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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만 첫째부활자가 기록되었지만
이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동일한 계시들을 연결하여야 한다.
스가랴 14장 5절 재림시 주와 함께 임할 ‘모든 거룩한 자들’이 누구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3절 ‘그에게 속한 자’,
그리고 유다서 1장 14절 ‘수만의 거룩한 자’로,
이들이 바로 종말의 사명자들인 ‘십사만 사천’(계7:4), 과 ‘두 증인’이요(계11:3),
예수님 재림 때 함께 임할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자들’로서(계17:14),
‘하늘에 있는 군대’요(계19:14),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자’라는데 까지(계20:6)
성경 전체에 나타난 첫째 부활의 맥을 연결하여 한 문장으로 완성할 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사람 가운데 첫 번째 부활자
성경에 부활은 다같은 부활이지만 분명히 순서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하였다
(고전15:23-24).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모든 자는 그와 같이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이 모두 한 시점에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차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들이 두 번째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 다음으로 두 번째 이지만 사람가운데는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예수 재림시 함께 이 세상에 오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속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첫째부활자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가장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 23절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에서 ‘속한 자’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에 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 - ‘속한 자’
‘속한 자’를 개역성경에서는 ‘붙은 자’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원문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한 자’라는 뜻으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본문만을 놓고 따진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첫째부활자도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라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구절뿐만 아니라
스가랴 14장 5절부터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유다서 1장 14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 12절, 17장 14절, 19장 14절이
모두 한 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맥들을 묶어 하나의 해석으로 내린 것이 첫째 부활자요.
그러한 해석이 문장적해석이요.
이 해석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한 자를 모든 성도로 해석한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가 함께 임한다는 말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답변이 곤란하다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 성도의 휴거를 속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사변을 내세워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 재림할 때 함께 임하는 성도들을 환난 전 휴거한 성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대주의 견해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는
전통적으로 예수 재림하실 때 그 이전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이 모습을 상상하여 무덤을 열고 재림하시는 예수를 맞이하는 성화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속한 자에 대한 해석을 연계하여 답할 수 있다.
첫째부활자도 먼저 죽은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역시 이 한 구절을 보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한 자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동일한 계시가 나타난 성경 전체 구절들을 종합해서 볼 때,
죽은 자들 중 먼저 일어난 자는 첫째부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말씀은 모든 죽은 자들을 포함한 것이 아니고 그 중에서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부활한 첫째부활자는 7년 환난 이전의 순교자들이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인 것이다.
이들은 제단아래서 하나님께 피 값의 신원을 호소했던 환난 전 순교 성도들이다(계6:9-10).
그 다음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첫째부활자 가운데 두 번째 부류이다.
이들은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에 활동 후 적그리스도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가 이들의 부활시점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 수가 차기까지’라고 하신 충원되어야 할 순교자들이다(계6:11).
이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인 것이다(‘두 선지자’, 계11:3,7-11).
두 증인과 144000은 전 3년 반 예언의 사역 후 짐승에 의해 순교한다.
그리고 삼일 반 후 부활승천 하여 시온산에 가 있게 된다(계14:1).
이곳에 있다가 주 재림 때에 부활하는 환난 전 전 순교자들과 함께 하늘군대로 아마겟돈에 내려오게 된다
(계19:14, 두 증인과 144000의 관계는 다음 연구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이 두 부류는 같은 첫째부활자들이지만 이들의 순교의 시기가 다른 것처럼 이들의 부활의 시점도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 부활
한 가지 더 명심해야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록 목적의 차이이다.
성경에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관련 성구 모두를 한 해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중요 포인트Point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한 교훈이라고 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있었던 여러 문제 중 부활에 관한 논란에 사도 바울이 명확히 답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1절부터 부활에 관한 기록의 연속으로 20절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가장 첫 번째 부활한 것을 명시하고 있다.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그 다음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는데 23절에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하였다.
부활의 본질이 성도마다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똑같은 부활인데 부활에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23절에 ‘강림’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강림 또는 재림에 대한 주제로 혼돈하면 안 된다.
부활을 설명하던 중 연관되어지는 예수님 재림을 언급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재림이 핵심이 아니다.
