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오래된 맷돌과 단짝인 함지박이 있었다.
둥근 함지박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다.
어릴 때 우리가 들어가 앉아도 될 만큼 큼지막했다.
어디서 그렇게 큰 나무를 구했으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옛날부터 할머니가 쓰시던 것이었다.
함지박 안팎은 진한 고동색이고 아주 단단하고 무거웠다.
단짝인 맷돌은 화강암으로 되어 어른이 들어도 무거우리만치 컸다. 맷돌은 아래위 두 개의 돌로 되어있다. 아랫돌 가운데에는 중쇠(수쇠)를 박고 윗돌에는 암쇠를 박아 끼워서 서로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손잡이는 윗돌 가장자리 구멍에 박아 이것을 쇠로 테를 둘러 고정시켰다. 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다. 나도 이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평소에는 할 일 없는 노인네처럼 뒤꼍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맷돌과 함지박은 제 세상 만난 듯 바빠졌다. 먼지를 털어낸 함지박 안에 맷돌을 앉히고 녹두를 한 줌씩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단단한 녹두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이 녹두를 물에 불려 거피(去皮) 한 다음 다시 맷돌에 곱게 갈았다. 흔히 빈대떡이라고 하는 평양식 녹두지짐의 첫 준비 작업이었다.
녹두를 탈 때는 할머님 혼자 하셨지만 물에 불려 거피한 녹두를 갈 때는 나도 한몫 거들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맷돌질이 쉽고 곡물이 알맞게 잘 갈린다. 가족 중 할머니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내가 적격이었다. 돌리는 속도가 알맞아야 고르고 곱게 갈렸다. 돌리면서 숟가락으로 녹두를 퍼 넣는 일도 차분한 성품의 할머님이 잘 하셨다. 한 번은 내가 하다가 녹두 알갱이가 빗나가기도 했다. 할머니와 환상의 멤버였던 나도 차차 노하우가 생겨 할머니만큼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맷돌을 돌리면 노르스름한 녹두가 곱게 갈리며 함지박에 담긴다. 이때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도 함께 함지박에 담긴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을 돌리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맷돌과 함지박을 이웃에 빌려준 적이 있었다. 돌아온 함지박엔 크게 금이 가있어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 함지박은 할아버지께서 평양에서 피난 올 때 가지고 왔던 소중한 것인데...
함지박이 없으면 맷돌은 두 개의 돌덩이에 불과한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솜씨 좋은 할아버지께서 깨진 곳에 함석으로 버선에 볼 대듯 곱게 박음질해 살려놓으셨다. 유구한 세월을 함께 한 함지박과 맷돌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맷돌을 대신할 수 있는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나오면서 맷돌과 함지박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이런 박물관 유물이 우리 집에는 또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박달나무 다듬잇돌과 그 위에서 푸새한 홑청을 고부 간에 마주 앉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던 방망이, 내 설빔을 만들 때 엄마 옆에 놓였던 화로와 인두, 100년이 훨씬 넘은 싱거 재봉틀이다. 다행히 이런 것은 여동생이 물려받았다.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여동생과 제부가 맡아줘서 안심이 되고 고마웠다.
피난길에 챙겨왔던 양주(陽州) 김 씨 족보와 제기(祭器)도 소중한 것이다. 평양에서 한의원이셨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장인을 집에 모셔와 나무의 선택부터 칠까지 몇 달이 걸렸다는 명품 제기다. 우리 집 제기처럼 날렵하고 우아하게 잘생긴 것을 본 적이 없다. 전체 색깔은 짙은 고동색이며 술잔은 유리잔보다 더 얇아 나무의 투박함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제기는 제사 때마다 제상의 孤高한 주인공처럼 보였다. 아버지도 안 계신 지금은 남동생이 제사를 주관하는데 소중하게 쓰다 김 씨 가문의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방송국의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200년 가까이 된 명품 제기를 한 번 출품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시부모님 제사를 맡고 있다. 처음에 제기를 장만하러 갔다가 실망해 사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명품 제기에 맞춰진 내 안목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이 변하듯이 어르신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그중에 제일이 맷돌과 함지박이다.
2017.7.
첫댓글 우와~!
글 속에서 만난 함지박과 맷돌.
함지박은 천연 믹서기를 앉혀 콩물을 받아내는 역활을 했군요.
시집와서 보긴 했는데
지금은 외짝이 된 맷돌만 정원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어요.
물론 맷돌 사용법도 모르고요.
선배님은 참 좋은 추억꺼리를 가슴에 담고 계시니
바로 박물관 해설사가 따로 없네요.
조부모님이 평양분이라 명절에는 녹두지짐이 빠지지 않았어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을 돌리고 옛날 이야기도 듣고, 전 부치는 것도 도왔어요.
솥뚜껑 뒤집어 놓고 전 부치는 것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점점 글솜씨 익어가는 옥덕님 이제 수필집 기다리고 있을께.
언니 수필집이라니요?
아직 요원한 일입니다.
배우는 즐거움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