 한동안 헤맸다 하더라도 하느님 한없는 은총과 사랑을 의식하고 받아들여 참된 변화를 추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것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듯이,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일 우리는 주님의 기도(우리 아버지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의 패턴을 뒤집게 되면 우리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나'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기 위해 찾아와 주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어둠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어둠 속에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 즉 "어둠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라는 말씀이 자기에게 더 이상 스스로를 고치려 애쓰지 말하는 초대로 들렸다고 합니다. 고통을 묻어두지 말고 숨지도 말고 자신을 찾아와 주시는 사랑의 주님께 기꺼이 자기의 어둠을 드러내 보이라는 초대로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 한 번 나누어 드렸던 이야기입니다만,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떤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그의 이야기를 몇 부분만 들어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빨리 정신 차리기를 바라며 발을 구르거나 시계를 들여다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제 곁에 앉아, 그 어둠 속에서 함께 계십니다. 소음과 긴장이 서서히 가라앉고, 제 마음은 고요해졌습니다. 저는 시편 139편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움이 사라지고,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제 안에 쌓여 있던 죄책감과 두려움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무리 깨어지고 상처 입은 존재라 해도,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결코 저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우울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어둠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병을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때로는 병이란,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현실일 뿐입니다. 저의 희망은 단지 기적이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만 의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치유되지 않아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저의 희망은 하느님의 성품과 신실하심 위에 서 있습니다.
더 큰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단번에 꺼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 속을 함께 걸어가실 때에도 여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제 배웠습니다. 어떤 시련이 몰려와도 주님께 매달리는 법을. 제 얼굴을 주님의 옷자락에 묻고 깊이 숨을 들이쉬는 법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우울의 불길이 가슴을 태울 때, 저는 주님께 기대어 그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괜찮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어둠 속에서도.'
오늘, 당신도 혹시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통 속에 계신지 묻고 계신가요? 그것이 우울이나 불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실, 실패, 병, 불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런 질문과 마주합니다. '주님, 여기 계십니까? 저와 함께 계십니까?' 하면서요....
고통과 슬픔 한가운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 실망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비록 상황을 단번에 바꾸지 않으실 때에도, 주님께서는 당신 곁에 앉아 고통을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둠이 언제나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도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그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앉아, 때로는 절망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만 알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에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싶은가?" "욕망과 취함의 세상인가, 아니면 기다림과 은총의 하느님 나라인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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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제가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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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글에서 일했던 한 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왔다고 말합니다. 경상도의 작은 마을에서 물장구를 치고 다람쥐를 쫓던 어린 시절, 컴퓨터로 시작된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모바일 시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 이후 구글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점점 기계와 결합하고,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은 분명히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행복은 아닙니다. 기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어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역사는 이미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도로와 수도 시설, 건축 기술은 오늘날까지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제국의 크기와 기술은 로마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노예가 일을 대신하자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국가는 빵을 나누어 주며 검투장과 목욕탕을 열어 주었습니다. 굶주림은 해결되었지만, 삶의 의미는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잊어버렸습니다. 기술과 제도는 인간을 먹여 살릴 수는 있었지만, 인간의 영혼을 살려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외부의 적보다 먼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편리한 삶이 가능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물어야 합니다. “이 삶은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인간은 단순히 소비하고 즐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다윗 왕의 삶도 이러한 질문과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막내였던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고, 나라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 권력의 정점에서 무너집니다. 바세바를 취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만든 선택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길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선택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왕이라는 지위도, 나라의 크기도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 때만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죄보다 그의 회개를 더 깊이 보셨고, 다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생명이 그 그늘에 깃듭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대한 제국이나 눈부신 기술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망 대신 감사, 교만 대신 겸손, 시기 대신 온유를 선택하는 작고 조용한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나라의 크기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 행복의 디딤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이며, 오늘 우리가 맞추어 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퍼즐입니다. 