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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엔 거짓이 없다
롬 12:9-21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9-21 / 여러분은 겉치레로 남을 사랑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10) 형제를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며 마음으로 존경하십시오. 11) 여러분이 맡은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계획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십시오. 환난 가운데서도 참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곤궁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고 만일 그들이 잘 곳이 없거든 집안에 재우십시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누가 여러분을 학대하더라도 저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15) 다른 사람이 행복해할 때 같이 기뻐하고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픔을 나누십시오. 16) 서로 한마음이 되어 즐겁게 일하십시오. 오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상류 사람들 사이에 끼여 들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과 즐겁게 사귀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ㄷ) 누가 보더라도 여러분이 정직하다고 인정할 수 있게 행동하십시오. (ㄷ. 70인역 잠3:4) 18)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ㄱ)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게 맡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ㄱ. 신32:35) 20) 오히려 ㄴ)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생각하고 부끄러워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ㄴ. 70인역 잠25:21-22) 21) 악이 기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선한 행실로 악을 정복하십시오.
기독교 윤리가 실천되는 주요 현장인 교회 안에서의 생활을 다룬 바울은 이제 그 범위를 사회로까지 넓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교회 안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성도가 산 제물로 드려지고, 영적 예배를 드릴 영역은 교회 안팎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윤리, 실천의 기초는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고(5:8), 십자가에서 나타나서 확증되었으며(5:8), 우리를 놓치지 않고 영원히 붙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윤리입니다. 이 사랑이 세상을 죄에서 건지고, 악을 이깁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9-13) 바울이 언급한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 사랑이 기독교 윤리의 시작입니다. 이 사랑이 거짓 없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분별, 우애와 형제 사랑, 존경, 열심, 인내, 기도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관대하는 손 대접의 삶으로 성도들을 이끕니다(히 13:1-2). 이 사랑에 이끌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고후 6:6; 8:8; 요일 3:18).
선으로 악을 이기라(14-21) 기독교 윤리의 실천 영역이 교회에서 사회로 넓어집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된 개인은 성도와 성도의 관계인 교회를 거쳐 이제 성도와 이웃의 관계인 사회로까지 확대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긴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에 가득한 이 사랑은 교회를 넘어 밖으로까지 흘러가야 합니다(9-16). 이 사랑이 흘러가야 할 목적지는 이웃입니다. 이 사랑은 관계가 불편한 이웃인 성도를 박해하는 사람들(14)과 원수(19-20)에게까지 흘러가야 합니다(잠 25:21; 마 5:5; 44; 눅 6:27, 35; 23:34; 벧전 3:9). 성도는 박해자들과 원수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하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자 영적 예배인 기독교 윤리는 상대 안에 있는 죄의 고발과 처벌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으면서 넘치고 있는 그 아가페 사랑의 풍성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완전한 선이십니다. 그래서 선의 승리와 악의 패배는 당연합니다. 악은 결코 이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성도는 이 믿음과 선으로써 악을 이겨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주변에 있는 악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고 있습니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십시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악과 타협하지 않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함을 악함으로 갚는 순간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 설 교 >
가슴에 불꽃이 타오르게 하십시오
로마서 12:9-11 / 문기태 목사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어떻게 하면 슈퍼스타를 키울 수 있나"를 알아보기 위해 스포츠, 과학, 예술 부문에서 뛰어나게 이름을 떨친 사람들 120명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답니다. 결과는 그들을 키운 대부분의 부모는 열성파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부모는 보통 부모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과 정성을 아이에게 쏟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문가는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열정은 힘이 있습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열정을 '불타는 열의 또는 관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템플턴은 "우리가 좋아하고 간절히 바라는 어떤 목표를 추진하도록 고무하는 활동적인 에너지"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열정은 전등을 밝히는 발전기와 같은 것으로 인간을 빛나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 에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험한 산도 비포장 도로도 넉넉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열정은 'entheos'인데, 'en'은 '함께'라는 의미이며, 'theos'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정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삶의 에너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열정을 닮아갑니다.
하나님도 열정이 가득하신 분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하나님은 시대마다 열정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열정의 사람을 통해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요단강을 건너게도 하며,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열정의 사람에게는 장애물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킨 바울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러분, 바울의 열정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과 복음에 열정을 쏟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열을 다해 생을 불태웠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준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데도, 가정 생활을 하는데도, 사업을 하는데도, 신앙 생활을 하는데도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집시다. 삶에 대한 열정, 사명에 대한 열정, 비전에 대한 열정,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집시다.
열정의 불을 우리 안에 지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9-10)
누군가를 사랑을 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해도 굉장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열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식으면 에너지도 사라집니다. 하나님도 열정적인 사랑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을 구원하시려는 열정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려는 열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라고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하면서 살면 행복하지만 사랑이 없는 차가운 마음을 안고 살면 불행합니다. 사랑하며 살면 인생이 아름답지만 사랑이 식어버리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왜 책망하셨습니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첫 사랑도 식을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 사랑이 잘 변하면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요? 에베소 교인들의 주님 사랑, 성도 사랑도 그렇게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지했던 그 따끈했던 사랑도 언제부터인가 식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사단의 계략으로 이단이 많이 발생하여 성도들을 현혹하자 서로가 의심의 눈으로,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하다가 보니 사랑이 식어지고 그러면서 열정도 사그러들었습니다.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린채 교회가 가진 생명력도 사라졌습니다.
