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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외부의 맹수나 적, 가혹한 자연환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벽이 어떻게 우리를 가두는 벽으로 작용하는가? 우리는 왜 그 속의 수인이 되는가?
그 벽이란 도시 등 공동체, 제도, 법률, 종교, 이데올로기 등이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통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우리는 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까?
저자 요로 다케시는 그 원인이 바로 우리의 뇌 때문이라고 말한다. 뇌 속에 상대방과의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바보의 벽’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통한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알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 버리는 구조적 특성이 있어서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으며, 말로는 서로 이해해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입력되어 있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이렇게 소통과 대화를 가로막고 정보를 차단하는 뇌의 작용을 저자는 ‘바보의 벽’이라고 부른다.
지구촌에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것도,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간에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는 것도 실은 이 ‘바보의 벽’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보의 벽’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저자는 ‘바보의 벽’을 뇌의 활동으로 설명한다. 뇌는 y=ax라는 일차방정식 모델을 통해 움직인다. 여기서 x는 뇌로의 입력, y는 출력이며, a는 ‘현실의 무게’라는 계수다. 어떤 사안에 관해 a가 0이면 아무리 정보가 입력되어도 그 사람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정반대로 어떤 사안에 관해 a가 무한대라면 그에 관한 정보나 신념이 그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로 작용한다. 일원론과 원리주의자가 생겨나는 이유다.
이렇게 계수 a에 따라 같은 정보(입력)라도 사람마다 다른 결과(출력)를 낳는다면 과연 우리가 믿는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배타적 원리주의와 비관용, 독선에 빠져 자신과 타자를 함께 괴롭히고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뇌 속에 있는 ‘바보의 벽’ 때문이며, 내 안의 ‘바보의 벽’을 깨고 교조적인 일원론을 극복하는 것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https://naver.me/Gdyc2Kib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p.17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늘 어설프게 알면서 자신이 그걸 안다고 생각했을 때가 위험한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 복잡다변한 세상에서 대부분의 모든 것을 우리는 딱 어설프게 아는 수준에 머무를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알고 있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늘 그 내부에서는 100퍼센트 진리이지만, 과학은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p.29
우리는 흔히 과학적인 것을 객관적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과학적 태도는 늘 반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상대적인 태도.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절대적 진리라고 외치는 것을 의심하고 조심하라고 이야기한다.
뇌는 그리 고차적이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계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p.41
<운명의 과학>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우리의 뇌는 무척이나 능률적이지만 무척이나 게으르다고...ㅎㅎ
인간의 의식이란 철저히 공통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공통성을 철저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언어의 논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뇌 가운데서도 특히 의식을 관장하는 부분은 개인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보다는 같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p.51
저자는 문명이란 인간이 공통성을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발달했으며(그건그래...같은 언어, 같은 국가, 같은 종교...) 따라서 '개성'을 발휘하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고한다. (지금도 그랬지만 그 당시 일본도 '창의성''개성'을 엄청 외치던 때였나보다..)
사람은 태어나길 다 다르게 태어나 자라므로(같은 사람은 없다...) '개성을 길러라'는 보다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신하지만 일리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 문제의 대부분은 개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부족, 나아가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태도의 결과물이 아닐까?
근육이건 위장이건, 우리 몸의 기관은 사용하지 않으면 쉬는 척하면서 서서히 퇴화해 버립니다. 당연히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해진 뇌를 유지할면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뇌가 반응하기에 적합한 외부의 자극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뇌는 자극을 자급자족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p.83
인간이 쓸데 없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 생각이 쓸 데 없는 건 아니라는 말...
더 좋은 건 적절한 자극을 주입해주는 거겠지만 그러면 뇌는 너무 피곤하겠지??
'자기 실현'이라는 말을 하는데, 자신이 뭔가를 실현하는 장은 외부에 존재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인생의 의미는 자신만의 완결이 아니라 늘 주변 사람,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장은 공동체뿐입니다.
p.111
책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재미있는 '억제'실험이 나온다.
근데 30년만에 그 억제능력이 4~5년이나 늦어졌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지 20년이 더 지났으니 더 심각해졌을 듯하다.
