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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년에 공론을 주장하는 선비들은 착한 것을 칭찬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해서, 그 행실이 효제(孝悌)를 어기거나 인의(仁義)에 맞지 않는 자와는 함께 조정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명백하고 옳고 그른 것이 뚜렷해서, 착한 사람들이 높이 등용되고 사람들이 깨끗한 이름을 사모해서 어진이들이 조정에 오르는 일이 성대하게 되었다.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이 개혁하는 데 용감하여 공자(孔子)가 말한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인정(仁政)이 행해질 것이다.”는 뜻을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벼슬을 얻으려고 애쓰고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중요한 자리에 서지 못하여 겉으로는 칭찬하나 속으로는 욕하였다. 이에 임금(중종)이 모든 어진이들을 사랑하고 대접함에, 그들은 매양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한 장(章)을 진강(進講)하고는 의리를 인용하여 비유하고 경서를 두루 끌어내어 미묘한 이치를 캐었는데, 아침에 강론을 시작하면 해가 기울어서야 파하므로 임금이 몸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고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龍床)에서 퉁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니, 남곤과 심정 두 사람이 임금의 뜻에 선비들을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드디어 꾀를 내어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
● 이때 남곤과 심정이 심술궂게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사림(士林)들에게 죄를 얻었는데, 그들이 면목을 고쳐 청류(淸流)들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사림들이 끝내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분함을 품고 드러내지 않았다.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자 법을 다스리기를 공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복종하여 매양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 상전이 오셨다.” 하니, 남곤 등이 그가 인심을 얻었다고 은근히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석담일기(石潭日記)》
● 남곤과 심정이, 홍경주(洪景舟)가 일찍이 찬성이 되었다가 논박을 받아 파면되어 항상 분함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드디어 서로 통하여, 홍경주로 하여금 그의 딸 희빈(熙嬪)을 시켜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로 돌아갔다.” 하고, 밤낮으로 임금께 말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었다. 또 산 벌레가 나무 열매의 감즙(甘汁)을 먹기 좋아하니 일부러 그 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4자를 금원(禁苑)의 나뭇 잎에 써서 산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자국이 생겼는데, 글자가 마치 부참서(符讖書)와 같았다. 이것을 따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듣고 의혹하였다. 심정이 또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문안비(問安婢)를 꾀어서 말하기를,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매 사람들이 모두 칭찬한다.” 하여 마치 여염 사이의 보통 말처럼 만들어서 궁중에 퍼트려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두렵고 위태롭게 여기게 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홍경주가 언문 편지를 가지고 밀지(密旨)라 일컬으면서 불평을 가진 정승들에게 말하여 시일을 정해 모이게 하니, 지중추 안윤덕(安潤德)은 대답하기를, “신은 능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하고, 권균(權鈞)은 지위가 낮다고 사양하였으며, 여성부원군(礪城府院君) 송일(宋軼)은 병이 있어 일어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기묘당적보》
●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을 삭제할 것을 청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폐하지 못한다는 강상(綱常)을 중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먼저 공이 없는 자를 삭제한 뒤에 겨우 20여 명의 이름을 남겨서 연산을 폐한 죄를 성토하고 보면 경 등은 어육(魚肉)이 될 것이요, 그 다음에는 나에게 미칠 것이다. 주초(走肖)의 무리가 간사하기가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아서 온 나라 인심을 얻어서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송 태조(宋太祖) 때 황포(黃袍)를 몸에 덮어 입히는 변이 있게 되면 비록 조광조가 사양하고자 하나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조광조가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 생각에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인줄 알았더니, 지금 생각해 보니 반드시 저들의 우익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이들을 잘라 없애려 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그 속에 있으니 이것이 한스럽다. 내 심복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 정광필은 왕실에 마음을 둔 자이나 이장곤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이제 소인배에게 붙었으니 믿을 수가 없다. 심정은 근래 비록 논박을 입었으나 재간이 있으니 가히 신임할 만하다. 내가 이들을 제거하려는 뜻을 딴 사람에게 번거롭게 말하지 말고 남곤과 심정에게 묻는 것이 어떠한가. 유용근(柳庸謹)과 한충(韓忠)과 김세희(金世熹)는 모두 무예(武藝)가 있다고 자부하니 두려워할 만하다. 조정에서 이 무리들을 제거한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근심이 없겠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한테서 나오는 터이니 나를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조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온순하여 옳은 사람같이 보이나 수 년 사이에 벼슬을 뛰어서 높이 썼으니 내가 마침내 주초의 꾀 속에 떨어진 것이다. 명백하게 이들을 죄주고 싶으나 대간과 홍문관과 육조와 유생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요즘에는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하여 파리한 뼈가 드러났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 하였다. 자기 집에 있는 글인데 언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당적보》
● 홍경주가 희빈에게 통하여 아뢰기를, “온 나라 인심이 조씨에게로 돌아갔으니, 이제 공신을 삭제하자고 청하는 것은 점차 국가의 우익들을 제거한 것이다. 그 뒤에 오직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천과(薦科)를 베풀어서 그 성세를 확장하고 구신(舊臣)들 중에 조금만 다른 의견을 세우는 자는 모두 배척해 내쫓아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놀랐다. 《당적보》
● 날이 밝기 전에 남곤이 미복(微服)으로 초립(草笠)에 떨어진 베옷을 입고 찢어진 신을 신은 채 걸어서 정광필(鄭光弼)의 집에 이르러 문지기를 불러 말하기를, “급히 안에 들어가서 손이 왔다고만 말하라.” 하니, 문지기가 그 얼굴을 보고 남곤임을 알고 들어가 고하기를, “손이 문 밖에 왔는데 그 모양이 남 판서 같으나 의관이 초라하여 천한 사람과 같습니다.” 하자, 정광필이 크게 놀라 나가 보니 과연 남곤인지라,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공이 어찌해서 이렇습니까?” 하니, 남곤이 그 이유를 갖추어 말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들을 하나라도 남겨 두면 그 해가 무궁할 것이다. 임금께서 오늘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니, 공은 힘써 전하의 뜻을 순종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한 뒤에야 나라의 형세가 편안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가 많을 것이니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위태로운 말로 위협하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달래기도 하니 정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공이 대상(大相)으로서 천한 복장을 하고 시가를 지나쳐왔으니 크게 놀랄 일이다. 사림을 모해하는 일은 본래 내 마음이 아니니 차마 이 일을 하겠는가.” 하니, 남곤이 크게 노해 옷소매를 떨치면서 갔다. 《사재척언》
● 거사할 때 병조 판서가 없으면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호령할 수 없고, 또 병조 판서 이장곤이 판의금부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곤은 이장곤이 집에 없을 때를 엿보고서, 날마다 세 번씩 찾아가서 먼저 의혹을 가지게 한 뒤에, 이날 밤 급히 편지를 보내어, “국가에 큰 일이 있으니 말을 달려들어 오라.” 하였다. 이장곤이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성 중에서 말을 빌려 타고 남곤의 집으로 달려가니, 남곤이 말하기를, “판서 홍경주가 밀지를 받고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 먼저 홍경주를 보내 아뢰기를, “근시인(近侍人)들이 모두 조광조의 심복입니다. 사세가 절박하니, 신무문을 열어 밤을 타 입대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것은 승지와 사관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밀교(密敎)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여러 정승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평상시에는 궐문을 열고 닫을 때 승지에게 알려야 했으므로 열쇠를 정원에서 출납하고 있었는데, 신무문 열쇠만은 사약방(司鑰房)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때 남곤과 심정은 고형산(高荊山)ㆍ홍숙(洪淑)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成雲) 등과 밀약하며 모이기로 기약하였는데, 성운이 시간보다 먼저 입직하였다.
● 이경(二更)에 남양군(南陽君) 홍경주, 공조 판서 김전(金詮), 예조 판서 남곤, 병조 판서 이장곤, 호조 판서 고형산 등이 합문 밖에 모였고, 도총관 심정과 병조 참지 성운이 직소에서 나와 모였다.