그럼 어떻게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첫 사랑의 감정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은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가는 부부들에게 상담자들은 종종 추억 여행을 권합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 첫 키스를 나누었던 곳, 프로포즈를 했던 곳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여행을 통해서 그 첫 사랑의 감회를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감격을 맛보며 사랑을 표현했던 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사랑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감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통하던 그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스런 몸인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몸은 힘들어도 교인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기쁨입니다. 누가 시키지않아도 자원하여 더 많이 섬기고 싶어집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사랑하여 하루종일 업어주어도 즐겁습니다. 냄새나는 기저귀를 갈아주며 행복해합니다. 심지어 보채고 우는 아기를 달래주면서도 지겹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랑이 그 마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첫 사랑의 감격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사랑으로 가슴이 뛰는 성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으며 행복하고 감격으로 벅찬 가슴을 가진 성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서로 열심히 섬기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시간마다 주님께 사랑을 표현하며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2. 심령을 성령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11)
뉴욕 거리에 풍선장수가 있었습니다. 수소가스를 넣은 노란색, 파란색, 빨강색, 초록색풍선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흑인 소년이 와서 풍선장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까만 풍선도 다른 것들 처럼 저렇게 뜰 수 있을까요?" 풍선장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꼬마야! 풍선이 뜨는 것은 풍선의 색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풍선안에 들어 있는 것 때문이란다"
신앙도 외형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우리 안이 성령님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11절을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뜨겁습니까?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안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정적으로 살아가도록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공급해주십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열정적으로 전도합니다. 열정적으로 봉사합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열정적으로 찬양합니다. 반대로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누가 기도하는 것, 전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찬양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불평합니다. 방해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불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 이 세상의 병든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을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찬 사람을 찾습니다. 무관심, 물질주의, 냉혹함, 그리고 이기주의가 편만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그리스도인의 불타는 마음입니다. 불타는 마음의 전도자 요한 웨슬리에게 동료 사역자가 어떻게 청중을 모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도자가 불탄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불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웨슬리의 제자 아담 클라크의 묘비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다가 나는 타서 없어졌노라"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교회에 한 병든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좁아 소녀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교사가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렴. 지금은 너를 받아줄 수가 없구나"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교회에 가지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베개 밑에서 목사에게 보내는 짧은유서와 동전 57센트가 나왔습니다. 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도 교회에 가고 싶었어요. 제가 모은 이 돈으로 교회를 좀 넓게 지어주세요" 목사는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유서를 읽어주었습니다. 소녀의 유언에 사람들의 마음이 불 붙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금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템플교회는 크게 증축되었고 남은 돈으로 `선한 사마리아병원'과 미국의 명문인 템플대학이 설립됐습니다. 작은 불꽃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무서운 불길을 만든 것입니다. 아주 어리고 가난하며 병든 소녀의 가슴에 타오르던 작은 불씨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으로 옮겨갔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도 열정의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어떤 큰 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작은 불씨만 남아있다면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은 작은 불씨가 됩시다.
여러분, 우리 모두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화됩시다.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피고 서로 섬기는 일에 열심을 품읍시다. 심령에 성령의 불을 지피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깁시다. 특히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아갑시다. 여러분 모두 마음에 사랑의 불, 성령의 불이 붙어 세상을 거룩한 에너지로 충만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삶
로마서 12:9-11 / 박상훈 목사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지혜로운 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옷을 무릎까지 걷어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첨벙첨벙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강바닥을 더듬었습니다.
잠시 뒤 강가로 다시 올라온 그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조약돌 하나가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조약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돌을 깨뜨린다면 이 돌 속이 젖어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라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말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방금 강에서 끄집어내었으니까, 또 강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 속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깨뜨렸습니다. 물론 그 속은 하얗게 말라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여지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돌처럼 겉만 젖어있고 속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조약돌에서 물을 짜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결코 사랑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으로 하는 친절이나 선행은 기껏해야 외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마음으로부터 먼저 우러나와야 합니다.
아울러서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은 것이로되 우리 마음속에만 갇혀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사랑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일3:18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으로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서 같은 맥락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은사는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은사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 다음에 사랑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전12장에서 각양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전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왜 은사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겠습니까? 은사를 활용할 때 그 바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다른 지체들을 섬길 때, 그 근본 정신은 반드시 사랑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 곧 형제의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이 사랑에 힘입어서 형제를 높여주고 존경해 주십시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욱 더 뜨거운 마음으로 충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사실부터 살펴보십시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서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오더니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의 인사와 입맞춤을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은 의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남녀간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실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박을 했습니다.
