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가을 탓
김 난 석
한사람을 불러내어 가을 길 따라 드라이브나 하려 했었다.
그 한사람이란 동료라 할지, 친구라 할지, 글벗이라 할지,
아니면 그냥 동아리회원이라 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그네라 해야겠다.
때때로 불러보면 응대해주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가벼운 사이인데
엊그제는 그네와 점심을 먹었던 음식점에 혼자 들어
다시 그 메뉴를 시켜놓고 문자를 보내봤다.
“맛있는 거 먹던 그 음식점에 들려 혼자 또 먹으려니 미안한걸!
하긴 오늘 이것보다 더 맛있는 거 먹을지도 모르지...”
응답이 이내 왔는데,
“어찌 내 생일을 다 아시나요? 감동이네요.” 하는 거였다.
그날이 그네의 생일이었던 모양이었다.
허나 그날이 그네의 생일임을 확신하고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니었다.
다만 그네의 아이디에 생일일 듯한 아라비아숫자가 조합되어 있기에
그 언저리에 대고 호의를 전했던 것만은 틀림없을 터였다.
내가 그네에게 보낸 문자의 말미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나는 팔이 아파 탁구를 못할 형편인데, 수요일에 어디 드라이브나 할까요?”
돌아온 반응은 친구들과 셋이 함께 나서도 되느냐는 거였다.
마음속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좋다고 응답했는데,
느낌이 딸기 맛이라기보단 조금 떫은 모과 맛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내 사과 맛으로 변했던 것 같다.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그네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 다시 문자를 보내봤다.
“집에 있는 맛있는 와인 한 병 가져와요. 오프너도요.”
생일은 지났다지만, 점심에 반주로 와인 한 잔 따라주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약속시각 10분 전에야 답신이 왔다.
“지금 버스로 가고 있는 중인데, 문자를 이제 봤네요...ㅎ”
이걸 어쩌나... 내가 준비할 수밖에...
그래서 국산 와인의 명품이라는 “재즈 아일랜드” 한 병을 챙겨 놨다.
약속한 그 시각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서니
문 앞에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네와 그네의 친구는 알겠는데, 키 훤칠한 사내는 누굴까...?
문을 열고 바짓가랑이를 쳐다보면서 어서들 타시라 했더니
사내가 하는 말이 “아이구, 난석님이 아니십니까?” 하는 거였다.
탁구장에서 가끔 눈 맞춤 한 사내였던 건데
알고 보니 그네의 친구인 B가 대동하고 온 거였다.
그네의 친구 B는 제천의 월악산 기슭에 사과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했다.
그래서 거길 가보자는 거였다.
두어 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다 국도로 들어서니
길 양편에 가을빛이 곱기도 했다.
청풍명월을 거치는 길이야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또 겨울로
명품의 계절풍경을 연출하는 곳이 아니던가.
이곳을 들고 나는 것만으로도 그네를 불러낸 의도는 다 이룬 셈이 될 테다.
해거름에 농막에 도착하니 흰둥이만 멍멍댈 뿐이었고
문 열고 들어서니 싸늘한 거실에 목을 축일 물도 없었다.
하여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와 약수터를 찾아보자 했다.
가뭄이라지만 산골 물은 제 홀로 잘도 흘러내려 목을 축일 수 있었다.
해는 하염없이 뉘엿 뉘엿~
더 어둡기 전에 밖에 나가 저녁을 먹고 오자 했다.
번듯한 농막에 여자가 둘이나 되는데
밖에 나가 매식을 하자니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쩌랴.
차를 몰아 한참 달리다보니 면소재지에 이르렀지만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곳이 중국집 하나와 순대국밥집이었는데,
이것이냐 저것이냐 입씨름하다가 순대국밥집에 들려 저녁을 때웠다.
이제 농막에 들어가 밤을 어떻게 보내자는 것일까...?
아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 소백산막걸리와 과자를 사들고 돌아왔다.
어둡고도 좁은 산길, 간신히 운전해 올라가려니 흰둥이만 멍멍댈 뿐이었다.
긴 여정의 운전을 하려면 이제 눈이 쉬 피로하고 눈물이 나오지 않아
갑자기 눈이 따끔거릴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이번에도 예와 다르지 않게 인공눈물을 휴대하고 갔다.
그걸 꺼내 보이며, 그네들에게 이게 무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으니, 그네들이 이걸 써본 일이 있었으랴.