● 임금이 편전에 나오자 홍경주가 서계를 가지고 입대하기를, “신 정광필ㆍ홍경주ㆍ김전ㆍ남곤ㆍ이장곤ㆍ고형산ㆍ홍숙ㆍ심정ㆍ손주ㆍ방유녕ㆍ윤희인ㆍ김근사ㆍ성운 등이 보니,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지어 자기들에게 아부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세력으로 서로 어울리고 중요한 자리에 도사리고 앉아 임금을 속이고 사심을 부려 기탄함이 없고, 후진들을 꾀어 과격한 습관을 길러 젊은이로 어른을 누르고 천한 이로 귀한 이를 누르게 하여 국세를 기울어지게 하고 조정의 일을 날로 그릇되게 하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는 분통스러워하고 탄식하고 있으나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곁눈질하며 다니고 발을 포개고 서 있습니다. 사세가 이러하니 한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유사(有司)에게 붙여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또 빨리 명을 내려 승정원과 홍문관에 입직한 관원들을 잡아 가두도록 청하였다. 이때에야 정원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입직한 승지 윤자임(尹自任)ㆍ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검열 이구(李構) 등이 비로소 듣고 합문 밖에 달려오니, 홍경주 등이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었는데,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는 군사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윤자임이 묻기를, “정원에 알리지 않고 들어왔으니, 무슨 일이냐?” 하니, 좌우에서 서로 쳐다보며 말을 하지 못하고, 이장곤만은 혼자 섰다 앉았다 하며 말하려고 하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정이 말하기를, “표신(標信)으로 불렀기 때문에 들어왔다.”고 하였다.조금 있다가 내관 신순강(申順剛)이 성운을 불러 말하기를, “성운을 승지로 명하니, 속히 입대하라.” 하니, 성운이 칼을 찬 채 빨리 들어가려 하니, 윤자임이 말하기를, “정원에 미리 알리지 않고 어떻게 내시의 말만 듣고 감히 들어가려 하느냐.” 하자, 성운이 듣지 않고 달려들어갔다. 안정이 막으며 말하기를,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사관은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성운이 어째 감히 혼자 들어가려 하느냐. 잠깐 지체하라.” 하고, 마침내 합문까지 쫓아가 그의 띠를 붙잡고 같이 들어가려 하니, 성운이 안정의 팔을 뿌리치고 들어갔다. 환관이 문지기에게 호통치며 말하기를, “왜 잡인을 금하지 못하느냐.” 하니, 마침내 함께 안정을 붙잡아 내보냈다. 심정이 안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임금께서 노하신 듯하니,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하였다.
얼마 안 지나서 성운이 나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어필(御筆)이다. 이 사람들을 즉시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그들은 바로 윤자임ㆍ공서린ㆍ안정ㆍ이구(李構) 및 응교 기준(奇遵)과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해 있었다. 이에 궐문이 비로소 열리고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金淨),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함께 대궐 뜰로 붙들려 왔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이날 초저녁에 기준이 윤자임ㆍ안정ㆍ이구 등과 함께 천문(天文)을 관측하기 위해 간의대(簡儀臺)로 갔는데, 이윽고 정원 사령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몇 정승이 서문으로 입궐을 했고, 또 근정전 가운데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호위해 서 있다 운운.”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째서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이냐.” 하고, 곧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입번 승지 두 사람 윤자임과 공서린 과 홍문관 두 사람 기준과 심달원 과 한림 이구, 주서 안정 등을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니, 이경(二更)에 이미 옥에 가두었다. 조금 있다가 이자ㆍ김정ㆍ조광조ㆍ김식ㆍ김구ㆍ유인숙ㆍ박세희ㆍ홍언필ㆍ박훈 등을 잡아 가두었다. 조금 뒤에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심달원ㆍ안정ㆍ이구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이자를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덕양일기(德陽日記)》
● 그때 남소(南所)의 위졸(衛卒)들이 궁전 뜰에 호위해 서 있었다. 또 내고(內庫)의 무기를 내다 섬돌 사이에 늘어놓게 하였다. 홍경주 등이 함께 편전에 시립하여 두렵고 놀랄 만한 말로 임금을 크게 놀래고 또 아뢰기를, “일이 급하니 국문할 것도 없이 빨리 선전관을 보내 금위군을 통솔하여 여섯 승지와 홍문관, 대간, 시종들을 궐문 안에 잡아들여 때려죽이소서.” 하였는데, 마치 정난(靖難)이나 하는 것처럼 형기를 벌써 대궐 뜰 아래에 갖추어 놓았다.
이장곤이 비로소 그날 밤 당장 쳐죽이려는 의도를 알고 놀라 나가 아뢰기를, “임금이 도적의 모의를 행할 수 없으며, 또 한 수상에게도 숨긴 채 국가 대사를 행할 수 없습니다. 대신들과 상의하여 죄주더라도 늦지 않습니다.”고 반복하여 극진히 간하였다. 홍경주가 임금에게 속히 결행할 것을 권하려고 일어나니, 이장곤이 곧 손을 저어 물리치며 말하기를, “공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좀 풀리어 영상 정광필을 명하여 불러들였다.
● 그때 특명으로 남곤을 이조 판서로 삼고, 김근사ㆍ성운을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봉상시 직장 심사순(沈思順)을 가주서로 삼았다. 심사순이 미처 입시하기 전에 검열 채세영(蔡世英)을 시켜 당인들을 죄주는 교지를 쓰라고 하더니, 채세영이 붓을 잡고 극진히 간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헛말을 꾸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죽일 만한 죄가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하자, 가승지 성운이 채세영이 잡은 붓을 빼앗아 쓰려고 하였다. 채세영이 성운의 몸을 막으며 소리를 높혀 말하기를, “이것은 역사를 쓰는 붓이다.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도로 빼앗으니, 자리가 숙연해졌다.
● 삼경(三更)에 정광필이 부르는 명을 받고 궐내에 들어오니 재촉하며 입대하라 명하여,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기를, “젊은 유생들이 시대에 맞는 것을 알지 못하여 헛되이 옛일을 끌어다 지금에 시행하려 한 것뿐입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조금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어 삼 정승과 함께 죄를 의논하게 하소서.” 하는데, 말끝마다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임금이 급히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정광필이 쫓아가 어의(御衣)를 붙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이 턱에 교차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을 옥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또 우의정 안당(安瑭)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 정광필이 남곤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들은 임금을 보필하면서 어찌 유자광(柳子光)과 같은 일을 하려 하는가.” 하였다.
● 그때 지평 이희민(李希閔)과 이연경(李延慶) 등이 궐문으로 달려들어오다가 안에서 나오는 이조 좌랑 구수복(具壽福)과 만나 서로 말하였는데, 얼굴빛이 달라지며 그 연유를 헤아리지 못하여 드디어 월화문(月華門)을 들어서니, 부장이 막고 들이지 않으며 말하기를, “김근사가 궐내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고 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평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무엇을 들어가 아뢰겠는가.” 하였다. 이희민이 바로 경연청으로 들어가서 영상에게 말하기를,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극히 비밀로 하고 있고, 우리들의 관직이 비록 체차되었으나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어떻게 태연히 물러가 있겠습니까. 좌우에 이미 사필을 잡을 사람이 없으니, 국가 대사가 흐지부지하게 되어 전할 길이 없으니 더욱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정광필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선 물러가 있으라. 임금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게 되면, 조광조들을 죄주려하겠지만 우리가 어찌 선비를 죽이겠느냐. 극력 주선하여 구제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봉교 조구령(趙九齡)ㆍ채세영(蔡世英)ㆍ권예(權輗)를 시켜 그 일을 기록케 하였는데, 밤이 벌써 오경 쯤이었다. 이희민 등이 물러나다가 영추문 밖에서 안당을 만나자, 이연경이 달려나가 말하기를,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정승만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울기를 마지 않았다.
● 정광필이 이미 나와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들을 어찌 감히 모두 다 죄주겠습니까. 승지들은 본래 본의가 아니라, 바른 의논을 따르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이자(李耔)는 훗날 국가에서 크게 쓸 사람이니 단지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고, 또 조광조 등의 경우에도 털끝만큼이라도 무슨 사심이 있겠습니까. 한갓 옛사람의 글을 보고서 지극한 정치를 보기를 기약한 것이 그 사이에 간혹 과격한 일이 있은 것이니 심하게 치죄해서는 안 됩니다. 바야흐로 지금 거룩한 시에 불행히 선비들을 죽였다는 이름이 있게 된다면 반드시 역사책에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금부를 시켜 추문(推問)하여 죄를 주고 안 줄 것을 경중을 가려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 오경(五更)에 안당이 부르는 명을 받고 황급히 달려가니, 정광필이 혼자 빈청에 앉아 있어 그 연유를 묻자, 정광필이 눈물을 닦으며 혀를 차며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이내 정광필과 함께 반복하여 구원하기를 논하고 조정에 모여 죄를 의논할 것을 힘써 청하니, 이에 참의 이상의 관리를 불러 함께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여러 관원들을 데리고 합사(合辭)하여 사실을 밝혀 구하였다.
● 그때에 특명이 내려 유운(柳雲)을 대사헌으로 삼고, 윤희인(尹希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어 양사와 옥당을 다 체차하라 명하였는데, 정광필은 체차하지 말기를 재삼 청하니, 임금이 다만 옥당관(玉堂官)만 체차하지 말 것을 허락하였다. 그 다음 임금이 영상과 우상에게 명하여 대간, 시종, 예조 판서, 형조 판서, 양사 장관을 차출하게 하니, 모두 특별 하교였다. 이때에 청류(淸流)가 일망타진되어 조정이 거의 텅 비었다. 정광필이 물러나와 빈청에 이르러 한참 동안 남곤을 쳐다본 채 말이 없었다. 남곤이 물러나 사람에게 말하기를, “정광필의 눈.”이라 하였다. 《당적보》와 《석담일기(石潭日記)》를 합쳐 기록함.