요즈음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 성도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근본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들은 예배드릴 때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나누는 에로스가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의로운 사랑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을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모아놓고서 마지막 작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위해서 한 장의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가다가 행여라도 연합군에게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그동안의 일을 소상하게 다 기록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에 일일이 서명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쉰들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이에 씌운 금을 빼내서 하나의 기념 반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기념반지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고서 쉰들러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살렸습니다. 당신 덕분에 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쉰들러가 오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했습니다. 이 차, 이 차가 무엇이라고 붙들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차로도 얼마든지 열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금핀,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두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가 일천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그는 술꾼이었습니다. 호색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자기 유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안과 밖, 속과 겉, 이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겸비해야 합니다. 사랑은 안으로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안으로는 우애입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우애는 친구 사이의 단순한 우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뜻은 혈연, 곧 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들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 의식이 분명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눅18장을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세리가 죄인이고 바리새인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형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리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고 하는 형제 의식 곧 우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이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눈이 아무리 밝게 잘 본다 할지라도 눈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귀가 아무리 잘 듣는다고 할지라도 귀로 냄새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에 맡겨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입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붐비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기 시작했습니다. 썰렁해졌습니다.
깊이 고민하던 수도원 원장은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자기의 옛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더니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 수도원이 침체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스승님!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습니까? 간음죄를 저질렀습니까? 도적질을 했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메시야가 변장한 모습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분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무지의 죄 때문에 수도원은 침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 말을 듣고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놓고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차츰 차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때부터 사랑과 존경의 모습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 수도원은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사랑과 존경이 없을 때 메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를 대하는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때,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와 같은 형제의식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의 마음에 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를 더 높여 주고 존경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경상도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워낙 시골교회라서 목사님이 안 계셨습니다. 어떤 나이 드신 조사님 한 분이 그 교회를 맡아서 수고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호롱불을 켜 들고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조사님은 성경을 펴서 구약성경 시23:1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본시는 그렇게 읽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호롱불 밑이라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글씨도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래서 그 조사님은 시23:1의 말씀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잘못 읽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그렇게 읽고 나니까 너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사님은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르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그날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두요! 나두요!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가 단시간 내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열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불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열심을 품은 사랑이요, 불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 노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 왕에게 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신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찾아갔습니다. 왕은 안타까운 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게 충성을 다했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게나. 내가 다 들어주겠네."
그러자 그 신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처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단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제 목숨을 좀 연장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은 안타까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내가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임에는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 일만큼은 내가 할 수 없네. 그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폐하,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왕을 섬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하늘의 왕을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소홀했습니다. 이제 곧 제가 하늘의 왕 앞에 서야 하는데 면목이 없어서 떨리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버는 일에는 그동안 열심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과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7-8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수고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다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섬기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상급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전과 열정이 이끌어 가는 교회
롬 12:9-13 / 서화평 목사
하나님의 사람은 열정과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이 분명하기에 열심도 있습니다. 신앙의 목표가 불확실하면 결코 열심도 낼 수 없습니다. 뜨거운 믿음, 뜨거운 신앙이 필요합니다. 2002년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는 열심 품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확실한 비전 붙잡고 좀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열정적인 신앙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미지근한 사람은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십니다. 올해는 좀더 열심을 냅시다. 선한 일에 열심 냅시다. 복 받을 만한 일에 열심을 냅시다.
사회 생활도 열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열심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렘29:13절을 보세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사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열정이 이끌어 가는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비전과 열정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해야 합니다.
9-10절을 보면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서로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아주 가까운 분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기 전에 형제부터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잘 보십니다. 시133편 1,3절에서 다윗 왕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연합의 근거와 힘은 곧 사랑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먹을 음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생활, 열심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성도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 있는 가정은 열심히 사는 가정입니다. 긍정적인 가정은 열심이 솟아납니다. 열심 있는 가정은 행복을 창조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굶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2020년에는 좀더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합니다. 열심 있는 가정은 분명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왕 믿을 바엔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제오'인데 이 말은 '성령'이라는 뜻의 '프뉴마'와 '물이 끓듯 열정적이다'는 뜻의 '제오'가 합쳐진 말로,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열심'이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도, 기도도, 봉사도,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고,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후 3장 10절 말씀에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48장 10절 말씀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잠언 10장 4절 말씀에도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손이 일하는 대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열심'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됩니다. 처음 믿을 때는 열심히 믿다가도, 1년, 3년, 5년, 10년 지나면 뜨뜻미지근하게 적당히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점점 열심으로 더 뜨겁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섬긴다'는 것은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깁니다.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숨 바쳐서 충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출23:25절 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의 열쇠는 바로 '열심' 속에 있습니다. 