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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루카 5,17-26
나는 세상에서 신비로운 존재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중략)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주는 것을 ‘성사’(sacramentum)라고 합니다.
성사 중의 성사는 성체성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신성을 눈에 보이는 밀떡 형상으로 내주시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입니다.
세상이 밀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으며 우리가 2천 년 동안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사는 다 ‘신비’(mysterion)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 교회 안에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까지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다 성사이고 신비롭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신비롭게 보이려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기적의 신비를 보고 믿음을 얻어 죄를 용서받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라울 소사(Raoul Sosa)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5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던 10대 초반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들과 다양한 실내악곡들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살 때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그리고 지휘자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청천벽력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셋째와 넷째 손가락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유명한 라울 소사가 이제 피아노 인생은 끝이 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하였던 것처럼 라울 소사도 절망을 딛고 더 큰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왼손 하나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을 놀리는 날렵한 핑거링(fingering)은 청중들을 압도하며 큰 감동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손 피아노에 압도된 청중들은 그를 ‘기적의 피아니스트’라 부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참 신기하다!’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인상을 주려면 반드시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네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씨가 있습니다.
의사의 유산권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우갑선(50) 씨의 강력한 출산 의지로 태어난 아기가 ‘희아’ 씨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10살에 세상을 떠난 성녀 히야친타의 세례명을 따 ‘희아’란 이름을 주었고
‘세상의 기쁨의 싹’이 되라는 의미도 함께 주었습니다. 희아는 말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두 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내 손을 생각해 보면 아주 귀한 보물의 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희아 씨가 피아노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하루 10시간이 넘는 맹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그렇게 고된 훈련에 작은 몸은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피아노를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고, 피아노 선생님을 보면 숨어버리는 등 ‘피아노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어머니도 자신의 욕심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기적은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1979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가락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피아니스트, 장애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지휘와 작곡을 비롯해 왼손만을 위한 작품을 작곡한 것뿐만 아니라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놀라운 기교를 개발해 청중을 압도하는 감동을 보여준 ‘기적의 왼손 피아니스트’ 라울 소사를 만난 것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어쩌면 자신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와의 짧은 만남이 그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5년 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즉흥 환상곡’을 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대표곡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터질 듯한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사태에 빠졌을 때 전 국민이 금붙이를 모아서 전례가 없이 빨리 그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런 일이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그래서 뭉치면 못 할 게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성녀처럼 믿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교회 안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있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 한 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루카 5,17-26
폐기 문화와 맞서 싸우십시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무렵,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아버지인 교황으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더는 새로운 일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퇴할 나이에 로마 주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하시며, 그분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 연세가 만만치 않은 노인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료 노인들에게 건네는 바람직한 노인 신앙인으로서의 이정표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노인 여러분!
지혜와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십시오.
세상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는 예언자가 되십시오.
노인의 삶도 충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드러내십시오.
죽음은 끝이 아니라 통로요, 과정이며 완성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시대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또 한 가지를 간곡히 요청하십니다.
“이 비정한 시대, 폐기 문화, 즉 버리는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우십시오!”
정말이지 우리 시대는 폐기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충분히 쓸만한데도 무조건 폐기 처분입니다.
조금만 손보면 십년 이십년 잘 사용할 수 있을텐데도 미련없이 폐기 처분합니다.
물건만 폐기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도, 더 나아가서 사람까지도 폐기 처분합니다.
더 이상 생산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너무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병이 길어 진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가족들까지도 폐기 처분하는 문화가 우리 안에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들’의 행동은 가슴에 손을 얹게 만듭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들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뵙게 하려 했으나, 엄청난 군중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 병자의 치유라는 간절한 목표 앞에 포기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신 집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냈습니다.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평상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로 인해 예수님의 심기가 불편하셨을 텐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틈만 나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인간 존재를 자신들의 눈앞에 안 보이게 하려는 우리입니다.
더 이상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버리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데려온 ‘그들’의 행동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자기 앞가림이나 제대로 하지, 오지랖도 넓다.’고 비아냥대는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이순간 큰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를 향한 강력한 측은지심,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강론>
(2023. 12. 11. 월)(루카 5,17-2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5,20-26).”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즉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림 시기의 미사 때 이 이야기를 복음 말씀으로 듣는 것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장면들은, 이 증언을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배치한 무대 장치 같은 것이고, 부수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이야기의 앞부분에 있는,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 이야기”는 메시아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상징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문을 품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감을 나타내고,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모습은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놀라기는 하는데 믿음을 갖지는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나는 너를 구원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사람아’ 라고 부르신 것은,
그 병자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얘야’ 라고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9,2; 마르 2,5).
‘얘야’는 ‘아들아’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사람아, 얘야, 아들아’는 모두,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엾게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또는 “나는 너를 구원한다.” 라는 뜻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들었고, 그들은 그 말씀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반감과 적대감을 품게 됩니다.
<본문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반감과 적대감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라는 말은, 여기서는 “사람이 감히”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사람’일 뿐이었고,
‘사람’이면서 감히 하느님 흉내를 내는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즉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 또는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과 반감과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군중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행사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놀라운 일,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냥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가?”
만일에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만 믿고, 하느님으로는 안 믿는다면, 굳이 예수님을 찾을 필요 없이, 하느님만 잘 섬기면 그만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ㄱ).”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면,
이 말씀 자체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목숨을 전부 다 예수님께 맡겨 드립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