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天路)를 걷는 삶(9/29)
-동굴과 같은 생(生)-
인생이란 깊숙한 동굴과도 같다라고 흔히들 말을 한다. 그만큼 인생이란 앞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어두움과 두려움의 나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캄캄한 동굴은 서 있어도 무섭고 그렇다 해서 걷기에도 두렵다. 왜냐하면 도저히 종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올까 무서우며 앞의 한 발짝씩 걸음걸이도 보이지 않기에 두렵다.
이와같이 동굴은 사방과 아래위 모든 곳이 ‘나’를 꼼짝달싹할 수 없게끔 감싼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심해’라는 잔소리를 듣고 먹으며 산다. 생의 모든 순간마다 ‘나’라는 존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두려움과 무서움이기에 그런 것 같다.
많은 학문을 배우고 많은 경험의 경륜이 있음에도 인생은, 여전히 모른다며 깜깜한 동굴과도 같은 마음을 대부분의 인생들은 고백한다. 자신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아무리 높은 것을 쌓았다 할지라도 두려움과 무서움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동굴 속의 ‘나’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한 줄기 빛이다.
생의 어두움에서 빛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어쩌면 인생은 ‘나’라는 존재가 빛을 찾아 떠나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생의 어두움을 비춰주고 앞을 볼 수 있도록 해주며 참 기쁨을 주는 것 말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하며 또한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라고 고백하며 찬송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자 모형적이며 예표의 옛 언약의 시작을 빛으로부터 펼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그리고 때가 되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라고 증거한다.
사람들이 빛을 찾고서 가고자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영원한 평안과 안식의 나라’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은, 빛이 세상에 오셨으며 ‘나’를 찾아 오셨는데도 어둠을 더욱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둠은 인간의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두움으로 인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알면서도 어둠을 좋아하는, 이해될 수 없는 모습을 인간이 더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지닌 죄 때문이다.
죄를 좋아하고 어둠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내가 지닌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죄의 댓가를 치르시고 죽기까지 하셨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부디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