가정생활, 직장 생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남보다 앞서서 보람된 삶을 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열심'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가운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살아있는 자기 무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무덤 속에 사는 사람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성공과 축복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3.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물론 열심히 주를 섬겨도 고난과 어려움이 옵니다. 비전 있는 사람은 이럴 때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백만장자 4천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 분석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한 결과, 몇 가지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첫째,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 둘째, 마음에 꿈을 가져라. 셋째,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표, 즉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주시는 복을 누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 조금씩 해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매일 퇴근 시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집으로 간다. 시간만 있으면 성전에 들어와 기도의 제목을 찾아 기도한다. 교회의 필요한 일을 올해부터는 내가 먼저 한다.'이런 것들이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 병 치료에 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표했습니다. 하이슬루프 박사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치료법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바로 '기도'다" 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말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도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신경과민을 조절해 줍니다. 그래서 언제나 환자가 올 때마다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기도하시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열심만 있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열심을 마귀는 가장 무서워합니다. 인간의 힘과 생각만으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을 내어놓고 기도하게 될 때 비전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2002년에 큰 꿈을 가지십시오. 귀한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가지십시오. 어떤 환난이 와도 참으며 기도에 열심을 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4.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13절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늘 누구에게 행동을 하라고 말씀합니까? 성도에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시간이나 가진 것을 남에게 주려고 할 때, 인정받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줄줄 모르는 사람은 번영하기 어렵습니다. 주는 사람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줄 줄 모르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주시기 바랍니다. 손 대접하기 힘쓰시길 바랍니다. 남에게 주려고 하는 사람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서로에게 대접하는 것을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또한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도와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02년에는 좀더 열심을 냅시다. 말씀을 붙잡고 열심 품고 주를 섬기는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좀더 열심을 냅시다. 선교하는 일에도 좀더 열심을 품읍시다. 봉사하는 일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섭시다. 우리의 삶이 선한 일에 열심을 품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생활지침
로마서 12:9-13 / 민병석 목사
바울은 12장 초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생활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생활”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교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체로서의 은사적인 직분을 잘 감당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9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것을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적인 생활 면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랑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사랑으로 출발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에?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간에 연결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지체로서의 은사적 직분이 있지만 그 모든 직분 위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가 덮여져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 이는 온존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골3:14).
(2)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하게 공급되는 은사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4:10,11).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2. 사랑의 본질
바울이 9절에서 지적한 말씀에서 사랑에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참 모습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 깊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처음 사랑의 출발과 마지막 사랑의 끝이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쏟다가 그 사랑이 얼마안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익이 따를 때는 사랑이 가고 손실이 있을 때는 사랑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높으면서도 깊고 그리고 일직선으로 끝없이 이어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랑을 행하므로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으로 사랑이란 말로 불려질 가치조차 없는 사랑입니다.
(2) 다음에 사람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일에 적용될 수 도 없고 활동할 수 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사랑을 쏟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에나, 불의한 일,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에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악과 병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악한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악이 들어가 있는 모든 일에는 오직 흑암의 권세만이 활개치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사랑이 개입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람은 선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한 일에 개입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서로 선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성도들이 마음을 함께 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곳에서 형제간의 참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랑의 세 가지 본질을 잘 알고 모든 일에 거짓을 버리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제에 대한 사람과 봉사의 방법
10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교회에서 형제들간에 이루어 나갈 사랑에 대한 권면입니다.
(1)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이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우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은 우애와 존경입니다. 우애란 말은 친구간에 나타내는 최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제간의 사랑엔 존경이 필수적입니다. 존경이 없는 곳에 사랑이 설 곳이 없습니다. 존경의 반대말은 멸시와 천시가 됩니다. 멸시와 천시가 있는 곳에 사랑이 발 부철 곳이 없습니다. 형제들과 바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존경이 따르는 것입니다.
(2) 11절에서 봉사의 방법이 나옵니다. 첫째로 교회에서 봉사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교회에서 사랑의 봉사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음에 게으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게으름은 하나의 죄악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할 시간이 없어도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시험은 우리의 기도가 나태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항상 힘쓰는 일은 모든 일에 우선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형제들에게 필요한 일을 내가 채워준다는 일은 보람있는 일입니다. 성도들간의 사랑의 교통은 이런 곳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오는 형제를 후히 잘 대접하는 일은 진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했습니다(히13:2).
결 론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각 지체마다 조화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일 이상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랑을 따라 여러분의 지체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지체로서의 사명을 이루실 것입니다.
영적 예배로서 교회 봉사의 원리, 자세
로마서 12:9-13 / 지태일 목사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신장 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답니다. 진찰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만 목사님께서 살수가 있고 계속해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누가 목사님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하는가?'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다른 교회의 목사님이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 신장 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 한 후, 고통받는 주의 종을 위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 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명이 거의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야 이런 성도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러나 신장은 한사람의 것이면 되기 때문에 목사님께서는 모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어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신장 기증자로 결정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조용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오리 털이 가까이 가는 곳에서 갑자기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리털이 한 곳에 내리려고 하면, 그 곳에 있던 성도들이 하늘을 보고 큰소리로 "주여, 할렐루야, 아멘" 하며 외치는 바람에, 오리 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다른 곳으로 날아간 오리털이 한 곳에 내리려고 하면, 전과 마찬가지로 "주여, 할렐루야, 아멘" 하며 외치는 바람에,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 오리털은 어느 누구의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누가 웃으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잘 모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입을 때도 무슨 일을 해도, '이 일을 주님이 기뻐하실까?'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믿음의 사람은 삶의 초점이 자기 자신이 아닌, 주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밤샘을 해서라도 하는 사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결단하는 사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나의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목숨이라도 걸고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이요, 거룩한 산 제사의 삶이요, 구원받은 우리가 또 드려야 할 예배, 즉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세 가지를 또 다시 강조합니다.