비록 길이 멀고 험해 보여도, 겨자씨 같은 선택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주님, 기술과 힘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작은 겨자씨 같은 삶으로 당신 나라를 자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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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 사무엘기 하권은 다윗의 승승장구와 우여곡절, 그리고 처참한 몰락과 심연의 바닥 체험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으로 칭송받습니다. 사실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온화했고 성실했으며, 권위를 인정할 줄 알고 자신의 할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앙심은 어린 시절부터 출중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님의 성궤를 다윗성에 안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 펄럭이는 야전 막사 휘장 가운데 모신 주님의 궤가 마음에 걸리자 그는 주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 드리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다윗은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살려준 친구 요나단의 우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자 왕자처럼 살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다윗이었지만 그 역시 평생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입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해준다 해도 징역 20년 감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둘 중 한 가지 죄만 저질러도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토록 신앙심 깊고 충실하던 다윗이 되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는 늘 승승장구했습니다. 나가는 전쟁마다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장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은 심란한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후방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이 환호하고 군사들은 충성심을 보이자 잔뜩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주님 두려운 줄 몰랐습니다. 휘하 부하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선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는 술과 고기, 향락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이런 다윗을 그냥 두실 리 만무합니다.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그를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다윗 인생의 부침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갔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강한 믿음 안에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 한방이라고 잠시 자만하는 순간, 순식간에 죄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욱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는 우리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주님 자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다윗이 보여준 ‘솔직하고도 즉각적인 회개’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 사무 12,13)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다윗,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다윗, 주님 자비와 인간의 비참 속에서 오랜 방황을 거듭하던 다윗이 마침내 임종 직전에 도달했는데, 그가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남긴 유언은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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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추측해 소설 쓰듯 해서 짓는 죄에서 벗어나는 법 --- 14:40 추가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를 짓는 유형은 다양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여러 등등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최근에 겪은 일을 가지고 중요한 깨달음이 있어서 공유를 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요 정말 피부로 와 닿을 수 있는 소박한 앎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며칠 전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지도했던 학생입니다. 사실 제가 전화를 받기 전 며칠 전쯤에 전화를 한번 했습니다. 사실 언제 이 학생을 언급한 적이 있었고 또 이 학생이 수능영어 만점을 먹고 저를 피알하기 위해 홍보전단을 만들었을 때 그 원고를 굿뉴스에 올렸다가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괜히 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처럼 보여서 그랬습니다. 제가 아꼈던 제자입니다. 만 2년 지도했습니다. 솔직히 이 애는 개인지도만 했습니다. 이 애는 국어실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지금 보니 이 애 이야기한 게 순간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 전에도 이걸 언급했던 게 떠오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몇 년 후면 신문사 기자나 방송사 기자가 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만약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사회노동자를 위한 공부를 해 그쪽 방면으로 갈 거라고 학원 다닐 때 진로를 이야기한 친구입니다. 부모 두 분이 다 교사입니다.
첫 고1 모의고사를 치고 결과를 본 후에 바로 저한테 왔습니다. 상담을 하러 왔던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해서 딱 고2 2월 말까지 만 2년 해 수능에서 영어를 만점 먹게 만들어줬습니다. 처음에 점수가 60점 대 후반이었습니다. 이 점수로는 인 서울 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영어가 발목이 될 것 같아서 애가 부모에게 학원을 가야겠다고 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지도를 하면서 알게 된 게 원래 애가 국어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데 영어는 어떻게 중학교 때 잘 교육을 못 시킨 것 같았습니다. 부모 두 분이 교사인데 어떻게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국어에 재능이 있다는 건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재능을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진로를 교사로 추천했나 봅니다.
부모님은 교사를 그렇게 원하지 않아서 비슷한 길이 그나마 글도 잘 쓰고 해서 기자를 꿈꿨던 친구입니다. 제가 요즘 기자를 사회에서 잘 하지 못하면 기레기 소리 듣는데 괜찮겠니 하니 자기의 재능을 살리겠다고 해서 그렇게 진로를 정해서 고려대 미디어학부에 진학을 했습니다. 쓰다 보니 또 기억이 나네요. 예전에 이 애에 대해 확실히 쓴 적이 있다는 게 기억납니다. 방학 때 내려오지 않고 편의점 알바를 했다고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 애들이 입학했을 땐 거의 같은 성적으로 들어갔는데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눈이 확실히 넓어서 서울에서 있으면서 더 많은 걸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방학 때도 서울에 있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 언제 전화를 했는데 받았습니다. 그때 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에 가 있는 애랑 통화를 했던 거죠. 세상 정말 좋아졌습니다.