● 이날 남곤을 불러 정사를 하라고 명하였으나, 병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아 명을 보류했다. 당시에 화를 꾸민 것은 남곤이 실상 주장하여 권력을 자기에게 거두어 놓고 스스로 물러나 두 번이나 불러도 조용히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 꾀가 교묘하나 일을 주동한 간계를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이에 영상과 우상에게 명하여 더불어 정사를 하게 하였다. 《당적보》
● 정광필을 시켜 조광조들의 죄안(罪案)을 정하게 하였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중대한 일을 경솔히 재결할 수 없으니, 여러 의논을 거두어 결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전지를 초(草)하게 하였다. 남곤이 조금 앞에 나가 붓을 잡고 엎드렸는데, 그때 승지 성운(成雲)과 가주서 심사순(沈思順)만이 입시해 있었다. 남곤이 쓰기를 마치고 임금 앞에 올리니, 임금이 이를 보고 전교하기를, “죄안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다만 조광조 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하라.” 하였다. 그 죄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서로 붕당을 지어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고 중요한 자리에 들어앉아 후진들을 꾀어 궤격(詭激)이 습성이 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윤자임ㆍ기준(奇遵)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 등은 조광조의 무리의 궤격한 버릇에 부화뇌동하였다.” 하였다. 죄인 가운데 처음에는 ‘임금을 속이고 사(私)를 행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정광필이 아뢰어 뺐다. 또 이자의 죄명이 김식의 위에 있었는데, 정광필이 또한 아뢰어 빼 버렸다. 《동각잡기》
● 8명 가운데 윤자임과 박훈은 대신들이 모두 면하기를 청하였다. 내시 신순강(申順剛)이 임금께 참소하기를, “윤자임은 여러 정승이 정원 모르게 궐내에 들어온 뜻을 힐문하고, 성운이 명을 받들어 합문으로 들어올 때 안정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고 언사가 불공하였다.” 하니, 임금이 더욱더 노하여 이르기를, “박세희와 윤자임이 모두 무예(武藝)가 있다고 자부하니, 더욱 두렵다.” 하였다.
● 처음에 일을 담당했던 정승들(남곤의 무리)이 아뢰어 예문관을 파직시키고 이조 낭관을 불러 그날 바로 정사를 하게 했는데, 구수복이 그때 낭관으로 패(牌)를 받고 궐내에 들어와 항쟁하여 말하기를, “만일 사관을 다 파직시키면 오늘 기주(記注.사관이 당일의 일을 기록하는 것)는 누가 하느냐?” 하며 전교에 서명하지 않으니, 당사자들이 크게 노하여 왕명을 받기를 거역한 죄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날 새벽에 정광필이 처음 궐내로 들어오자, 구수복이 맞아 연유를 고하니, 정공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고 아무 말 없이 빈청으로 들어갔다. 당사자들이 먼저 수복의 이 일을 거론하며 노발대발하자 정광필도 역시 크게 노하여 소리지르니, 그들의 마음이 진실로 조금 풀렸다. 날이 밝자 초계(抄啓)하기를 논의하는데, 정광필이 말하기를, “임금이 진노하고 있으니, 이러한 일은 차차 치죄해도 늦지 않다.”고 하여, 일이 지체되어 곧장 배척받지 않고 또한 죄도 없었다. 정광필이 임기응변을 잘하여 어진 사람을 돕고 나라를 도우고 남을 구하여 덕을 펴며 더러운 것까지 감싸 포악함을 길들인 것이 이와 같았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 16일 아침 의금 부사 김전(金詮)ㆍ이장곤(李長坤)ㆍ홍숙(洪淑) 등이 좌기(坐起)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이 사사로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ㆍ박세희ㆍ박훈ㆍ기준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뇌동한 일들을 국문하였다.
● 조광조가 공술하기를, “신은 나의 38세의 선비로, 이 세상에 나서 믿은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망녕되이 국가의 병통이 이원(利源)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명맥을 영원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조금도 다른 뜻이 없습니다.” 하였다.
● 김정이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34세로, 나이가 젊어 고지식하고 성질이 또 편벽되고 급한데도 불구하고 육경에 올라 항상 스스로 두려워하며 나라의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여 무릇 논사(論思)할 때 한결같이 바른 일을 하려고 힘써 밤낮으로 걱정했을 뿐, 붕당을 지어 과격함이 풍습을 이루어 국론을 전도케 하고 조정의 정사를 날로 글러지게 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 김식이 공술하기를, “지나치게 임금의 은혜를 입어 대관(臺官)에 뽑혔고, 급제한 뒤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대사성까지 되어 털끝만큼이라도 더 잘 보필하려고 했을 뿐, 권세 있는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았고 전혀 인물을 내고 들인 일이 없으며, 더구나 붕당을 지었다고 운운한 것은 신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 김구가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32세로, 성질이 본래 옹졸하고 우둔하여 다만 옛사람들이 스승과 친구간에 도왔던 일을 사모하여 동지들과 같이 교유했을 뿐입니다. 사람을 내고 들이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이 할 바가 아니며,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싫어하여 한갓 공론(公論)만 알아 서로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했을 뿐, 붕당을 지어 궤격한 짓을 했다는 것은 신의 실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 윤자임이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32세로, 성질이 본래 어리석고 다만 옛사람의 글을 읽어 옳고 그름을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의 일을 의논하고 생각하는 데에 더러 조광조ㆍ김식ㆍ김구ㆍ김정과 뜻이 서로 같아서 같이 교유한 것뿐입니다. 그 의논이 궤격하여 사사로이 서로 부화뇌동하였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은 실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 박세희가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29세로, 신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성품이 또 어리석고 밖으로는 행검(行檢)이 없습니다. 옛사람의 글을 읽고 시대에 알맞는 것을 참작하여 일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이 신의 직분입니다. 조광조는 신이 어려서부터 종유하였고, 김정ㆍ김식ㆍ김구와는 항상 교유하며 논의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궤격한 줄을 몰라 상종을 했을 뿐이요, 부화뇌동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 기준이 공술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향방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더불어 옛 도리를 강마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세도(世道)가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부화뇌동하였겠습니까.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기 때문에 서로 사귀어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습니다.”고 하였다. 《덕양일기》
● 박훈이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36세로, 성질이 본래 미욱하고 졸렬해서 옛사람의 글을 읽고 뜻을 세우고 행동하는 데에 옛사람을 본받기를 스스로 기약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밤낮으로 생각해 왔고, 또 스승과 벗이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조광조와 사귀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당적보》
● 정광필이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각각의 사람들이 진술한 내용을 보니, 과연 임금께서 대우가 융숭한 것을 믿고 이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죄를 주면 언로(言路)가 막히느냐 열리느냐에 관계되니, 임금께서 참작하여 잘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대로 반드시 임금에게 아뢰었을 뿐, 어찌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소신이 그들을 통제하여 누르지 못해 습속이 과격해지도록 하였으니, 먼저 신을 죄주소서. 이 사람들은 정상을 참작하여 파직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며, 지금 전교하신 것은 좀 과중한가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고, 또 이 사람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는데 내가 어찌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처리했겠는가.” 하자, 정광필이 반복해서 아뢰었다.
● 공초를 받아서 들어가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조정에서 벌써 의논을 정했으니, 형장(刑杖)을 쓰지 말고 조율하라.”고 하였다. 《동각잡기》
● 의금부에서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조율하라고 명하였다. 추관(推官) 김전(金詮) 등이 마땅히 간당(奸黨) 죄에 해당되는 율을 써서 마땅히 베야 하고 그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한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은 이것으로 죄를 결정한다.” 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네 사람은 사사(賜死)하고, 나머지는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다. 《석담일기》
● 조광조 등이 옥중에서 옷을 찢어 상소하기를, “신들은 모두 망녕되고 어리석은 자로서, 성주(聖主)를 만나 경악에 출입하면서 가까이 모셨는데, 다만 우리 임금의 거룩하고 밝으심만 믿고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뭇 사람의 시기를 받으면서도 단지 임금이 계신 것만 알고 그 밖의 일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임금이 요순과 같이 착하게 되기만을 바랐을 뿐, 어찌 몸을 위해 도모했겠습니까. 하늘의 해가 비추어 보니 다른 사심은 없었습니다. 신들의 죄가 진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나, 다만 사류(士類)의 화가 한번 열리면 장차 뒷날의 국가의 명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계신 데가 막혀 있어 생각을 아뢸 길이 없어, 말 한 마디 못하고 영원히 하직함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한번 친히 국문한다면 만 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정은 넘치고 말은 궁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 하였다.