첫째, 내가 먼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 받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쓸 수 없습니다.
둘째, 내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세속을 좇아사는 구태연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셋째,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사와 직임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러면 내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부터 하여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교회입니까? 무슨 자선 단체나 구호 기관 같은 곳은 안됩니까? 물론 그곳도 됩니다. 교회밖에서는 안됩니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회에서의 봉사한다든가, 국가에 대한 봉사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에서의 봉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봉사는 교회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섬기는 삶은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인, 형제를 먼저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웃, 나라, 온 세상에 나가 섬겨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교회 안에서의 봉사는 교회 밖의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성도님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많은 사람이 주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했습니다. 아멘입니까?
비록 성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환경도 조건도 다르고 부르는 직분 호칭도 다 다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지체들이, 다양한 은사를 따라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있기에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없다면, 즉 교인이 없다면 교회가 있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달린 수많은 가지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한 나무에 달린 여러 개의 가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성도들은 모두 한 몸, 한 지체입니다.(찬송/ 사랑하는 주님앞에 형제자매 한 자리에...)
그러므로 교회를 잘 섬기면 결국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사대로 겸손하게 성도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특별히 섬김을 위해 주님의 몸된 성도들은 건강해야 합니다. 사람은 몸이 아프거나 병들면 또 너무 피곤하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있고 재능이 많아도 몸이 아프면 힘도 안나고 의욕도 상실되고 아무리 좋은 일을 맡겨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이 아프고 힘이 없을 때 괴로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습니다. 그리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만일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그것으로 인해 활동하는데 큰 지장을 받습니다. 직장이나 사업도 계속 못할뿐더러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에 해당하는 성도 역시 약하거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병이 들게 됩니다. 우리 몸이 병에 걸리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병이 들면 교회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 한 분, 한 분이 건강해야 합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 바람니다.
특별히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봉사를 하여야 합니다. 봉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내 신앙이 병들게 됩니다. 내가 병들면, 지체가 병들면 교회도 따라서 병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봉사를 잘 해야 교회가 건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작아도 건강하면야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이가 건강하면 잘 자라듯이 교회도 건강하면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지체로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면 믿음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힘이 생깁니다.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하는 맛이 생깁니다.
“나의 신앙 생활은 왜 이렇게 보링(boiling) 끓는, 격심한, 분쟁적)한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내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봉사를 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봉사하시어 믿음도 자라고 신앙 생활의 기쁨과 재미를 찾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람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봉사할 때 명심해야 할 원리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봉사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12가지가 나옵니다. 이 열 두 가지는 바로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인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기 위한 중요한 자세원리입니다.
첫째로. 이 원리들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남이 나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남에게 다 해주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서로 먼저 하라는 것은 내 차례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또 11절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서도 누가 해야 합니까? 내가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13절의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도 역시 내가 해야 합니다. 남이 해 주는 것을 기다리면 안됩니다. 그저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봉사할 일이 눈에 보이면 그것은 내가 하라는 성령의 지시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할 때까지, 아니면 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면 성령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데 있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내가 먼저 하는 것이 교회 봉사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무시하면 벗어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먼저' 하시기 바람니다. 우리들은 "네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사과를 하면 나도 너를 용서할 수 있지"하는 조건적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나를 미워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찬양 326장/ 네가 먼저 손내밀지 못했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했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했고 이렇게 머믓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
여러분!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와 만족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의 봉사가 되지 않습니다. 유익을 주지 못하고 교회가 어려움 속에 빠져 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두 번째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9-10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말이 3번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할 때 사랑으로 행해야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으로 봉사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서울 구치소에서 근무했던 박효진장로님 하늘가는 사형수 신앙간증을 보았습니다만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긴 세월 동안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가슴도 마음도 사랑으로 녹일 수 있습니다. 사흘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밥 한톨 먹지 않으며 자신의 이마를 쇠창살에 부딪히며 발광을 하던 어떤 흉악범도 눈물의 사랑앞에 변하잖습니까? 여러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며“라는 말이 뒤 따라 나옵니다. 즉 봉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서로 우애합니다. 서로 존경합니다.
고전 13장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아무리 많은 봉사, 아무리 큰 섬김, 아무리 위대한 희생을 할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 깔리지 않은 것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사랑이 없는 섬김, 사람이 없는 희생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이면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는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봉사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주께 하듯이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봉사하는 사람이 악한 마음을 품고 해 보십시오. 제대로 되겠습니까? 마음에 악을 가지고 형제나 자매를 섬겨 보십시오. 온전히 섬길 수가 있습니까? 또 선한 마음이 없이 해 보십시오. 온전한 봉사가 되겠습니까? “그래, 너는 밉지만 해줄 터이니 잔소리 말고 받아라” 하며 마치 거지에게 하듯이 하는 봉사나 섬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봉사할 때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봉사의 의미입니다.