성탄 전야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다가 가끔 가는 통닭집이 있습니다. 들어가는데 세상에서는 이브날이라 자리가 만석이었습니다. 들어갔는데 아는 언어선생 원장이 눈에 보였습니다. 사우나에서 예전에 자주 만나 알게 된 원장입니다. 서울대 국문과 나온 원장이고 또 같은 종씨였습니다.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어떻게 단체로 많이 와 있었고 또 뭔가 발언을 해서 제가 그냥 분위기 때문에 나오려고 하는데 이 학생 엄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저는 긴가민가했습니다. 이 애 엄마랑 상담을 한 두 번 정도밖에 하지 않아서 그것도 짧게 했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학원을 그만둔 지 오랜 시간이 돼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거죠.
저는 사실 제가 아는 그 원장은 사교육 원장이었고 또 제 학생 엄마는 공교육 교사라 제가 잘못 봤나 싶었죠. 그때 제가 보니 엄마는 제가 아들 영어학원선생이었다는 걸 알았나 봅니다. 순간 멈칫했거던요. 나중에 조금 궁굼해 마침 언어선생님 톡이 있어서 제가 처음으로 톡으로 간단한 질문을 한 게 있었습니다. 문장부호에 관한 것 하나를 하면서 덤으로 혹시 그때 원장님을 뵈었는데 이러이러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가르친 학생의 엄마로 보이는 분이 계셨는데 혹시 그분 아시는지 제가 문의를 했는데 답장이 왔습니다. 누구누구 어머니이십니다. 제가 지도한 학생의 어머니가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애를 제 학원에 소개를 해 준 사람이 국어언어선생이라는 것입니다. 딱 그 정도만 말씀을 주셨고 저는 사실 놀랐습니다. 언어선생이 어떻게 제가 지도한 애를 알고 있었고 또 그 애 엄마랑 같이 모임을 가졌는지 그 사실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사실은 또 놀란 게 그 샘은 실력이 아주 뛰어난 언어선생입니다. 어떻게 해서 저한테 그 애를 소개했는지 그 사실도 아주 궁금했습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보통 보면 이런 경우에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누구 학생을 원장님께 소개를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는 그 애를 통해 만 2년 동안 정확하게 2000만원 수입을 얻었습니다. 보통 이러면 대개 나 때문에 수입이 그렇게 생겼다고 공치사를 하더라도 공치사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그렇게 하지 않은 것도 또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궁금했습니다.
애 엄마가 어떻게 그 원장님과 함께 있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 제가 애한테 전화를 했는데 이게 신호가 가다가 거절이 된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때는 군생활 할 때 전화를 한 거였고 또 이번에 전화를 했을 땐 제대를 하고 학교에 다닐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가 다음날 문자를 남겼습니다. 잘 있는지와 또 소식이 궁금해 한번 연락했다고 했었죠.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나 또 연락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 애는 정말 애가 공부도 공부지만 인성이 아주 바릅니다. 요즘 애처럼 그런 애가 아닙니다. 제가 볼 땐 엄마 아빠가 교육을 잘하셨다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애가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고 이젠 시간이 많이 흐르고 해서 뭐 그냥 별로 관심이 없나 생각을 했었죠. 좀 더 말씀을 드리면 서운했던 것입니다. 이 애는 단순히 저를 학원선생으로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애가 정말 부모님이 공교육 교사이지만 학교 선생님보다 더 저를 존경한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애였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트에 장을 보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바로 그 애였습니다. 전화를 받고 안부를 묻고 그랬습니다. 알고 보니 저에게 전화를 한 날이 바로 군제대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연평도에서 군생활을 한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잠시 통화를 하면서 제가 궁금한 걸 물어봤던 것이죠. 저는 혹시 그 애가 국어학원을 다녔는지를 물어봤는데 학원은 다니지 않았고 자기 아버지와 어떤 모임을 통해 어떻게 아는 사이라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뭔가 의문이 풀렸습니다. 애가 영어성적이 안 나오니 애 아빠가 아마 어떻게 아는 국어원장선생한테 이야기를 했을 테고 그러다가 그 애를 저한테 소개를 해 엄마가 상담을 하러 온 것이라는 퍼즐이 풀렸던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 사례에서 저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제가 시시콜콜 다 언급한 게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다 이유가 있어서 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내용과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제가 어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정확하게 잘 이해하시기 어려워하실 거라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틀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사례에서는 아니지만 이 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뭐냐 하면 제가 이 학생에게 전화를 했을 때 거절이 됐던 그 상황에 대한 이해입니다. 제가 문자를 남겼고 또 그랬으면 늦어도 다음날이나 아니면 그 다음날이라도 분명 답장을 할 건데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저는 섭섭한 마음과 함께 이젠 날 예전처럼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고 제가 마치 추측해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근데 실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애가 만약 군에 아직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대를 해서 지금 학교에 다닐 거라는 추측을 했기에 조금 섭섭하게 생각을 한 것이었던 것이죠. 군 제대를 앞둔 며칠 전이었고 군이다 보니 어떻게 자유롭게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저는 그런 상황이라는 걸 모른 채 제가 단순히 추측을 해 오해라고까진 그렇지만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된 것이었던 것입니다. 전 이걸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이처럼 우리도 신앙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14년 긴 세월은 아니지만 또 개신교에서도 그렇고 이건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신앙 안에서도 이런 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건 죄는 아닌데 이게 신앙 안에서는 이런 식으로 해서 죄를 짓는 게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죄일까요?