● 날이 저물자 또 앉아 모두 지만(遲晩)을 취하였다.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 4명에게는 사형을 결정하고 나머지 4명은 장일백(杖一百)에 유삼천리(流三千里)로 아뢰니, 임금이 승지 김근사(金謹思)를 불러 탑전에서 판부(判付)를 쓰게 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과 김구는 장 1백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먼 곳으로 부처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을 받고 머뭇거리니 사관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다시 의논하는 게 옳겠다.” 하였다. 정광필 등이 빈청에 있는데 김근사가 나와 임금의 뜻을 전했다. 그 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정광필이 하교를 듣고 촛불을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고 곧장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이 직에 있는 지 또한 오래되었으나, 오늘같은 일이 생길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이같이 되었으니, 중죄라면 신들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힘써 사형에서 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을 따라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중대한 일이다.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해야겠다.” 하고, 승지 성운(成雲)을 불러 하교하기를, “조광조 등 4명은 장을 쳐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라.” 하였다. 성운이 판부를 쓰고 물러나자 정광필이 빈청으로 물러나 안당(安瑭)과 함께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과 땅 같은 어짐 덕분입니다. 그러나 다만 모두 병약하여 만일 장을 맞고 멀리 가면 중도에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고 사형을 감해준 실재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7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각잡기》
● 조광조 등이 금부에 갇히던 날 밤 모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밝은 달이 뜰에 가득히 비쳤다. 빈 마당에 늘어앉아서 서로 술을 따르며 이별하는데, 김정의 시(詩)에, “오늘밤 황천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인간을 비치네[重泉此夜長歸客 空照明月照人間]” 하였다. 김구는 또 옛 시를 읊기를, “흰 구름 속에 백골을 묻으면 영원히 그만, 공연히 흐르는 물만 남아 인간으로 향하네[埋骨白雲長已矣空餘流水向人間]” 하고, 또 시를 짓기를, “긴 하늘 밝은 달밤[明月長天夜]” 하니, 김정이 화답하기를, “추운 겨울 작별 애석히 여기는 때[儼冬惜別時]” 하였다. 모두들 조용히 자득(自得)하여 서로 말하기를, “차야(次野)이자의 자 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독 조광조만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하니, 서로 권면하기를, “조용히 의(義)로 죽어야지 어찌 울기까지 하는가.” 하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조용히 의롭게 죽어야 할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만, 우리 임금님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며, 밤새도록 울다가 이튿날 사형에 처한다는 말을 들은 뒤에 태연해졌다. 《덕양일기》
● 16일 밤 삼경에 모두 풀어주자 집으로 와서 조금 자게 하고,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 민가로 나가 있게 하였다. 또 모두 금부에 모이라고 명하니 승지 성운이 와서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서 본래는 위아래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한 다스림을 보려했는데,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 일을 처치한 것이 지극히 그릇되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또한 어찌 편안하겠으며, 죄주기를 청한 대신들도 또한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겠느냐. 너희들의 일이 여기에 이른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해서 먼저 그 기미를 막지 못한 탓이다. 만일 법대로 죄준다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이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했기 때문에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고 가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조광조는 만일 법대로 한다면 그 죄가 깊고 무거우나, 특별히 너그러운 처분을 내려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준다는 뜻을 자세히 전하라.” 하였다. 성운이 금부에 이르러 전교한 후에 회계(回啓)하기를, “딴 사람은 하는 말이 없었는데 조광조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이번에 가나, 임금의 마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신 등의 한 일이 과연 궤격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덕양일기》 《동각잡기》
● 화가 일어나던 날 관학의 유생들이 대궐 뜰에 와서 소리내어 울었고, 도성 안의 향도(鄕徒)들이 궁성으로 모여들어 도리어 남곤 등이 공갈한 유언비어를 실증한 것처럼 되니, 임금은 더욱 노해서 조광조와 김정에게 사사하라고 판하하였다. 《당적보》
● 이때 관학의 여러 유생들이 거리마다 들끓고 대궐로 달려오는 자가 무려 1천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광화문 밖에 모여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유생 신명인(申命仁)이 앞장서서 말하기를, “향도들도 모두 소를 올려서 원통함을 풀어 주고자 하는데, 하물며 우리 제생들이 해가 뜰 때 모여서 한낮이 되도록 소를 초안(草案)조차 하지 않은 것은 무슨 연고냐?” 하고, 드디어 붓을 잡고 소를 초하는데, 풍우같이 빨랐다. 여러 유생들이 모여들어서 소를 써서 바치려 하다가 문지기에게 거절당하니, 제생들이 비분강개하여 문을 밀치고 들어갔는데, 생원 박광우(朴光佑)는 상처를 입어 피가 흘러 얼굴에 가득했으며, 제생들도 혹은 망건이 벗겨지고 혹은 머리가 풀어져서 대궐 뜰에서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대내까지 들렸다. 임금이 묻기를, “곡성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니, 정원에서 사실대로 답하자 전교하기를, “유생의 일이 심히 놀랍다. 상처를 입은 중에 대궐 마당으로 함부로 들어왔으니 또한 그 죄가 있을 것이다. 궐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와서 호곡(號哭)한다는 것은 천고에 없던 일이다.” 하고, 이어 명하기를, “적발하여 5, 6인을 잡아 가두어 징계하라.” 하였다. 또 금군을 명하여 몰아내게 하니, 신명인이 여러 사람 속에서 앞장서 나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날에 한 나라 양진(楊震)이 잡혔을 때 태학생 3천여 명이 궐문을 지키고 호곡한 일이 있거니와 전하께서 오늘 하신 일은 진실로 천고에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소두(疏頭)인 생원 이약수(李若水)ㆍ윤언직(尹彦直)ㆍ박세호(朴世豪)ㆍ김수성(金遂性)ㆍ황계옥(黃季沃) 등 5인이 잡히자 제생들이 앞을 다투어 옥에 들어가려 하여 마치 차례에 들지 못할까 걱정하니, 옥이 이미 가득 차고 쇠끈이 또한 모자라 새끼로 목을 엮인 자들이 종루에 모여 있게 되었다. 금부에서 아뢰기를, “사람은 많은데 옥이 좁아 가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대신들도 또한 아뢰기를, “유생들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한 것이니, 불문에 부쳐서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이튿날 생원 임붕(林鵬) 등이 또 소를 올려 조광조를 구하는 데 대해 논하고 또 “어제 유생들이 옥에 갇혔으니, 신 등이 편안히 홀로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백 명이 모두 궐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임금이 이약수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그들의 상소에 답하기를, “조광조 등의 처음 뜻은 어찌 나라 일을 그르치려 하였겠으며, 임금도 또한 지극한 다스림을 보려했던 것인데, 근래에 이들이 과격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부득이 죄준 것이다. 대신들도 또한 조정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지 간사한 참소로 배척하는 소인들의 짓이 아니다.” 하였다. 《기묘당적보》 《동각잡기》
● 19일에 김전(金詮)으로 우상을 삼고, 안당(安塘)으로 좌상을 삼았다.
● 드디어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김정을 금산(錦山)으로, 김구를 개녕(開寧)으로, 김식을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를 상주(尙州)로, 박훈을 성주(星州)로, 윤자임을 온양(溫陽)으로, 기준을 아산(牙山)으로 귀양보냈다.