그래서 웃으며 “뽕” 이야기를 꺼내고, 잠시 함께 웃어봤던 것이다.
만약 어둑한 밤에 남녀가, 그것도 이것저것 해볼 것 다 해본 남녀가,
그것도 오늘 내일 걱정할 일도 없는 남녀가,
그렇다고 교양으로 다듬어진 취미도 없는 남녀가,
아무도 없이 시간과 공간의 적막한 여유로 감싸인
남녀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하며 행복해할까...생각해보다가,
그래보다가 뽕을 생각해보고 말문을 열어봤던 것이다.
오늘 이 밤에 네 남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앉아
달콤한 와인 한 잔 씩 부어 들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도 기연이요
다시는 재연할 수도, 돌아오지도 않는 순간이니
무엇보다 여기에 존재하는 내 자신을 축복하자면서
말을 이어갔던 것이다.
농막의 밤은 소리 없이 지나갔다.
간간 흰둥이의 멍멍 소리만 적막을 깨뜨릴 뿐이었지만
꿈자리는 평온하지 않았으니, 그건 나도 잘 모를 일이었다.
... ... ... ...
아침 일찍 깨어나 농막 주변을 거니노라니
잔디밭에 가을국화가 제 홀로 피어 밤을 지샌 듯하고
정자도 제 홀로 밤을 견딘 듯하다.
그새 손을 알아차렸는지, 흰둥이도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산길을 따라 이 비알 저 비알 사과밭을 둘러보려니
사과들도 제 홀로 매달려 단물을 들이거나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네들이야 자든 말든 차를 몰고 읍내로 들어가니
그날이 바로 덕산 장날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전을 펼치느라 바쁜 모습들이 보였다.
마트에 들려 식자재를 샀다.
청결미 한 봉지에 양파 두 개, 대파 하나, 깻잎 두 개, 골뱅이통조림 하나,
김치 하나, 그리고 돼지목살 한 근을 사들고 돌아오니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자, 내가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네들이 놔둘 리 있으랴.
그래서 나는 깻잎만 씻어놓고 물러났는데
사내는 방청소 하느라 부산했다.
밥이 질어야 좋다느니 아니라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밥 지은 솜씨를 85점을 주고 입을 닫게 했다.
김치찌개가 싱겁느니 괜찮느니 또 말들이 많았는데
이게 도화선이 되어 소금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는 건 흰둥이 차지였으니, 그놈이야 무슨 푸념을 하랴.
돌아오는 길의 청풍문화단지 담장이넝쿨이 담장을 껴안은 채
햇볕에 알몸을 다 내놓고 제 홀로 즐기고 있었다.
가던 길의 B는 농막 옆에 원룸 하나 지어놓고 친구를 불러들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겠노라 하더니
오던 길의 그 B는 이것저것 처분하는 대로 섬으로 떠나겠다는 거였다.
일박이일의 돌발적인 외박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차 시동을 끄려고 뒷 트렁크 문을 여니
사과자루에서 삐져나온 햇사과들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누구와 무엇과 동반하며 뒹굴 거릴까.../ 지난날의 단상
최근에 들려오는 말로는
그네 남편이 중국에 가서 사업 한다면서 딴살림 차리고 살다가
사업이 망해 집에 돌아왔는데
나가라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들어붙어있다 한다.
그네의 친구 B는 치매에 걸려 농장도 내팽개치고 칩거하고 있다한다.
나도 별볼일 없이 집에서 혼자 나뒹굴지만
날이 아직 쌀쌀하니 집에 칩거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첫댓글 여행은 누구와 가느냐가
관건 이지요
낯선이도 낯설어 보이지가
않게 하는게
여행이죠
맞아요.
그런데 낯설어도 자꾸 다가가는게 좋아요.
난석 선배님 어제 역탐에서 만나뵈어
반가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십시오ㅡ ᆢ
네에 어제 수고 많았어요.
짱~^^
난석님의 일기장 속의
추억을 끄집어 내어
제가 몰래 훔쳐본 느낌
가슴 두근 거릴 만큼
스릴 넘치게 즐겼습니다
언제나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그런가요?
ㅎㅎ
동행한 일행 중에 프랑스 와인의 대명사 보르도에서
차로 1시간거리에 살고 있는 여인이 가져온
샤또 무똥까데 2001년산 2병 중
1병은 그날 밤 마시고 1병은 선물로 받아왔습니다.
멋지네요.^^
암튼 추억의 한 장면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네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