바로 자신이 스스로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단순히 뭔가 추측을 해 스스로 오해를 하고 또 단정을 해서 마치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은 것처럼 또 스스로 그 사람을 단죄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이 사실을 통해 자각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아주 간단한데 이 결과만 단순히 몇 줄로 말씀드리면 전혀 이게 실감이 되지 않기에 구구절절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 사안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로 제가 제목에서 언급을 했듯이 추측해 소설을 쓰다보니 스스로 생각으로 죄를 짓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걸 막는 방법은 바로 어떤 사실을 우리가 판단을 할 때 확실히 어떤 분명한 사실을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확인을 한 후에 판단을 해도 해야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자기의 추측으로 그것도 맞을 것이라고 하는 단정을 지어서 그게 공교롭게도 맞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땐 엄청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이게 죄로 연결이 되니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건 제가 또 다른 주제로 해서 올리겠습니다. 내용이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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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한 스님의 유혹 극복기
오늘은 예전에 저희 집과 인연이 깊은 한 스님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이야기에서도 잠시 이 이야기를 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이지만 잘 적용하면 우리의 신앙에도 응용할 수 있어서 유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스님은 어머니께서 큰 절은 아니지만 불사를 해 드린 스님이십니다. 쉽게 말해 절 하나 지어드린 것입니다. 저희 집과는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유능하고 박식하고 뛰어난 스님인데 그게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능력에 비해 잘 풀리지 않는 스님이었습니다. 스님 정도의 능력이면 스님들 세계에서는 세상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질만한 스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스님은 부산 출신의 스님입니다. 일단 스님 얼굴을 보면 스님 머리는 어떤 머리인지 다 잘 아실 겁니다. 실제 스님 머리를 하고도 스님이 잘 생겼다면 그건 엄청 잘 생긴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상태에서도 말입니다. 실제 스님이 그렇습니다. 남자가 봐도 그것도 머리카락이 없는데도 정말 미남입니다. 스님한테 미남이라는 말을 하니 어색하긴 합니다. 출가를 하기 전에 부산에서 시내를 돌아다니면 만약 지나가다가 스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나가면 모를까 그냥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보고도 돌아보지 않을 여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이를 거의 불문할 정도입니다. 애들은 아니겠지만요. 학창시절에는 여학생들이 집에 찾아올 정도가 아니고 완전 스토크처럼 동네 곳곳에 진을 칠 정도로 그렇게 잘 생겼다고 합니다. 이건 스님 어머니한테서 절에서 제가 듣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원래 스님은 스님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연을 이야기하려면 너무 깁니다. 제가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을 보시면 왜 스님이 되었는가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세상 남자들 입장에서 보면 엄청 부러울만도 한데 이게 실제로 그렇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겨울에 보통 스님께 가면 공양주도 없고 저녁 공양 후에는 스님과 스님 방에서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스님이 저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단 이야기를 하면 잘 듣고 또 이해를 잘 하고 중간 중간 뭔가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걸 좋아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반응이 없고 또 스님이 해 주시는 이야기가 아주 좋은데 그런 이야기를 또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님께 듣는 이야기가 주로 불교 야사입니다.