● 21일에 전교하기를 “내가 오직 덕에 밝지 못해서 한갓 정치를 잘하려는 뜻만 간절할 뿐 사람을 아는 밝음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에 크게 과오가 있었으니, 내 심히 부끄럽다. 저번에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암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이 모두 시종(侍從)에 있어서 성리학(性理學)으로 밤낮 강론하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사람됨이 더불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룩하겠기에 좋은 벼슬을 가려서 처하게 하고 차서를 뛰어넘어 벼슬을 옮기니, 내가 대우한 것이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조광조가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올려 쓰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해서 세력으로 서로 의지하여 중요한 자리에 들어앉아 이르기를, ‘조종(祖宗)의 법은 지킬 것이 못 되고 노성(老成)한 사람의 말은 쓸 것이 못 된다.’ 하여, 후진(後進)들을 유인하여 궤격한 것이 풍습이 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적에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반드시 극력 배척하고 막아서 기어이 꺾어놓고야 마니, 국가의 의논이 거꾸로 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되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은연중 분하고 탄식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이 한 바를 살펴보니,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귀결되었다. 사실이 이미 드러나 끝내 용서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마땅히 법에 의해 죄를 다스려서 백관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야 하나, 전날에 시종하던 일을 생각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해서 조광조 이하를 각각 그 죄대로 죄주니, 이 어찌 내가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오직 너희 의정부는 안팎에 포고해서 다 같이 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글은 남곤이 초한 것이다. 《동각잡기》
● 조광조 등이 옥에 있을 때 죄를 얻은 까닭을 알지 못하여 간신들이 임금을 속여서 한 짓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귀양가게 되자, 신상(申鏛)ㆍ유운(柳雲)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효직(孝直)이 까닭을 알지 못하고 가게 되니,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친한 유생을 시켜서 과천(果川)까지 뒤쫓아가서 말하기를, “남곤ㆍ홍경주ㆍ심정들이 남곤의 집에 모여서 의논해 먼저 참설(讖說)로 임금의 마음을 요동시켰으며, 거사하던 날 밤에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 대신들을 불러 그들의 이름을 열거해 써서 마치 조정에서 죄를 청한 것처럼 해서 죄준 것이다.” 하니, 조광조가 듣고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이 어찌 이같은 데 이르겠는가.” 하였다. 《야언별집》
● 한림 이구(李構)가 아뢰기를, “처음 모의한 사람과 신무문을 연 일을 들어서 기록하려고 하는데, 신이 사필을 잡았으면서도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를 청한 대신은 정광필(鄭光弼) 등의 단자(單子)에게 볼 수 있고 문을 연 일은 정원의 열쇠로 열었다.” 하자, 이구가 아뢰기를,“신이 정원에서 숙직했는데도 그 열쇠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승지들이 모두 간의대(簡儀臺)에 갔으니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이구가 아뢰기를, “그때 신도 또한 옥에 갇혔는데, 조광조 등이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이는 반드시 변란이 중간에 일어난 것이다.’ 하다가 새벽에 이르러서 까닭을 듣고 모두 술을 따라 주면서 서로 위로하기를, ‘이것이 임금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들이 죽더라도 무엇을 한하겠는가마는, 신의 생각에는 성스럽고 밝은 임금을 만났는데, 어찌 이같은 사리에 어두운 일이 있을 줄 생각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16일에 윤은필(尹殷弼)을 승지로 제수하니,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이 일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상하고 아픕니다. 신이 어젯밤 사경에 듣고 놀라서 서문 밖에 이르러 들어가 조그만 정성을 아뢰려고 하였는데, 명패(命牌) 외에는 들이지 않으므로 물러갔습니다. 그때 들어가려고 하는 지평이 있었는데 군사가 밀어내서 옷깃이 모두 찢어지니, 신이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삼사를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모두 갓을 쓰고 문 밖에 둘러앉아 있으니, 어찌 이같은 일이 있을 줄 생각했겠습니까. 신하가 밀계(密啓)하려는 것은 간사한 것이 아니면 아첨하는 것이니, 옛 글에도 ‘중서(中書)를 경유하지 않았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국가의 원기(元氣)가 이로부터 깎이고 상하였습니다.” 하였다. 《기묘록(己卯錄)》
● 그때 유운(柳雲)이 조광조를 대신해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집의 윤세림(尹世霖), 장령 이겸(李謙)ㆍ임추(任樞), 지평 조광좌(趙光佐)ㆍ신변 및 사간원 관원들과 더불어 모두 직에 나아가지 않고 함께 아뢰기를, “조광조 등은 모두 경망스럽고 소홀한 자들로서, 다만 성상께서 자기들의 말을 듣고 계책을 좇는 것을 믿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죄를 입었으니 신 등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으며, 전 대간들이 연고 없이 다 체차되었으니 역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으니, 반드시 다시 조광조를 쓰신 뒤라야 신 등이 직에 나갈 것입니다. 또 조정에서 사람에게 형벌을 줄 때에는 여러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여 마땅히 광명정대하게 해야지 속여 감춰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처음에는 신 등도 이 일이 간사한 무리들의 밀계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듣건대 전하께서 비밀히 홍경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조광조 등의 우익이 이미 이루어졌다. 전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자고 청할 적에는 내 생각에도 심히 좋다고 했더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대개 우익을 심으려고 한 짓이다. 이제 현량과 출신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하나, 다만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또한 그 속에 있으므로 하지 못한다.’ 하셨으니,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습니다. 임금의 세력으로서 한두 서생을 죄주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어두운 밤 사이에 비밀하게 하기를 이같이 하십니까. 겉으로는 친밀하고 믿음을 보이고 안으로는 제거할 마음이 있었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와 같으면 이것은 위태롭고 망할 조짐입니다. 신 등은 모두 통곡을 누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대간이 잘못 들은 말이다. 당초에 홍경주가 남곤ㆍ송일ㆍ김전 등의 집에서 들으니, 무사들이 당을 결성하여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하므로 함께 의논하기를, ‘이렇게 되면 장차 큰 변이 생기겠다.’ 하여, 조정에서 이와 같이 하였으니, 조광조 등에게는 복이다. 지금 이 일을 조정에서 깊이 생각하여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이사균(李思鈞)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서 부름을 받아 부제학에 임명되니, 사직하기를,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은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나, 필시 착한 일을 하려다가 지나친 일이 없지 않아서 미워하는 자가 많아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삼가 조광조 등에 대한 하교를 보고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만일 이 사람들이 다만 국가의 일을 위한 것이요 딴 생각이 없었다고 여긴다면, 그 죄를 마땅히 감해 주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전하의 마음에 의심과 막힌 바가 있는 듯 합니다. 상과 벌은 비록 필부에게 가하더라도 만일 지나침이 있으면 크게 임금의 덕에 누가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한 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친 이가 있었으나, 신 같은 변변치 못한 자가 어찌 임금의 마음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 감히 벼슬을 사양합니다.” 하자,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사균은 남곤 등의 의논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 등을 구하려고 몹시 애쓰니, 정언 조진이 공격해서 내쫓았다.
● 대사간 윤희인(尹希仁), 사간 오결(吳潔), 헌납 이충건(李忠楗), 정언 윤개(尹漑)ㆍ유형(兪炯)이 논계하기를 마지않았고, 유인숙(柳仁淑)ㆍ공서린(孔瑞麟)ㆍ홍언필(洪彦弼)ㆍ이성동(李成童)ㆍ이청(李淸)ㆍ송호지(宋好智)ㆍ김익(金釴)ㆍ권전(權磌) 등이 대궐에 나아가 청하기를, “조광조와 더불어 함께 옥에 갇혀서 같이 그 죄를 입겠습니다.” 하였다.
● 파릉군(巴陵君) 이경(李璥)이 빈청에 나아가 울면서 극력 간했고, 또 병조 판서의 자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희강(希剛.이장곤의 자)이 여우와 쥐들 속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함께 어진 이를 해친다.” 하고 갖은 말로 책망하고, 종실들을 거느리고 조광조를 구원하려 하니, 정원이 막고 들이지 않았다. 뒤에 이 일이 죄가 되어 귀양갔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이때 유운(柳雲)이 대사헌에 제수되자 사직하겠다고 한번 아뢰고 나서 조광조 등의 화를 구하기에 급하여 윤세림(尹世霖) 등과 함께 모두 사은 숙배와 사헌부의 상회례를 잊은 채 합문 밖에 엎드려 논계하였는데 심지어는, “신 등은 의리상 직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간인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은 본래 명망이 없다고 탄핵하여 이빈(李蘋)으로 대신했는데, 이빈이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올라오자마자, 유운이 사은숙배도 하지 않은 채 대번에 논쟁을 행하여 사체를 잃었다고 논박하였다. 《당적보》 《석담일기》