셋째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부지런해야 하고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열심"이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제오"인데 이 말은 "성령"이라는 뜻의 "프뉴마"와 "물이 끓듯 열정적이다"는 뜻의 "제오"가 합쳐진 말로, “끓는 심령‘ 또는 ”뜨거운 가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이 끓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이 끓으면 가만이 있지 않고 막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이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기도생활도, 교회봉사도,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하고, 열정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이 분명하기에 열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목표가 불확실 하면 결코 열심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은 열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열정이 없는 것, 싫어 하심니다. 요즘같이 무더운 날씨에 제일 맛없는 음식은 미지근한 음식입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3:15-16절은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열심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담겨 있지 않는 찬송, 열심이 없이 하는 기도, 열심 없는 봉사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왕 하려면 열심을 내어 하라는 것입니다. 이왕 믿을 바엔 열심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렘29:13절을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합니다.
예레미야48:10 말씀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잠언10:4 말씀에도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손이 일하는 대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열심'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됩니다. 처음 믿을 때는 열심히 믿다가도, 1년, 3년, 5년, 10년 지나면 뜨뜻미지근하게 적당히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점점 열심으로 더 뜨겁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섬긴다'는 것은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깁니다.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숨 바쳐서 충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출23:25절 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섬기는 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하는 자들에게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중에 병을 제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의 열쇠는 바로 '열심' 속에 있습니다. 정체되지 않는 열심속에 있습니다. 가정생활, 직장 생활,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남보다 앞서서 보람된 삶을 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열심'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가운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살아있는 자기 무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무덤 속에 사는 사람이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성공과 축복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는 귀한 삶이 되시기 바람니다.
넷째로, 힘들고 어려워도 참으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어려워도 봉사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소망중에 즐거워 하라고 합니까? 현실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제대로 안 먹고, 쓸 것 제대로 안 쓰고, 할 것 제대로 못하고 봉사하니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꼭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받을 상급을 생각하니 다시 힘이 생깁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어려움이 어려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릅니다. 오히려 교회 봉사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다음으로 왜 환난중에 참으라고 합니까? 지금은 옛날처럼 예수 믿기 때문에 환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을 꼭 그런 환난과 같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환난은 분명히 있습니다. 옛날처럼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환난을 없습니다만 정신적 환난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봉사하다가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따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현대 교인들이 봉사하다가 받는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이 닥쳐 왔을 때 그것을 받아치면 안됩니다. 참아야 합니다. 욕을 먹었다고 해서, 괴로움을 당했다고 해서, 따돌림을 받았다고 해서,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오해를 받았다고 해서 한 바탕 붙으면 안됩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못참겠다고 해서 한번 하면 지금까지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한 마디 변명이나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인들, 바리새인인이나 유대인들과, 아니면 권력을 가진 로마군대와 논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봉사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다른 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억울한 것, 오해 받은 것, 비난 당한 것, 욕을 먹은 것, 괴로움을 겪을 것 모두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해 주십니다. 하나는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다시 힘을 주시어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한 사람을 징계하시던가 회개하게 하십니다.
시편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시편을 쓴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억울함이나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해결을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어야만 제대로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 하다가 어려움이 오면 당사자와 맞붙지 말고 기도로 문제를 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온통 자살 파문입니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자살은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가져왔고, 생활고를 비관한 30대 주부, 아들의 자살을 비관한 아버지가 자살, 성적을 비관한 청소년■ 남녀노소, 빈귀고하를 막론하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탄식과 경악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물론 열심히 주를 섬겨도 고난과 어려움이 옵니다. 그래서 육신은 피곤할 수 있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피곤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 안든 사람 어디 있습니까? 지치고 상한 사람이 한 둘입니까? 생명까지 끊고 모든 것을 끊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 한 둘입니까?
TV에 비쳐진 뉴스입니다만 어느 노숙자는 지금 일주일째 먹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고싶다고 울먹이면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죽을 일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릅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10만명당 약 26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난 한해 자살자는 총 1만3055명으로 하루 평균 36명이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회장이라고 어려움이 왜 없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는 동정 이해가 갑니다. 그는 더욱 어려웠겠지요. 대북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금전적으로는 상당히 손실을 봤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있는 집까지 담보 잡혔고, 구형을 앞둔 재판중이었고 몇일 동안 검찰에 불려가 12시간씩 심문을 받다보니 찹찹한 그 심정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몽헌 회장의 자살 사건을 놓고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사람도 많고 장차 대북 경협사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햇볕정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정회장을 대북정책 압박의 희생자인 것처럼 몰아가려고 할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회장의 죽음이 무리한 대북정책의 결과라고 주장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살까지도 미화하는 어지러운 형편에 있습니다. 잘 이야기들 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순수한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저런 경우는 자살도 정당화되고 미화되고 뜻있는 죽음으로 미화될까 심히 안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한 인간이 고뇌와 아픔을 감당할 수 없는 나머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이요, 생명주신 하나님을 향한 죄악이요,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이요, 우리가 형제를 지켜주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앞으로 살다 보면 속이 상하고 힘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얻어야지 절대로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이것을 회피하지 말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약의 욥기는 이러한 생명 존엄 사상을 보여줍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하루아침에 광풍으로 인해 그 자녀들을 잃습니다. 재산을 다 잃습니다. 이에 대하여 욥은 슬퍼하면서 오히려“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백만장자 4천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 분석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한 결과, 몇 가지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첫째,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
둘째, 마음에 꿈을 가져라.