중국이나 한국 고승들이 어떻게 수행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일반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저는 사실 흥미를 가지고 잘 들었기 때문에 제가 스님께 가게 되면 엄청 반가워하시는 것입니다. 겨울에 저녁 공양을 다 하고 소화가 되면 보통 7시가 됩니다. 그때부터 새벽 3시 예불하실 때까지 근 8시간을 거의 스님 혼자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한번은 제가 어쩌면 당돌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스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보니 궁금해 질문을 했던 게 있습니다. 제가 그랬죠. 스님 만약 제가 스님이었다면 출가 안 하고 그렇게 여자들이 따르면 그중 아주 멋진 여자랑 결혼해 살겠습니다. 근데 왜 출가하셨는지요?
나도 어떻게 중이 될지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게 잘 생긴 것도 고역 아닌 고역인 것이었습니다. 허구한날 여자들과 원치 않은 이상한 일로 골머리가 아프게 생기는 일이 엄청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여자가 자기가 애인이라면서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니고 주위에 이상한 소문을 내고 하는 그런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는 여자들 때문에 제명에 못 살겠다고 판단해 어머니께 절에 들어가 중이 되든지 해야지 살지 안 그러면 인생이 힘들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참으로 아들래미 하나 있는데 그것도 중이 되면 대가 끊어지니 기겁을 할 노릇인 것입니다.
어머니도 여자인지라 아들 얼굴을 보면 여자들이 안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귀공자처럼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스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해서 스님이 된 것입니다. 이게 원래 좀 우낀 게 원래 스님 집안은 개신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봤을 땐 신부가 되는 게 더 나았을 건데 그땐 제가 그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랬습니다. 목사를 생각했는데 당연히 목사를 하면 이건 불을 보듯 망할 게 분명했습니다. 그 이유는 굳이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 정도가 되니 스님이 절에서도 인기가 어느 정도 될지 상상이 되시겠죠. 그래서 스님은 맨처음부터 어머니를 절에 모셨던 것입니다. 스님 어머니말입니다. 그것도 스님 방 옆에다 어머니 방을 마련한 것입니다. 원래는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닙니다.
원래 보통 보면 불교 신자들 가운데 흔히 여자분들을 보살이라고 통칭합니다. 보통 보살들은 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고 몸조심도 아주 정갈하게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조신하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원래는 이게 정상인데 사람이라는 게 이게 본능이라는 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넘을 수 없는 존재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게 워낙 인물이 출중하면 여심도 아무리 불심이 강해도 순간 순간 이게 스님으로 안 보이고 남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님께 온갖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님이 어떻게 보살들이 유혹을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겁니다. 이게 스님이 무슨 맘으로 그렇게 설명을 하는지 인간적으로는 그런 걸 통해서 스님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사실 스님은 그런 것보다는 같은 남자이다 보니 저한테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될 거라 여자가 어떤지 그걸 알려주려고 그렇게 생생하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웃지 못할 만큼 우낀 일도 많이 있었고 어떤 경우는 그 상황이 너무 우껴서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던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연을 공개를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아 공개를 할 수는 없습니다.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제가 한 질문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스님 스님되신 거 후회해보신 적 없는지와 보살들이 혹 유혹을 하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지 그 질문에 어떻게 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스님의 기막힌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여자 때문에 팔자도 없는 중 노릇을 하게 생겼는데 그럴 것 같으면 애초부터 중을 하지 않았어야지 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저랑 워낙 친하다 보니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땡중은 모르겠지만 중팔자도 참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약간 슬퍼야 하는데 그때 그 말씀을 하실 때 스님 표정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 웃음이 나오는 건지 조금 상상이 되시는지요? 속으로 잘생긴 것도 피곤하겠다는 게 절로 인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자들 등살 때문에 스님이 된 것인데 그로 인한 이상한 인연을 끊기 위해 스님이 된 것인데 그걸 뿌리치지 못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사 처음부터 스님이 될 때 그 유혹을 이기지 못 할 것 같으면 중이 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스님도 남자인데 보살이 그것도 이쁜 보살이 온갖 이상한 일로 유혹을 하면 솔직히 이기기 힘들지만 그때 그걸 이기는 수단이 바로 자신이 왜 중이 된 것인지 그걸 항상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톨릭식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그에 합당한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스님은 달리 말하면 여자의 유혹을 그런 모토로 이기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신자이면 어떤 신자로 또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신앙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바로 정립이 되지 않는다면 제대로된 신앙의 길을 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이런 걸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소한 내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체성이라도 있는지 한번 자문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만약 이게 없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모래성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똑같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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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생활묵상 : 진정한 수행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진가가 드러납니다.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만 그게 생략됐습니다.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3시쯤 될 무렵에는 그만 해야 합니다. 스님이 새벽 예불을 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스님 절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날씨도 아주 추운데 그냥 하루 쉬시지요. 부처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약간 가벼운 농담조로 던진 것입니다. 이때 스님이 하신 말이 정말 제 가슴에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게 있습니다. 원래 수행정진은 남이 없을 때 그때 흔들리지 않아야 옳은 중이 되는 거다. 남이 있다고 해서 지키고 없다고 해서 안 지키면 그 중이 과연 옳은 중이라고 할 수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당시 개신교 복음에도 이와 같은 맥락이 있지만 우리 같으면 사순 때 항상 잘 등장하는 복음입니다.