점점 전두엽기능이 저하되어 그렇다고 한다.
*편도체
- 선악판단
- 자동차 엑셀레이트
- 연쇄살인범의 경우 편도체 활성도가 높다고
*전두엽
- 참을성
- 자동차의 브레이크
- 충돌 살인의 경우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저자는 범죄자의 뇌를 조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그 시대에는 극악범의 경우 처벌하기에 급급해서 뇌조사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았던듯...지금도 그런지는..)
뇌의 차이점을 발견하여 거기에 맞춰 교육을 하자는 게 주장인데...좀 위험한 사고가 아닌가 싶다..
샐러리맨이란 월급을 주는 쪽에 충실한 사람이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p.159
'일하지 않고도 먹고산다'의 궁극적인 삶의 형태가 바로 홈리스라고 했습니다. 사회가 아직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홈리스가 나타나는 것인지,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는 상태가 건전한 사회의 모습인지, 그런 기본적인 의문을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향해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p.180
저자는 워크쉐어링의 예로 카스트제도를 들고 있는데(제도에 따르면 물건을 떨어뜨리는 사람 따로, 물건을 줍는 사람 따로다..)
저자도 물론 카스트제도를 부활시켜야한다는 그런 의미로 비유를 든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이 상태로 발전하면 언젠가는 워크셰어링에도 한계가 오지 않을까? 일단 육체노동에 있어 AI가 인간보다 낫다는 것 확실하고, 사법,교육 분야도 오히려 감정적이지 않은 AI가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건 감정노동, 돌봄 그리고 AI를 수리하는 전문기술자(어쩌면 이마저도 AI가 할지도..) 정도인데 워크셰어링을 하기에 너무 부족한 거 아닌가??
학자라는 존재는 인간이란 어디까지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가를 추구합니다. ...그 반대로 정치가는 인간이란 얼마나 바보인가를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대를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설교를 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
이처럼 학자와 정치가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가 정치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인간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182
맞는 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독약을 마시게 된 거겠지...그래서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했으나, 저자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이 세상은 보통 사람이 다수를 자치하고 있으므로...
바보의 벽이란 어떤 종류의 일원론에서 비롯합니다. 바보에게는 벽의 내부만이 세상의 전부라서 건너편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p.193
항상 열린 사고, 열린 마음,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잊지 말자.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 뭐라고? 오만...
그 시대를 생각해 보면 가장 알기 쉬운데, 원리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편해지고 싶으면 뇌 속의 계수를 고정시켜 두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계수 a를 고정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일원론입니다. 사고를 정지시켜버리면 그보다 더 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p.197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계수를 고정시켜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p.1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쪽에 있지않고(일원론에 갇혀 안주하는 사람들)
굳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을 해야하는 이유??
바로 절벽 위에 올라봐야 볼 수 있는,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https://naver.me/xjgDVNcw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소감 '벽과 알'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9년 2월 이스라엘의 최고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을 수상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에 대한 반발로 수상 거부까지 고민하다 선 자리에서 그 유명한 수상소감 '벽과 알'을 얘기합니다.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새겨두는 말이 있다. '혹시 여기에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나는 알의 편에 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더없이 소중한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시스템'이라는 벽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책무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121022414760212&outlink=1 기사에서 발췌
#"예술가는 상아탑 속에서 살며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투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생각에 한번도 동의한 적이 없다.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간의 의무로부터 그를 면제시켜 줄까. 오히려 예술가는 특별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한 감수성과 지각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첼로 연주를 가장 잘 했던 파블로 카잘스가 자신의 생애를 구술해 엮은 책 '나의 기쁨과 슬픔'에서 저 악명 높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목도하면서 느낀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https://naver.me/xgN2LQEf
우리는 우리가 뭔가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하기에는 그것은 너무 자명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을 가졌다거나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마음이란게 뭔지 살아있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더욱 작다. 절대적 무지가 절대적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무지의 벽이 세워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 벽을 세우고 그 벽들 안에 갇힌다.
첫댓글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645?svc=cafeapp 무라카미 하루키 회전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