● 처음에 정광필이 유운으로 대사헌을 삼고 이사균으로 부제학을 삼았는데, 이 두 사람은 안으로는 기개가 있으나 밖으로 몸을 단속함이 없어 조광조 등에게 경솔하게 보인터라, 남곤 등이 생각하기를 그들이 조광조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니, 당시 사람들이 정광필의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석담일기》
● 유운이 대간들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전하께서 다시 조광조를 써 임금과 신하가 옛날과 같으면 신 등이 마땅히 직에 나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신들을 죽여서 간인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하며, 여러 날 간쟁하자 마침내 탄핵을 받고 떠났다. 《석담일기》
● 장령 이영부(李英符)가 상소하여 극력 간하고, 전한 정응(鄭譍)은 몹시 분하여 관원(館員)을 거느리고 항소(抗疏)하여 힘써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듣지 않았다. 《죽간한화(竹澗閒話)》
● 정응이 올린 차자의 대략에, “제비와 참새가 불타자 어진 새가 일찍이 가고, 어리석은 지아비가 죽음을 당하자 슬기로운 자가 멀리 가는 것이니, 이것이 포초(鮑焦)가 서서 말라 죽고 굴원(屈原)이 상수(湘水)에 빠진 이유입니다. 대개 나라에 선비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원기(元氣)가 있는 것과 같아서, 원기가 흩어지면 사람이 죽고 선비가 없어지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건녕(建寧)의 당화(黨禍)가 일어나자 한 나라 국운이 그릇되었고, 원우(元祐) 때 정기(正氣)가 꺾이자 송 나라가 위태로워졌으니, 이것이 진실로 전하께서 통촉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 12월에 조광조 등이 귀양가자, 뭇 소인들이 뜻을 얻어 유생 황계옥(黃季沃)ㆍ윤세정(尹世貞)ㆍ이래(李來) 세 사람이 소를 올려 조광조 등 8명을 죽이자고 청하니, 시론(時論)에 영합하여 말이 지극히 참혹하고 흉악했다. 황계옥이 처음에는 조광조를 구하다가 옥에 갇혔었는데, 한 달도 되기 전에 또 조광조를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말라고 청하니, 그 마음보가 사람답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임금이 상소를 보고 가상히 여겨 술을 내렸다. 《동각잡기》
● 9일에 양사가 합계하기를, “금부에서 조광조 등을 국문할 때에 조광조가 이장곤의 자를 부르기를, ‘희강(希剛)아.’ 하였고, 또 홍숙(洪淑)을 부르면서, ‘네가 어떻게 우리들을 심문하겠느냐.’ 하였으니, 만일 법대로 국문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금부 당상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즉시 양사의 장관을 불러들였다. 그때 대사헌 이신(李信)은 밖에 있었고 대사간 이빈(李蘋)과 집의 유관(柳灌)이 입대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광조의 행위가 과연 대간의 계사와 같다면 금부 당상을 심문해야겠다.” 하니, 유관이 아뢰기를, “저 사람들이 모두 갑자기 승진해서 임금으로부터 총애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교만 방종하기가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 황계옥은 목사 진(珒)의 아들이다 기묘년에 여러 사람들이 귀양가자, 어숙균(魚叔均) 숙권(叔權)의 형 을 찾아가 말하기를, “내가 소를 올려 조 대헌(趙大憲)을 구하려고 이미 초고가 갖춰졌으니 자네가 써 주게.” 하고, 마침내 소매 속에서 초고를 꺼내 보이고 말하기를, “상소의 뜻이 어떠한가?” 하니, 어숙균이 대답하기를, “이 상소는 심히 잘 되었네. 공이 선을 좋아하는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하고 갖은 말로 권하였다. 그런데 황계옥은 그 상소를 쓰지 않은 채 돌아갔다가 며칠 후에 윤세정ㆍ이래(李來)와 함께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조광조가 옛 법을 변란(變亂)시키고 붕당으로 국가를 그르쳤으니, 법으로 다스리소서.” 하였다. 조광조가 이로써 화를 만난 것이다. 대개 황계옥은 두 건의 상소를 지어 먼저 조광조를 구하는 상소를 어숙균에게 보이자 자기 의견과 맞지 않은 줄 보았기 때문에 쓰지 않고 갔으니, 그 간사하고 음흉스러운 정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패관잡기》
● 경상 좌도 감사 이항(二沆)을 대사헌으로 삼으니, 이항은 이세인(李世仁)의 아들이다. 반정 초에 이세인은 대사간이 되어서 곧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이항은 행실이 좋지 못해 선비들에게 용납되지 못했다. 경상 좌도 감사가 되어 우도 감사 문근(文瑾)과 더불어 상주(尙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마침 이날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해 와서 말하는 자가 있었다. 문근이 수심에 잠겨 병을 핑계대고 방에 들어가 앉아서 밤을 새웠는데, 이항은 득의양양하여 밤새워 잔치하고 즐기더니,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정광필이 말하기를, “나는 이항의 아버지의 친구인데, 이항이 어찌 내 말을 좇아 착한 사람들을 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가 부름을 받고 갈 적에 함양 군수(咸陽郡守)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작별하기를,
명공(明公)이 이번 길에 등선(登仙)할 것 같으니 / 明公此去似心仙
난국을 처리하는 데에 훌륭한 솜씨를 기다리네 / 盤錯應須利器剸
사냥이 끝난 뒤에 어찌 세 개굴을 가진 토끼가 없으리요 / 畋後豈無三窟兎
마침 독수리 한 마리가 가을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리다.” / 會看一鶚上秋天
하니, 이항이 기뻐하며 받았다. 사림들이 곁눈질하며 보았다. 부임하자 사류들을 모함하고 해치는 데 남은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 정광필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정광필을 반박했으니, 그 간사하고 독함이 이와 같았다. 《당적보》 《문근전(文瑾傳)》 《사재척언》
● 12월에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 등이 합계하여, 좌상 안당(安瑭),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우참찬 이자(李耔), 좌참찬 김안국(金安國), 대사헌 유운(柳雲), 황해 감사 김정국(金正國), 지평 조광좌(趙光佐), 이조 정랑 이충건(李忠楗), 남병사(南兵使) 유용근(柳庸謹), 승지 신광한(申光漢), 전주 부윤(全州府尹) 정순붕(鄭順朋), 충청 수사(忠淸水使) 한충(韓忠), 전한 정응(鄭譍), 사인 최산두(崔山斗), 검상(檢詳) 장옥(張玉), 이조 정랑 이희민(李希閔), 사인 이청(李淸), 교리 양팽손(梁彭孫), 이조 좌랑 구수복(具壽福), 정완(鄭浣), 이연경(李延慶), 이조 정랑 이약수(李若水), 수찬 권전(權磌), 교리 송호지(宋好智),현감 송호례(宋好禮), 도사 김광복(金匡復), 이조 좌랑 조언경(趙彦卿), 승지 유인숙(柳仁淑), 부정(副正) 윤광령(尹光齡), 홍문 박사 권장(權檣), 감사 문근(文瑾), 참의 이성동(李成童), 황해 도사(黃海都事) 신변(申抃), 좌랑 유성춘(柳成春), 파릉군(巴陵君) 이경(李璥),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 장성수(張城守) 엄(儼), 숭선정(崇善正) 총(灇), 강녕 부정(江寧副正) 기(祺) 등 36명을 죄주자고 청하고 단자에 써서 아뢰고, 또 현량과를 파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양사의 장관을 불러보고 황계옥 등이 조광조 등을 죽이자고 청한 상소를 보이면서 하교하기를, “조정에 만일 공론이 있다면 유생들이 어찌 이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동각잡기》
● 이항이 황계옥 등의 소를 보고 나서 아뢰기를, “법에 의해서 처단한다 해도 과연 무엇이 아깝겠는가마는, 조정에서 사대부를 대접하는 것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이빈은 아뢰기를, “시비가 한번 정해진 뒤에는 아랫 사람들도 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황토기사》
● 또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김전을 불러 입대하자 대간에서 올린 단자와 황계옥 등의 상소를 보이면서 이르기를, “요사이 재변이 겹쳐 생기니, 이들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정광필이 힘써 불가하다고 간하고, 김전도 또한 장본인을 이미 죄주었으니 그 나머지는 반드시 낱낱이 다스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동각잡기》
●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르기를, “이미 죄를 주었으니, 아무리 조광조라도 또한 알고서 고칠 것이다. 이제 그 동료들을 몹시 다스리는 것은 또한 옳지 못하며 붕당이란 말도 또한 심히 옳지 못하다.” 하니, 참찬 이유청(李惟淸)이 아뢰기를, “대간의 뜻은 사(邪)와 정(正)을 뒤섞어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사라고 지목할 수 없다.” 하니, 예조 판서 신상(申鏛)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사라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위협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것이 옛 도리이다.” 하니, 신상이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사직의 복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며칠 되지 않아 엄한 하교를 내려 조광조를 죽이고 한때의 선비들이 면한 자가 없었으니, 참소 하는 말이 다시 임금에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신상전(申鏛傳)》 《당적보(黨籍補)》
● 우상이 탄핵을 당하자 정광필이 사직하기를, “조정 사이에 인심이 어긋나고 사기(士氣)가 꺾였으니, 신같이 늙고 병든 사람이 어찌 정승 자리에 합당하리요. 다시 진정시킬 만한 사람을 가려서 빈자리를 채우소서.” 하고 간곡히 사퇴하기를 구하였다. 이에 황계옥 등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정광필은 수상의 자리에 있으니 정사를 어지럽히는 대부를 베는 것이 그의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범하고 죄인의 형벌을 늦추며 원수(元首)의 병을 구하지 않아 난액(爛額)의 공로를 도모한 자이니,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였다. 대간이 아뢰기를, “대신으로서 마땅히 국가의 일을 총람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힘써야 할 때를 당하여 시비를 정하지 않은 채 가운데 서서 관망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정부와 대간에게 묻기를, “소인이 조정에 가득 차 있어서 종묘 사직에 크게 관계가 되니, 대신이 진실로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서 시비를 정해야 할 터인데, 이웃집 일을 보듯 하니, 이 어찌 대신의 체통이겠는가.” 하고, 정광필을 좌천하여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당적보》
● 그때 정승 정광필이 안당을 구하려고 극력 도모하였는데 파직에 그쳤다.
