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匕首)로 돌아온 선의(善意)
히틀러가 독소(獨蘇)전쟁을 결심(決心)한 이유(理由) 중 하나가 소련을 깔본 것입니다.
군사적(軍事的)으로 독일이 우월(優越)하다고 믿었고 그의 예상(豫想)대로 초반(初盤)에 승승장구(乘勝長驅)했습니다.
하지만 전술(戰術), 작전(作戰) 같은 soft wear가 앞섰기 때문이었지 소련의 무기(武器)가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선(一線)에서는 소련의 T-34, KV 전차 같은 무기에 당혹(當惑)스러워했습니다.
혹한(酷寒)이 시작되자 얼어붙어 작동(作動)이 멈추는 독일제 무기와 달리 진가(眞價)를 발휘(發暉)했습니다.
↑KV-2(러시아어: Кв-2)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된 소련의 중(重)전차이다.
"KV"는 소련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Efremovich Voroshilov, 1881년 2월 4일~1969년 12월 2일)의 앞글자를 땄다.
KV-1S의 차체에 152mm 곡사포(曲射砲) M1938을 탑재(搭載)했다. 152mm 유탄포(流彈砲) D-10T를 탑재한 회전포탑(回轉砲塔)을 장착(裝着)한 모습으로 인해 독일군은 "Gigat"(거인)라 불렸다.
소련군은 1939년 12월 겨울 전쟁 당시 핀란드(Finland)의 강력한 방어선(防禦線)에 전차 손실이 발생하면서 KV-1보다 강력(强力)한 화력(火力)을 가진 전차를 주문했다.
키로프(Kírov) 공장(工場)은 당시 운용(運用) 중이던 KV-1의 문제점(問題點)을 개선(改善)한 진지돌파용(陳地突婆用) 전차가 개발되었고, KV-1S의 차체(車體)에 152mm 유탄포 D-10T를 탑재한 사각형(四角形) 포탑이 올려진 전차가 탄생했다.
KV-2는 1940년 실전(實戰)에 투입(投入)되었고, 1943년까지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東部戰線)에서 운용되다가 기동성(機動性)과 속도(速度) 문제로 퇴역(退役)했다.
이후 KV-2의 돌격포(突擊砲) 역할은 SU 전차와 IS 전차로 계승(階乘)되었다.
↑독소전쟁 초기에 독일군에게 충격을 준 KV-2 전차
하지만 히틀러의 예상대로 독일이 우세(優勢)했던 분야도 있기는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질적(質的)으로 앞섰던 전투기(戰鬪機)였습니다.
흔히 5기 이상의 적기(敵機)를 격추(擊墜)시킨 조종사(操縱士)를 Ace라고 하는데, 역사상(歷史上) 1위부터 133위까지의 에이스가 모두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소속(空軍所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소련군을 상대로 전과(戰果)를 올린 공통점(共通點)이 있습니다.
그만큼 소련제 전투기의 성능(性能)이 뒤졌다는 의미(意味)이기도 합니다.
↑소련 전투기들은 질적으로 독일 전투기에 뒤졌습니다
물론 소련도 좋은 전투기를 개발하려 애썼으나 기술력 부족(技術力不足)으로 애로(隘路)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제2차 대전 말기(末期)에 등장한 제트전투기는 소련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타 경쟁국(競爭國)도 초기 단계(初期段階)라서 노력(努力) 여하에 따라 격차(格差)를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특히 승전(承前) 후 노획(鹵獲)한 독일의 제트전투기와 기술들은 좋은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946년,
소련 최초의 전투기인 MiG-9과 Su-9(1946)가 등장(登場)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 최초의 제트전투기 중 하나로 Me 262를 그대로 베낀 Su-9(1946), Me262의 영향을 받은 소련 전투기 Sukhoi Su-9. 최대 속도 885Kph, 무장은 Mig 15와 유사하며 37mm 또는 45mm 포와 2x 23mm 포로 구성됩니다. 또한 2개의 250kg 폭탄을 탑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한계(限界)가 드러났습니다. 여타 부분은 그럭저럭 만들어 내었지만 가장 중요한 제트엔진(Jet engine)이 문제였습니다.
독일제 엔진을 copy했어도 예상(豫想)만큼 힘을 발휘(發暉)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독일제 엔진도 당시 이 분야(分野)를 선도(先導)하던 영국제 엔진에 비해서는 성능(性能)이 뒤졌습니다.
당연히 영국은 제트엔진을 고도(高度)의 전략 물자(戰略物資)로 취급(取扱)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냉전(冷戰)이 시작되기 전이었음에도 소련이 영국제 엔진을 획득(獲得)할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동시기 영국제 엔진에 비해 성능이 뒤졌던 Me 262의 Jumo 009 엔진
영국과 접촉(接觸)해 보라고 지시(指示)한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년 12월 18일~1953년 3월 5일)조차 "어느 바보가 자신의 1급 비밀을 팔겠나"라며 지레 포기(抛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영국의 정권(政權)을 잡은 노동당(勞動黨) 정부는 군부(軍部)와 안보 관계자(安保關係者)들의 격렬한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소련과 우호(友好) 관계를 증진(贈進)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이제 막 양산 단계(量産段階)에 들어간 최신 롤스로이스 넨(Rolls-Royce Nene) 엔진의 공급(供給)을 결정(決定)했습니다.
스탈린도 놀란 예상치 못한 반전(反轉)이었습니다.
롤스로이스 인사이드
칼날이 되어 돌아온 롤스로이스
제2차 대전 종전 당시에 등장한 Me 262는 하늘의 주역이 더 이상 프로펠러기가 아님을 뜻하는 변곡점(變曲點)
이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제왕은 프로펠러기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속도를 자랑하는 제트기의 시대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대의 승전국인 소련은 제2차 대전기간 동안 야크(Yak) 같은 좋은 전투기도 제작하였지만 항공기분야의 선진국은 아니었고 특히 제트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기술기반은 상당히 취약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소련도 좋은 전투기를 만들었으나 제트기 생산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
이것은 미국 주도(主導)의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世界秩序構築)에 소련이 공산권 맹주(共産圈盟主)로써의 역할(役割)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소련은 노획(鹵獲)한 독일의 유모(Jumo) 004 엔진을 복제(復除)하여 보았지만 출력(出力)이 부족하여 차기(次期) 제트기의 심장(心腸)으로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수호이(Sukhoi) 설계국(設計局)이 엔진뿐만 아니라 Me 262를 그대로 copy하여 소련이 자력(自力)으로 만든 제트기라고 공산당 지도부에게 자랑하다 스탈린의 분노(憤怒)까지 불렀을 정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