포커스Focus는 부활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50-52절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씀도 부활에 관한 기록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활의 시점이 어느 때를 두고 말하느냐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50절의 ‘하나님 나라’가 어느 곳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가?
다른 견해를 갖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도 천국으로 보는 것이 자명하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혈과 육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반드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시점이 예수님 재림 때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때요.
주제는 여전히 부활에 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주제 재림
반면에 데살로니가전서를 해석할 때는 전체 구성이 재림 신앙 즉 살아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갈망하는 성도들을 위해 쓰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 2장 19절, 3장 13절, 4장 15절, 5장 23절 등 전체가
강림 즉 예수의 재림에 관한 주제로 가득 기록되어 있다.
그 재림 주제 중의 주제 핵심이 4장 17절이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이다.
살아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영광을 누구보다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위해 쓰인 것이다.
18절에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
재림의 소망으로 당시 교회를 파하려는 세력들의 핍박을 이기라는 것이다.
16절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을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예수님 재림시 죽었던 성도들의 부활로 해석한다.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데에는 데살로니가전서 기록 목적이 부활이 아니라,
살아생전에 재림을 갈망하는 성도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중심이 부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재림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부활은 상대적으로 적게 축소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예수님 재림시 성도들의 부활에 관점을 두고 해석 하게 되면 포인트Point가 벗어나게 된다.
성경 한 구절을 바르게 분별하려면,
그 구절을 항상 그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문맥(Contex)이란 ‘본문’(Tex)과 함께’(CON) 간다는 뜻입니다.
문맥이 언제나 해석을 좌우합니다.
저자의 기록 목적을 파악하면 어느 한 구절의 문맥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자가 기술하는 내용은 자신의 기록 목적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해석할 때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재림을 해석할 때는 데살로니가서 4장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 저자인 사도 바울이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이 다르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는 첫째부활자를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천년왕국 후에 부활한다고 기록하고,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는 예수 재림시 부활한다고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성경을 그와 같이 모순되게 기록했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상이한 것이 아니라 서신 중심 주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중심 주제 외의 기록들은 굉장히 낮은 수준으로 언급되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중심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14절 - ‘하늘 군대’
요한계시록 19장 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는 예수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때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다.
14절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고 하였다.
‘하늘 군대’와 함께 오신다고 하였다(‘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KJV)).
이 ‘하늘 군대’를 누구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흔히들 ‘천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하늘 군대’란 표현과 유사한 구절들이 많은데
그것을 ‘천사’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창32:1;왕상22:19;왕하6:17).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왕하19:35;삼하24:16;수5:15;단10:13;마26:53).
그러나 이상에 열거된 천사란 표현과 심판은 예수 재림 때 심판자와 심판의 의미는 동일하지만,
격Class과 대상Target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마겟돈에서의 적그리스도의 심판은 순교자들의 피 값에 대한 보응이다(계6:11).
그렇기 때문에 순교자들이 심판을 담당하는 자들이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늘군대는 14만4천의 부활체를 말씀하시고 있는 성경이다.
스가랴 14장 5절 - ‘모든 거룩한 자’
이러한 체계 아래서 스가랴 14장 5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의 ‘모든 거룩한 자’도 동일한 계시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스가랴 14장 5절을 구약에 기록된 예수 재림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 때 함께 임할 ‘모든 거룩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문에 천사로 기록했으면 그대로 천사로 번역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번역본의 한글 및 영어 성경 등을 보면 상대적으로 ‘천사’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도’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KJV는 ‘All The Saints With’이 그렇고 킹제임스흠정역성경도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이 또한 14만4천을 뜻하고 있는 성경말씀이다.
유다서 1장 14절 - ‘수만의 거룩한 자’
유다서 1장 14절에도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수만의 거룩한 자’는 누구인가?
이 역시도 스가랴 14장 5절과 같이 천사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이 많다.
그러나 현대인성경은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KJV는 ‘Ten Thousands of His Saints’로 JB는 ‘His Saints in Their Tens of Thousands’로 번역하고 있고,
킹제임스흠정역성경도 ‘수만의 성도’로 번역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14만4천의 엄청난 비밀은 성경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 -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도 동일한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고 하였다.