● 정광필이 드디어 남곤과 어긋나 즉시 정승에서 파면되자, 조정에 다시 말하는 자가 없어 조광조가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사재척언》 《석담일기》
● 임금이 의심하여 망설이고 결정을 못하다가 이튿날 전교하기를, “당초에는 그 우두머리만 다스리면 나머지 무리들은 다스리지 않아도 조정의 추향(趨向)이 스스로 바로잡힐 줄 알았는데, 대신들이 국가 일을 보기를 마치 딴 집 일처럼 하여 머뭇거리고 관망하며 시비를 정하지 않으니, 이것은 형세를 보아서 그들이 죄 입는 경중을 따라 뒷날에 스스로 처신할 계획을 삼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를 다스리는 데 비유하면, 뿌리가 이미 끊어지면 가지와 잎사귀가 저절로 마르는 것이니, 대간이 근본을 다스리는 데는 힘쓰지 않고 한갓 가지와 잎사귀만을 다스리려 하니, 이것은 힘쓸 바를 모르는 것이다. 영상과 좌상을 급히 체직하고 새로 다른 정승을 임명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이날 어필로 남곤과 이유청을 제수하여 좌상과 우상으로 삼고, 김전을 올려서 영상으로 삼아 즉시 비현각(丕顯閣)에서 소대하여 조광조 등에게 죄 줄 뜻을 하교하고, 또 금부 당상 심정(沈貞)ㆍ손주(孫澍) 등을 불러서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를 사사(賜死)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을 절도(絶島)에 안치하라고 하교하였다. 남곤과 이유청 등이 아뢰기를, “4명 중에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 괴수를 죄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고,손주가 아뢰기를, “모두 절도에 안치해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을 보이소서.” 하고, 이항(李沆), 이빈(李蘋), 유관(柳灌), 헌납 유효의(柳孝義)가 아뢰기를, “조광조가 비록 죄가 있으나, 너그러운 법을 좇으소서.” 하고, 사간 남세준(南世準)이 아뢰기를, “조광조를 죄주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고, 정언 한승정(韓承貞)이 아뢰기를,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옥에서 심문 받을 적에 공손하지 않은 일로도 또한 죽어야 하니 사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절도에 안치하라.” 하였다. 또, “남곤과 이유청으로 하여금 임금의 탑전에서 회의하게 하여 양사에서 죄를 청한 사람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부표(付標)하여 경중으로 나누어 죄주라.” 하였다. 이청(李淸)ㆍ시산정(詩山正)정숙(正叔)ㆍ강녕정(江寧正) 기(祺)ㆍ숭선정(嵩善正) 총(灇)ㆍ장성수(長城守) 엄(嚴)은 벼슬을 삭탈하고, 유용근(柳庸謹)ㆍ최산두(崔山斗)ㆍ정응(鄭譍)ㆍ정완(鄭浣) 등은 부처(付處)하고, 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양팽손(梁彭孫)ㆍ이약수(李若水)ㆍ이희민(李希閔)ㆍ이연경(李延慶)ㆍ윤광령(尹光齡)ㆍ이충건(李忠楗)ㆍ조광좌(趙光佐)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는 고신(告身)을 뺏고, 안당(安瑭)ㆍ김안국(金安國)ㆍ유운(柳雲)은 파직시키고, 한충(韓忠)은 절도로 귀양보내고, 파릉(巴綾君) 이경(李璥)ㆍ안찬(安瓚)은 멀리 귀양보내고, 이장곤(李長坤)ㆍ권벌(權橃)ㆍ윤구(尹衢)ㆍ이구(李構)도 또한 추론(追論)해서 파직시켰다.
화가 일어나던 날 각 방리(坊里)의 소두(疏頭)인 충찬위(忠贊衛) 정의손(鄭義孫)ㆍ박자일(朴自逸)ㆍ안숭복(安崇福), 전의(典醫) 이성(李誠), 왜학(倭學) 정철현(鄭哲賢)ㆍ이세손(李世孫), 악생(樂生) 송기(宋冀), 서리(書吏) 최인석(崔仁碩)ㆍ이중진(李仲進)에게 모두 장(杖)을 쳤다. 왕자와 여러 군(君)으로서 조광조를 구하던 이의 종 학년(鶴年)을 장(杖) 100대를 치고 귀양은 속하였다. 《동각잡기》 《황토기사》
● 12월 16일에 천거과(薦擧科)를 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광조는 능성(綾城)에 귀양가 있었는데, 북쪽 담 모퉁이를 헐고 앉을 때에는 반드시 북쪽을 향하여 임금을 생각하는 회포를 폈다. 얼마 안 되어 사사하라는 명이 내리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니 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공손히 듣고서 죽겠다.” 하고, 뜰 아래 내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전지를 들었다. 전례에는 무릇 정승을 사사할 적에는 어보(御寶)와 문자 없이 다만 왕의 말씀만 받들어 시행하는데, 조광조가 묻기를, “사사하라는 명만 있고 사사하는 문자는 없는가?” 하니, 도사 유엄(柳渰)이 조그만 종이에 쓴 것을 보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있었는데, 이제 사사하면서 어찌 다만 종이쪽지를 도사에게 주어 죽이게 하는가. 만일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을 뻔했다. 국가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것이 이같이 초라해서는 안 되니, 그 폐단이 장차 간사한 자로 하여금 미워하는 이를 함부로 죽이게 할 것이다. 내가 상소하여 한 말씀 드리고 싶지만 하지 않겠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임금의 기체 후는 어떤가?” 하고, 다음으로 묻기를, “누가 정승이 되었으며, 심정은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하니,유엄이 사실대로 고하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죽는 것이 의심없다.” 하고, 또 묻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어떻다고 하는가.” 하니, 유엄이 말하기를, “왕망(王莽)의 일과 같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 듯하다.” 하자, 조광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왕망은 사사로운 짓을 한 자이다.” 하고,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집에 보내는 글을 쓰는데 한 자도 틀리게 쓰는 것이 없었다. 조광조가 조용히 죽음에 나가면서, 시자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은 모두 마땅히 얇게 하고 두텁고 무겁게 하지 말라. 먼길을 돌아가기 어려울까 염려된다.” 하였다. 유엄이 죽음을 재촉하는 기색이 있자 조광조가 탄식하기를, “옛날 사람이 임금의 조서를 안고 전사(傳舍)에 엎드려서 운 이도 있는데, 도사는 어찌 그리 사람과 다른가.” 하고, 시를 읊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니 / 愛君如愛父
하늘 해가 붉은 충성을 비추어 주리 / 天日照丹衷
혹은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 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 근심하듯 하도다. 밝은 태양이 땅에 임하였으니, 밝고 밝게 충성을 비추어 주리.” 하고 드디어 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조르려 하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하찮은 신하의 머리를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고 더욱 독한 약을 마시고 드러누워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으니, 바로 12월 20일로,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연보(年譜)》 《당적보》 《동각잡기》를 합하여 기록하였다.
● 소 수레로 관을 용인(龍仁)으로 옮겨다가 이듬해 봄 선산인 심곡리(深谷里)에 장사 지냈다. 성수침(成守琛), 홍봉세(洪奉世), 이충건(李忠楗) 등이 장사에 달려 왔고, 이연경(李延慶)도 또한 와서 제사지내고 잔을 드리고 서로 붙들고 크게 통곡하고 돌아갔다. 이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러싸되 동서쪽으로 각각 두 둘레, 남북쪽으로 한 둘레가 있었는데, 남북으로 둘러싼 것 외에 각각 두 줄기 무지개가 마치 큰 띠를 드리운 듯 하늘에 뻗쳤고, 또 남서쪽에 따로 한 줄기 무지개가 있어 길이가 한 길 남짓하였는데, 모두 한참 만에야 없어졌다. 〈연보〉 정암
● 박상(朴祥)이 시를 지어 곡하기를
누가 알았으랴, 남대(南臺)의 옛 자의(紫衣)가 / 不謂南臺舊紫衣
소 수레로 초라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줄을 / 牛車草草故鄕歸
이 다음 지하에서 서로 만날 때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의 만사가 그릇된 것은 말하지 마세 / 莫話人間萬事非
하고, 또
분수원(分手院) 앞에서 일찍이 손을 잡았더니 / 分手院前會把手
괴상하도다, 그대 황각(黃閣)에서 주애(朱崖)로 떨어지다니 / 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黃閣)을 분별하지 말라 / 朱崖黃閣莫分別
구천에 이르러 보면 차등이 없으리 / 經到九原無等差
하였다. 《당적보》
● 조광조가 죽자, 정광필이 가장 상심했는데, 아무리 남곤이라 할지라도 또한 슬퍼하였다. 성세창(成世昌)은 꿈을 꾸니, 조광조가 평소처럼 시를 지어서 성세창에게 주기를
해가 떨어지니 하늘이 먹과 같고 / 日落天如墨
산이 깊으니 골짜기가 구름 낀 것 같도다 / 山深谷似雲
임금과 신하 사이에 천 년 의리가 / 君臣千裁義
슬픈 하나의 외로운 무덤이로다 / 惆悵一孤墳
하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야언별집(野言別集)》
● 조광조가 사사되자 그의 아우 조숭조가 달려가 길가에서 우니 한 노파가 산골짜기에서 울며 와서 묻기를, “낭군은 무슨 일로 우는가?” 하니, 조숭조가 답하기를, “나는 형님이 죽었기 때문에 울지만, 노파는 어찌해서 우는가?” 하자, 말하기를, “국가에서 조광조를 죽였다고 들었다. 어진 사람이 죽으니, 백성들이 반드시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운다.” 하였다. 《기묘록》
● 10여 년 뒤에 유엄(柳渰)의 아들이 가문의 화에 뜻밖의 재앙을 당해 비명에 죽으니, 비록 스스로 지은 재앙은 아니지만 그 아비가 큰 현인의 죽음을 늦추지 않은 데 연좌되어 천도(天道)가 되돌리기를 좋아하는 탓에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송계만록(松溪謾錄)》
● 김식(金湜)은 절도로 이배되자 망명하다가 자살했고, 김구(金絿)는 남해(南海)로 옮겼다가 신사년에 다시 임피(臨陂)로 양이(量移) 되고, 계사년에 풀린 뒤에 죽었으며, 김정(金淨)은 진도(珍島)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제주(濟州)에 위리안치되었다. 윤자임(尹自任)은 북청(北靑)으로, 박세희(朴世熹)는 강계(江界)로, 박훈(朴薰)은 의주(義州)로,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도로 귀양갔다.