셋째,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 사역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주시는 복을 누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 조금씩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소망중에 즐거워 하며 환란중에 참으라 한 것입니다.
영국의 하이슬루프라는 의학 박사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치료법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바로 기도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환자가 올 때마다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래서 항상 주님의 임재속에 성령의 어루만져주심을 체험하십시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열심만 있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열심을 마귀는 가장 무서워합니다. 인간의 힘과 생각만으로는 안됩니다.(찬송가/ 내 힘만 의지할 때에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내 생각을 내어놓고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신 원대한 비전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교인 수련회! 이번 기회에 기도합시다.
우리가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귀한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가지십시오.
어떤 환난이 와도 참으며 기도에 열심을 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비판하고 정죄한다고 사람이 변하고 일이 해결되는 것 아님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해야 사람이 변합니다. 기도할 때 내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사람이 변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비판하고 충고부터 하면 도리어 화를 내며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거야"라고 대꾸합니다.
여러분! 교회 내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충고할 시간에 먼저 기도해 주십시오.
그 전에 보면 교회내에 있는 중고등부 청년부들 가운데는 별난 아이들 별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좋아하거나 호기심으로 피우고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집사님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깜박 잊고 앞주머니에 담배갑을 그대로 넣고 교회왔다가 안녕하세요 하다가가 그만 담배갑을 떨어뜨린 사람, 교회에서는 못피우니까 주변 골목길에서 피우다가 교회 아이들에게 혹은 저에게 마주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양말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무심코 앉다가 들킨 사람,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다 입에서 냄새를 풍기니까 안씹던 은단껌, 은단을 먹고 오는 사람 많이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야 여기가 어딘데... 거룩한 성전에... 거룩한 몸을 그런 것으로 채우다니... 어느 교회에서는 신년 제직 명단에서 주초문제로 모두 제명시켜 교회가 엄청난 어려움에 빠진 교회도 보았습니다.
다구친다고 혼낸다고 제직 명단에서 뺀다고 겁내고 두려워 하고 끊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끊어지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담배가 맛있니? 비싼 것은 피우지 마라. 부모님이 주신 귀한 피같은 용돈 아껴야 하지 않겠니? 어려운 때에 비싼 것 피우지 말고, 싼 것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담배 개수 줄여라! 아니면 건강을 생각해서 끊어라. 담배피운다고 지옥가지는 않지만 건강에는 아주 안좋다는 것, 폐암 이야기(엇그제 뉴스에 일산암센타에서 발표한 내용중 90%이상이 폐암으로 사망하고 그중 30%가 바로 흡연으로 인한 폐암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담배가 유해한가를 보여 줍니다)“를 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한 마디 툭 던집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해 줄게. 건강을 위해 기도해 줄께, 너 혼자 힘으로는 담배를 끊지 못하니까 내기 기도해 줄게" 그러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야단맞을줄 알았는데... 교회에 알려서 망신줄줄 알았는데... 이해해주고 기도해준다니까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면 다음 주부터 그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현재 잘못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성숙하기를 바라며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지체들을 보면 비판하지 말고 참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기도는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기도는 사람을 성숙시킵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기도에 힘쓰는 것이 봉사의 자세입니다.
다섯번째로, 나누면서 봉사하라는 원리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누구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했습니까? 먼저는 성도들이라 했습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서 성도에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노예나 극빈자 계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 받는 자들이 주로 복음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자는 복음을 잘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살기에 부족한 것이 없으니 하나님이 별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물질이 많은 것이 오리려 화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가난하였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는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한 것입니다. 없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줄 안다고 부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습니다.