이 말씀에 ‘어린양이 그들(짐승과 그를 따르는 세상 임금과 그의 군대들)을 이기실 것이요’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대역사의 순간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이들에 대해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14장 4 ,5절 “4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와 한 계시이다.
이 말씀은 144000에 대한 자격을 기록한 것으로 바로 첫째부활자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 중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는 주의 깊게 보라.
이것은 사람 가운데 첫 번째 부활 자를 뜻한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첫째부활자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을 심도 있게 관찰해 보면 강림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첫째 부활에 대해 암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 중 14절에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셨다.
15절에는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16절에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14), ‘자는 자’(15), ‘죽은자’(16)는
모두 예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을 함께 데리고 온다고 했을까?
이 구절에 들에 대한 해석의 관건은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이다.
여러 번역본과 주석들을 보면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입니다’(새번역),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예수님처럼 죽은 자들도 부활 한다’,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현대인성경),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등 다양하다.
이러한 해석들의 잘잘못을 평가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다.
주해가들 마다 자신의 신학사상에 따라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도 일치하는 해석이 없다는 사실이다.
14절이 15절로 이어지는 말씀인 것이 분명한 바,
14절의 시기는 예수 재림 때에 있을 사건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에서
하나님이 데리고 오는 자를 모든 성도로 볼 것인가?
첫째부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스가랴 14장 5절,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유다서 1장 14절,
요한계시록 11장 12절, 17장 14절, 19장 14절과 한 맥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에 4장은
첫째부활자에 대한 계시가 기록된 성경의 각권들을 연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주제가 강림이기에 거기에 중점을 두고 첫째부활에는 터치Touch하는 정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엷은 물감으로 색칠된 그림들을 모아 뚜렷한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문장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왜 첫째부활에 관해서 성경은 아주 작은 분량밖에 남기고 있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대상이 지극히 한정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기록목적이 구원이고 대상은 전 인류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아야 할 대다수인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반면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첫째부활과 함께 천년왕국이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이
한 구절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도출해 냈다.
천년왕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경 전체에 해석이 달라질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치열할 정도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느 신학자는 성경 한 곳에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적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요계시는 반드시 반복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성경에서 ‘목사’라는 칭호는 에베소서 4장 11절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만 있는 직분을 부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용어는 한 곳에 기록되었지만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사역을 뜻하는 구절들을 찾아 정립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천년왕국이 교회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대한데 부인하려드는가?
그와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 첫째부활이다.
첫째부활은 종말계시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와 같다.
그런데도 이것을 왜 묻어 두려하는지 목회자들은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부활을 통해 한 맥들을 찾아 한 문장으로 정리하여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의 부활은 천년왕국후에도 있다.
무천년주의자인 이승구 박사는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것에 대한 원어
‘에제산’ἔζησαν을 “이 단어는 이미 죽었던 신자들의 영혼들이 지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 상태 동안에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다 후크마 교수님은 덧붙여서 ‘ἔζησαν’을 ‘중생’으로도 해석하여,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서 왕노릇 하는 신자의 숫자에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첫째부활을 중생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살아서’를 영적인 부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5절의 ‘살다’는 육체적인 부활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모순이 많은 해석이다.
원문에 살아서는 ‘카이 에제산’καὶ ἔζησαν으로 살다는 뜻의 ‘자오’ζάω의 제1부정과거 직설법 3인칭 복수이다.
그 뜻은 첫째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의 용법을 볼 때에 살아서라는 단수 헬라어 에제산은
무천년주의 대표적 학자인 렌스키R C.H.Lenski 조차 항상 완전한 몸과 영이 혼합된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어로서
몸 없는 상태로서의 영靈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4절의 동사는 5절에서처럼 같은 뜻(육체 부활)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면서,
“4절의 ‘살아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갖는 영적 부활을 뜻한다면,
우리는 한 작은 단원 안에 있는 똑같은 동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를 결코 찾을 수 없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4절의 ‘살아서’와 5절의 ‘살다’ 모두 육체적 부활을 명시하고 있는데,
4절은 성도들의 죽은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왕 노릇하는 영적 부활로,
5절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전 인류의 육적 부활로 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못하다.