● 세상에서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병조 판서 이장곤, 형조 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 응교 기준, 유생 신명인(申命仁)을 팔현(八賢)이라고 한다.
● 뒤에 의논하는 자가, ‘위협하여 따른 자는 치죄하지 말라.’는 의리에 따라서 북문(北門)의 일을 꾸민 정승에 대해 오히려 그 주범과 종범(從犯)을 구별하려 하니, 아, 억지로 끌어다 맞춘 것이 너무 심한 경우이다. 당초 고변(告變)할 적에 비록 그들의 간사한 계교가 이미 대궐에 통했다 하더라도, 김전(金詮), 고형산(高荊山),홍숙(洪淑)이 없었다면 공론(公論)이라 칭탁하고 속임수를 써서 임금의 밝음을 가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만일 황계옥(黃季沃)과 윤세정(尹世貞)이 없었다면 선비들의 공론이라고 말하여 죄를 줄 수 없었을 것이며,또 이빈(李蘋), 이항(李沆), 채침(蔡忱)대사헌, 조침(趙琛)참판 이 없었다면 당을 지어 세력을 가지고 벼슬아치들을 해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므로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서 벌을 내림이 더욱 참혹하니, 혹은 억지로 죽기도 하고, 이항, 심정 혹은 육체를 괴롭히기도 하였다. 이빈과 성운 홍경주, 김전, 이빈, 성운, 채침, 조침이 4, 5년 사이에 계속해서 죽고 망하였으며, 병술년에는 남곤이 죽고, 이항이 매맞고 귀양가고, 심정이 내쫓겼다가 신묘년에 함께 죄를 입어서 죽고, 이행이 또한 귀양가 있다가 송장까지 검사를 당하였다. 눈앞의 잠깐 동안의 영화 때문에 악취를 영원히 남겼으니 어떠한가. 《당적보》
● 혹자는 말하기를, “당시의 일이 속여 감추고 어리둥절한 데서 나와 사관들이 모두 입시하지 못하여 그 도깨비 같은 실상을 기록하지 못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찬수(撰修)할 때에도 간신이 일을 맡아서 실상과 다른 일이 많기 때문에 간혹 기묘년의 여러 어진 이를 그르다 하는 자가 있으니, 분통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조광조 등이 배운 바가 바르고 또 임금의 신임을 오로지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제거하면서 조금도 애석히 여김이 없으니 어째서인가. 대개 세상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그 탐욕스럽고 음란하고 간사하고 독한 것은 모두 깊이 미워하지 않아도, 오직 세력으로 임금을 핍박하고 위태로움을 도모한다고 말하면 아무리 명철(明哲)한 임금이라도 그 술수 속에 빠지지 않는 이가 드물어서, 간적(姦賊)들이 어진 이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죽음도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하였다.
● 경진년에 김세필(金世弼)이 명 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데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북문의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남곤과 심정이 과연 선비들의 씨를 없애는구나. 한충(韓忠)이 일찍이 말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효직(孝直)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는데, 간사한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벌써 그를 원망하였다. 그가 돌아와 형조 참판과 특진관(特進官)으로서 경연에 입시하여, 《논어(論語)》의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장을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사람은 허물이 없을 수 없는 이니,허물이 있음을 알아 뉘우치고 깨닫는데 용감하여 속히 고치면 마땅히 충후(忠厚)한 군자가 될 것이요, 혹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여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자포자기한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지난날 조광조의 무리가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려고 하므로 전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신임하니, 이에 신진(新進) 선비들이 반드시 하루아침에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여 삼대의 정치를 베풀려 했던 것인데, 전하께서 지나치게 그 말을 쓰시어 도리어 오늘날의 근심을 끼친 것입니다. 이들은 일대의 이름 있는 사람들로서 비록 과격한 실수가 있지만, 그것은 옛날의 좋은 정치를 끌어다가 한갓 속히 하려는 정성으로 번독스럽게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다만 그 과격함을 책망하시어 온화함으로 인도하여 다시 감화시킨다면 전하의 포용하는 덕이 장차 옛날 제왕과 같을 것인데, 이에 귀양보내고 내쫓아서 당파로 연루시켜 하루아침에 사사하여 지극히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끝에 가서는 한쪽으로 치우친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할 뿐입니다. 옛사람이 배 타는 것으로 그 편중되어 뒤집히는 근심을 비유한 자가 있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또한 꺼리지 말고 지난날의 허물을 용감히 고치소서.” 하고, 반복해서 말을 하는데 말마다 눈물을 흘렸다. 한림 상진(尙震)이 나와서 탄식하기를, “오늘날 처음으로 바른 말을 들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삼공 김전ㆍ남곤ㆍ이유청 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지난번 경연에서 한 정승이 말하기를, ‘조광조가 죄를 입은 것이 잘못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정승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 같이 말을 했으니, 추문(推問)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사헌 홍숙(洪淑)과 대사간 조언방(趙彦邦)이 합사하여 아울러 김세필을 탄핵하며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자고 청했다. 《동각잡기》 《전언왕행록》 《십청집(十淸集)》비명(碑銘)
● 김세필(金世弼)을 국문하자는 내용에, “조광조의 죄상은 조정에서 이미 법에 의해 처단한 것인데, 김세필이 정승의 반열에 있으면서 시비를 현혹시키고 어지럽혀 의논이 정해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여 장(杖)을 쳐 음죽(陰竹) 유춘역(留春驛)으로 귀양보냈다. 우암(尤菴)이 지은 〈비문〉
● 말하는 자가, “상진은 사국(史局)에 합당치 않으니, 서반(西班)으로 옮기소서.” 하여 사과로서 전적에 임명하였다. 《명신록》
● 기묘년 변이 있은 후에 어떤 사람이 크게 취해서 여강(驪江)으로 내려가다가 원주(原州) 경계에 이르렀다. 때마침 쌓이던 눈이 비로소 그치고 강물이 맑아 밑이 보이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며 하늘을 우러러 웃다가 또 소리를 내어 크게 울더니, 배 꼬리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관주(官酒) 따라 잔 수를 헤아리지 않으니 / 官酒斟來不計巵
눈 갠 강 길에 일부러 느릿느릿 가네 / 雪晴江路故遲遲
배를 띄워 점점 동해가 가까운 것은 기쁘나 / 乘桴漸喜東溟近
다시 인간을 향하여 이별하기 아깝도다 / 還向人間惜別離
하였다. 이는 당시의 숨어 있는 선비가 지은 것인데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임오년(1522)에 마침 가뭄이 들었는데, 강령현(康翎縣)에서 세 사람이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가뭄이 이같으니 올해에도 역시 반드시 흉년이 들 것이다. 근년에 들으니 정승 조광조가 대단히 맑고 검소해서 뭇 벼슬아치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각 도와 고을에 청탁하는 편지가 전혀 없고, 이 때문에 시골 마을에 또한 소리지르고 호통치는 관리가 없었는데, 이제 들으니 귀양가서 죽었다 하니, 하늘의 재앙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듯하다.”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울로 와서 고발하니, 즉시 잡아다가 고문해서 마침내 중한 형벌을 당했고, 같이 김매던 사람은 듣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에 연좌되었으며, 고발한 자에게는 면포를 상으로 주었다. 《패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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