또 로마제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여행객이나 손님들도 많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로마에 오면 돈이 없어 여관에 들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로 가서 믿는 사람의 집에 신세를 졌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면 부지인 사람의 집에 가서 묵었습니다. 요즈음은 시대가 변해서 믿는다는 이유로 남의 집 신세를 지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또 쌀이나 생활 필수품 등은 나누어 쓰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성미라는 것이 아주 옛날 교회에는 가난한 성도와 목회자들에게 쌀을 주기 위해 거둔 것입니다. 요즘은 옛날같이 안하고 일부 하더라도 교회식사를 위해 성미를 합니다. 아름다운 제도가 거의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봉사의 원칙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성도와 나누어 쓰고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교인을 대접하는 것은 우리 성도님들이 하여야 할 일입니다. 눅6:31절에서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고 눅6: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42절에서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었을지라도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 로마서 15:26절에서는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되 더욱이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돕고 예수 믿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아름다운 봉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은 하나님의 행위록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힘써서 행할 때 교회 안에는 훈훈한 사랑의 정이 감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줄줄 모르는 사람은 번영하기 어렵습니다. 주는 사람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줄 줄 모르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손 대접하기 힘쓰시길 바랍니다. 실제로 우리는 서로에게 대접하는 것을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봉사는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봉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대로 직분대로 봉사를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찬송 375장/ 구주의 은혜 주시는대로 영원히 받들어 섬기겠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를 위하는 길이며 동시에 내 몸을 위하는 길입니다. 아주 봉사하기가 싫으시면 나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시기 바람니다. 봉사를 하면 교회와 성도들이 유익을 얻지만 나도 유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봉사하실 때마다 오늘 말씀하신 귀한 원리와 자세를 따라 하시기 바람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으며 그리고 서로서로 나누면서 열심히 하시기 바람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시는 봉사는 우리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온전한 봉사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기시는 귀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찬 513장/ 네가 맡은 일 성실히 행할 때에 주님앞에서 상받으리 주가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열정회복
로마서 12:9-13 / 조재호 목사
우리는 한 달 동안 ‘우리 공동체’라는 큰 주제로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속해 있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기관, 단체, 모임과는 그 출발부터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백을 받으신 후,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몇 평 땅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하늘 공동체입니다. 지옥과 죽음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이며,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사는 천국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세상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며, 맡겨진 사명 이루어 가기 위해 미래를 향하여 달려 나가는 성령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듣고 생명의 힘을 누리며, 은혜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붙잡아 주고 세워주며 축복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난의 강을 건너고 역경의 산을 넘으며 희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모범적인 공동체입니다. 더욱 그런 축복의 길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1장까지 믿은 바의 내용과 12-16장까지 믿은 바의 삶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은 백성으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핵심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0절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은 ‘소망을 잃지 말고 인내할 것이며 기도에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3절은 ‘같이 신앙생활하는 교우들의 어려움을 돌보고 남을 잘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11절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공동체의 열정회복’라는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시간이 오래 흘러가면 처음의 열심과 열정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순수한 열심과 내면의 신앙적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지고 습관과 자리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 방글라데시 다카에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에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 때, 선교사님의 터덜거리는 차가 어두운 길 사거리에서 멈춰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데리러 오기 전에 기아변속기 오일이 새서 고쳐오느라 조금 늦게 왔었습니다. ‘혹시 엔진오일에 샜나? 차 기름이 바닥이 났는가?’ 사실 이 차의 기름 게이지가 망가져서 기름이 탱크에 얼마나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차가 길 중앙에 멈추자, 사람들이 차 안을 가끔 들어다 봅니다. 선교사님은 택시를 콜라병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세, 네번 엔진 시동에도 안 걸렸습니다. ‘주님 엔진이 움직이게 해 주세요!’ 드디어 다섯 번째 걸리게 되었고, 멈춰 섰던 차가 움직이고 방향을 잘 잡아 목적지인 공항으로 무사히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 아무리 중요한 차라도 기름 탱크에 기름이 바닥나면 움직이던 차는 멈추어 서게 됩니다. 기름 탱크에 기름이 채워져 있어야 그 기름이 엔진을 돌리고 엔진은 바퀴를 돌리고 차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동차가 목적지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름이 충분하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열정과 열심은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교회에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질이 좋은 열정과 열심이 내면의 믿음 탱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11절 말씀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3무(無)의 사람입니다. 의욕, 책임의식,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는 것이 있는데, 무슨 이유가 있고 둘러 데는 핑계가 있고 남에게 떠넘기는 탓이 있습니다. 잠언 10장 4절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언 12장 24절은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신앙생활에 부요함을 얻지 못하며,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부지런한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을 놓쳐 버립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여 주신 사명과 공동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열정과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에머슨은 ‘열심 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믿음 생활의 여건이 오늘날 같이 좋지 못했습니다. 교회도 귀했고 교역자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여러 교회를 순회 설교하였습니다. 특히 성경도 많지 않았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남포) 밑에서 조사가 성경 읽고 설교하였지만 모두 아멘, 모두 감사, 감동하였습니다. 이 때는 모두가 열심히 믿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였습니다. 성경도 부족하고 교회도 목사도 부족하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설교를 듣고 어렵게 신앙생활해도 한 가지 넘쳐 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순수한 열심과 열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섬김과 교회 사랑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말씀 듣는 것과 기도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 12-13)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의 열심을 보고 그 열심을 가지고 열심을 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열심을 내십니다. 이사야 37장 31~32절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히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시온을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르신 하나님이 아니라 열심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향한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는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순수한 열심과 열정은 눈금으로 보여지지 않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적 삶에 필요한 열심과 열정을 측정해 주는 기계는 없기에 날마다 우리의 믿음의 열정의 돌아보고 체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나도 모르게 여러 해 지나다 보면 열심히 사라지고 변질되며 열정이 없어지고 힘을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순수한 열심과 신앙적 열정이 존재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며 교회에 헌신하는데 순수한 열심과 신앙적 열정이 남아 있나요? 우리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2020 비전을 품고 미래를 향해 나가기 위해 엔진 연료와 같은 순수한 열심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요구되는 것은 신앙적 열정의 회복입니다. 순수한 열심과 신앙적 열정이 엔진 연료와 같다. 공동체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믿음의 힘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스스로를 점검하고 열심과 열정의 불꽃을 사라지지 않게 하기를,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러 넣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