회당에서 남이 보는 자리에서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사실 이 스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에서 나눔을 가질 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절을 간다고 해서 부처님을 믿는 건 아니고 단지 잘 아는 스님이기 때문에 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상황을 잘 전달하니 목사님도 좋은 건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그 주 주일설교 때 제가 한 나눔을 소재로 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걸 좀 더 다르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은 외형은 봉사이고 또 희생처럼 보이지만 그건 가식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도 그렇고 신앙도 그럴 겁니다. 남을 의식해서 신앙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한다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눈길을 우리는 항상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감시의 눈길이 아니라 저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사랑해 주시려고 하는 사랑의 눈길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눈길을 의식하면 사람이 보느냐 안 보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수준이 되는 건 하루아침에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생활을 끊임없이 할 때만이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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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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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4:40 추가
마르 4,26-34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오늘도 그제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이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할 수 있을지 그 ‘방법론’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 말씀을 열매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느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면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지를 알려주고 있지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게 하는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고 말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농부는 그저 밭에 씨를 뿌리고 가꿀 뿐 그 씨앗에 햇볕을 내리쬐고 비를 뿌리며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은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마음 속에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일 뿐 그 말씀이 내가 처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 구체화되어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는 온전히 하느님 뜻에 달려있기에, 나로써는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저 하느님 말씀이 그분 뜻과 섭리에 따라 ‘알아서’ 열매 맺을 때까지 ‘진인사대천명’하며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씨앗을 땅에 심으면 밖에서 보기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씨앗은 생명의 싹을 틔워내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이라는 씨앗을 내 마음에 심으면 겉에서 보기엔 당장은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믿음의 싹을 틔워내기 위한 과정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면 씨앗으로써의 존재성을 잃어버리기에 더 이상은 씨앗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라는 새로운 존재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지요. 마찬가지로 내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믿음이라는 싹을 틔우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세속적인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존재로 조금씩 변화되어 가지요.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 기준을 버리고 내 소유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나’라는 자아까지 온전히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리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지요. 버리고 비운 자리를 하느님으로, 그분 뜻으로 채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과 시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오해와 미움, 손해와 희생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어느 순간 내 마음 속에 ‘신앙’이라는 아름드리 나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나무는 내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절망할 때 나에게 ‘희망’이라는 양분을 줄 것입니다. 내가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남들의 따가운 시선에 주눅들 때 나에게 ‘평화’라는 그늘을 드리워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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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0.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4 : 40 추가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26-34).”
1)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는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저절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지만, 이 세상은 ‘삼라만상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 섭리와 상관없이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전부 다’ 모르는 것은 아니고,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라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협력하라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는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창조 사업의 완성은 인간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특히 인간 구원 사업은,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협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 몸이 자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몸이 언제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모릅니다.
작은 어린이가 조금씩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나고 하면서 어른이 되는데, 그 과정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몸의 성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장’과 ‘신앙의 성장’도 그렇고, ‘전체 교회의 성장’도 그렇습니다.
그 ‘성장’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1-14ㄱ.15-16).”
<신앙인답게 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각 개인의 성장은 곧 교회의 성장이고, 하느님 나라의 성장입니다.>
3)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읽을 때 겨자씨가 작다는 것과 겨자나무가 크다는 것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라는 가르침이고,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예로 삼으신 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인용되어 있는 예언이 연상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6).”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베들레헴은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이지만,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고을’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씨앗만 보지 말고 나무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짧은 기도 한 번이라도, 작은 선행 한 가지라도,
모두 위대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주춧돌’만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작은 벽돌 하나, 하나도 모두 중요하고 위대합니다(에페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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