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판 / 김석윤
그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지문 위에 누이고
구부정한 등허리를 눌러 폈다.
구십 평생 굽은 삶이
비로소 반듯이 펴졌다.
첫댓글 아--할머니
저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90세까지 장수하기는 하셨지만두 분 다 허리가 ㄱ자로 굽으셨습니다.그때는 모두 집에서 생을 마감하셨고요.시골이라서 돌아가시는 장면을온 가족이 함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물론, 어린 저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내리는 비를 바라보며그때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캐나다 디카시 협회의 왕성한 활동에멀리서나마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타깁남(김석윤) 저는 할머니를 뵌 적이 없지요실향민 가족이지요얼떨결에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되었네요할머니라는 정다운 단어에 맞갖은 사람이 되어야할텐데요
@신금재 美思 뵙지 못한 할머니의 몫까지손주들에게 다 하시리라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ㅎㅎ부러움과 함께 축하드립니다.
돌아 가시자 비로소 허리가 편안해지셨군요.살아 생전에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시골 고향 마을그 시절에는 다들 힘든 농사일로 대부분의 어른들이 다들 허리가 굽으셨지요.마지막까지 일을 놓지 못하고생을 마감한 다음에야 편히 누워 쉴 수 있었지요.어떻게 보면현대인의 삶도 다소 나아졌다고 하나죽은 날까지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기는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칠성판참 생소하게 다가옵니다삶을 내려놓으시고 나서야허리 쭉펴진 할머니편해지셧겠지요
지금의 장례 절차에서는보기 힘든 칠성판이기도 합니다.그래도 사는 동안 짊어진 무게로등 굽은 망자를 반듯하게 염하는 것은 같더군요.
할머니가 떠나신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아직까지도 저렇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계셨구나!모처럼 당신과의 추억을 떠올리며이 손자는 눈시울을 붉힙니다.
지금도 한옥의 부엌(정지)문이나저런 나무대문을 보면옛날 생각이 나곤 합니다.그 문턱 너머에서 남모르게눈물을 훔치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하고요.공감 고맙습니다.
생을 놓고서야 허리를 펼 수 있다니 마음이 찡...합니다.이제서라도 편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디카시를 쓰면서부터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어떤 사물과 대상을 만나면투영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저 대문도 그러했습니다.
칠성판 소환해주셔서 다시 한번 생각 합니다 객지에서 한평생인 저희는 오래된 죽음 문화에 익숙하지 않지만 환기가 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현재는 잊혀진 명사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등에 칠성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ㄱ자로 꼬부라진 등을돌아가신 후에야 곧게 펴고 가신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팔순 중반이 되신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허리도그때서야 반듯이 펼 수 있으시겠구나,생각만해도 울컥 눈물납니다ㅜㅜ
입에 올리고 싶지 않는 주제이지만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서피하고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연로한 아버님이 계신다니더욱 깊이 읽으신 듯합니다.다음에는 ㅎㅎ하실 수 있는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손에게 命과 福 주십사고 손이 닳도록 구부린 허리, 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반갑습니다.그런데, 어째! 상갓집에서 뵌 듯한 분위기입니다. ㅎㅎ신새벽 장독대에 비손하던 모습과 함께지금의 후손들 건강과 안위가 그분들의기도 덕분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고맙습니다.
@타깁남(김석윤) 그냥 저의 고향집 할머님의 일상이 떠올라서 그랬는데 좋은 글에 그런 느낌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命福과 冥福은 엄연히 다르지요. 그래서 한자를 넣었습니다^^
@김미형 또 한번 말과 글이 온전히 화자의 뜻을 전달하는데 얼마나 부족한 수단인지를 실감합니다. 선생님의 댓글에 제가 '상갓집'이라 표현한 것은서로 처음 뵈어 무지 반갑기는 하지만마침 시의 내용이 밝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서(마치 상갓집에서 뵌 것처럼)과도한 웃음과 리엑션으로 반길 수 없다는 뜻으로유머랍시고 그런 비유를 쓴 것입니다.선생님이 말씀하신 명과 복을 두고상갓집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그러니 선생님께서 죄송해야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먹먹해서몇 번이나 돌아섰어요.우리 할머니도 아흔에 떠나셨어요.가장 덥던 날 뉴스에선 아스팔트에 계란프라이를 하고 김일성의 죽음을알리느라 시끄럽던 그해 여름.그때 당시에,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지요... 더 그리 크게 울 일은없을 것처럼요.
그냥 가시지!이리 다시 오셔서저까지 더 울컥하게 하시네요. ㅠㅠ제가 제일 크게 많이 운 적은아버지를 언 땅에 묻고그 깊고 붉은 상처에 흙 몇 줌 얹고고작 뗏장을 덮어 드리고 집에 와 따뜻한 방에서"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기에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알을 넘길 때였습니다.
칠성판이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우리 아버진 오십 중반에 돌아가셨지요너무 황망해서 슬픔도 제대로 못 느꼈습니다...
아버님을 일찍 여의셨군요.저희 어머니도 오십 후반에 돌아가셨는데...옛날 시골에서는정식 칠성판이 아닌 나무문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문득 그런 것들이 떠올라 써 본 것입니다.
지인이 한 일이 생각났습니다.지인도 시어머니를 집에서 보냈는데누워서만 지내시던 시어머니 한 쪽 다리가 굽었는데돌아가시자 다리 펴드렸다는 애기를..