언어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5절의 사는 것이 육체적 부활을 의미한다면, 4절의 살아서도 육체적인 부활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문맥적 표현과 원어의 사용이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천년주의 해석에 대한 알포드Henry Alford,1810-1871의 주장이다.
만일 두 부활이 언급된 말씀에서…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한다는 뜻이고
둘째가 무덤에서부터 일어나는 문자적 부활이라면 언어의 모든 의미가 끝장이 날 것이며,
성경도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원어적 의미로 볼 때도 살아서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 자체가 첫째부활은 영적인 것으로 둘째부활은 육체적인 부활로 구분하지 않는 한
임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부활은 죽은 자들의 육체와 영이 결합되는 사건이고Lived Again, 중생은 영이 거듭나는 사건이다Born Again.
서로 엄연히 다르다 부활과 중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 본문이 분명하게 언급하지도 않는 것을 영적인 부활로 바꾸는지.
또 두 구절에 똑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지.
이것은 종말론 연구에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지지가 없는 한 아무도 그렇게 할 권리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살아서를 중생으로 해석하는 데에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살아서로 번역된 에제산의 기본형 ‘자오’ 동사가 주로 영적 부활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에제산 역시 영적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단어는 뚜렷한 육적 부활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9장 18절, 로마서 14장 9절, 고린도후서 13장 4절, 요한계시록 2장도 예외 없이 다 육적 부활의 의미로 쓰였다.
그럼에도 무천년주의자들은 전술한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쓰인 ‘자오’ 동사는 영적부활이라고 하면서
5절에 기록된 ‘자오’는 육적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관성이 결여된 자신들의 해석에 대해 무천년주의자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상징으로 본다(순교자포함).
전 성도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흰보좌 심판’(계20:11)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계20:5)이 ‘불신자’들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들이 ‘둘째 사망 당할 자들’이라는 것이다(계20:14).
그러나 첫째부활자를 해석하면서 ‘일반 성도’들도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에서
‘천 년이 차기까지’라는 시점을 통해 천년왕국 후 흰 보좌 심판 때 부활할 것임을 알 수 있다(계20:5).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사도요한은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부활자들이 받을 최상의 상급을 말씀해 주면서 이들 순교 성도들이 아닌,
그 나머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 이곳에 불신자들의 부활이 나오겠는가?
그들이 첫째부활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곳에 심판 받을 자들의 부활이 언급되겠는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첫째부활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천년왕국이 지난 후 백보좌 심판시 부활하게 되는 성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부활을 통해 연결된 값진 해석이다.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해석은 자연스럽게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과도 연결된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부터 시작되고 있는 부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부활의 첫 번째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에게 ‘속한 자라고 하였다’(고전15:23).
그리고 ‘그 후에’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고전15:24).
그런데 대다수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무시해버리고
‘그 후는 끝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분명 부활의 순서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후에 부활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나라’ 즉 천년왕국을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한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백보좌 심판 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5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 맥임을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3, 24절도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에 관한 것이라면,
‘그 후’는 당연히 믿는 성도이어야지 불신자로 강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과 동일한 말씀이요(요5:29).
‘마지막 부활’ 도 이 때임을 증명한 것이다(요11:24).
이것은 첫째 부활에 대한 문장적해석을 통해 얻어진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한다.
14만4천 = (고전15:23) 속한 자 = (살전4:16)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유14) 수만의 거룩한 자 = (슥14:5) 모든 거룩한 자 = (계17:14) 그와 함께 있는 자들 = (계19장) 하늘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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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 답지않게 뭐가 이렇게 기냐....
농단부활로 나온 민재....
니 수준으로는 읽어도 뜻을 모름.
@새하늘사랑(장민재)
빗줄교리같은거니?
@베냐민
밧줄 비유는 진리의 말씀이란다.
https://m.blog.naver.com/minjae2557/222846305327
@새하늘사랑(장민재)
밧줄도 승천한대매?
@베냐민
밧줄 비유는 진리의 말씀이란다.
https://m.blog.naver.com/minjae2557/222846305327
니 대가리로는 그저 헤맬뿐이다.
안식교에서는 꿈도 못꿀
명쾌한 결론임.
공부를 해봐...
이해가 안되면 질문하고..
@새하늘사랑(장민재) 많이 헤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