살아생전에 굽고 꺾인 삶이니죽어서 만이라도 반듯하게 뉘여편히 쉬도록 하고픈 마음이겠죠.오랜만에 뵈습니다.고맙습니다.
첫댓글 아--할머니
저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90세까지 장수하기는 하셨지만
두 분 다 허리가 ㄱ자로 굽으셨습니다.
그때는 모두 집에서 생을 마감하셨고요.
시골이라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온 가족이 함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린 저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때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캐나다 디카시 협회의 왕성한 활동에
멀리서나마 격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타깁남(김석윤) 저는 할머니를 뵌 적이 없지요
실향민 가족이지요
얼떨결에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되었네요
할머니라는 정다운 단어에 맞갖은 사람이 되어야할텐데요
@신금재 美思 뵙지 못한 할머니의 몫까지
손주들에게 다 하시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ㅎㅎ
부러움과 함께 축하드립니다.
돌아 가시자 비로소 허리가 편안해지셨군요.
살아 생전에 얼마나 힘겨웠을까요.
시골 고향 마을
그 시절에는 다들 힘든 농사일로
대부분의 어른들이 다들 허리가 굽으셨지요.
마지막까지 일을 놓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다음에야 편히 누워 쉴 수 있었지요.
어떻게 보면
현대인의 삶도 다소 나아졌다고 하나
죽은 날까지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칠성판
참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삶을 내려놓으시고 나서야
허리 쭉펴진 할머니
편해지셧겠지요
지금의 장례 절차에서는
보기 힘든 칠성판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사는 동안 짊어진 무게로
등 굽은 망자를 반듯하게 염하는 것은 같더군요.
할머니가 떠나신 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까지도 저렇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계셨구나!
모처럼 당신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손자는 눈시울을 붉힙니다.
지금도 한옥의 부엌(정지)문이나
저런 나무대문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 문턱 너머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훔치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공감 고맙습니다.
생을 놓고서야 허리를 펼 수 있다니 마음이 찡...합니다.이제서라도 편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디카시를 쓰면서부터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
어떤 사물과 대상을 만나면
투영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저 대문도 그러했습니다.
칠성판 소환해주셔서 다시 한번 생각 합니다
객지에서 한평생인 저희는
오래된 죽음 문화에 익숙하지 않지만
환기가 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현재는 잊혀진 명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등에 칠성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ㄱ자로 꼬부라진 등을
돌아가신 후에야 곧게 펴고 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팔순 중반이 되신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허리도
그때서야 반듯이 펼 수 있으시겠구나,
생각만해도 울컥 눈물납니다ㅜㅜ
입에 올리고 싶지 않는 주제이지만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서
피하고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로한 아버님이 계신다니
더욱 깊이 읽으신 듯합니다.
다음에는 ㅎㅎ
하실 수 있는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손에게 命과 福 주십사고 손이 닳도록 구부린 허리, 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째! 상갓집에서 뵌 듯한 분위기입니다. ㅎㅎ
신새벽 장독대에 비손하던 모습과 함께
지금의 후손들 건강과 안위가 그분들의
기도 덕분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타깁남(김석윤) 그냥 저의 고향집 할머님의 일상이 떠올라서 그랬는데 좋은 글에 그런 느낌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命福과 冥福은 엄연히 다르지요. 그래서 한자를 넣었습니다^^
@김미형 또 한번 말과 글이 온전히 화자의 뜻을 전달하는데
얼마나 부족한 수단인지를 실감합니다.
선생님의 댓글에 제가 '상갓집'이라 표현한 것은
서로 처음 뵈어 무지 반갑기는 하지만
마침 시의 내용이 밝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서
(마치 상갓집에서 뵌 것처럼)
과도한 웃음과 리엑션으로 반길 수 없다는 뜻으로
유머랍시고 그런 비유를 쓴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명과 복을 두고
상갓집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죄송해야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먹먹해서
몇 번이나 돌아섰어요.
우리 할머니도 아흔에 떠나셨어요.
가장 덥던 날 뉴스에선
아스팔트에 계란프라이를 하고
김일성의 죽음을
알리느라 시끄럽던 그해 여름.
그때 당시에,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지요...
더 그리 크게 울 일은
없을 것처럼요.
그냥 가시지!
이리 다시 오셔서
저까지 더 울컥하게 하시네요. ㅠㅠ
제가 제일 크게 많이 운 적은
아버지를 언 땅에 묻고
그 깊고 붉은 상처에 흙 몇 줌 얹고
고작 뗏장을 덮어 드리고
집에 와 따뜻한 방에서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기에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알을 넘길 때였습니다.
칠성판이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
우리 아버진 오십 중반에 돌아가셨지요
너무 황망해서 슬픔도 제대로 못 느꼈습니다...
아버님을 일찍 여의셨군요.
저희 어머니도 오십 후반에 돌아가셨는데...
옛날 시골에서는
정식 칠성판이 아닌 나무문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문득 그런 것들이 떠올라 써 본 것입니다.
지인이 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인도 시어머니를 집에서 보냈는데
누워서만 지내시던 시어머니 한 쪽 다리가 굽었는데
돌아가시자 다리 펴드렸다는 애기를..
살아생전에 굽고 꺾인 삶이니
죽어서 만이라도 반듯하게 뉘여
편히 쉬도록 하고픈 마음이겠죠.
오랜만에 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