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 6,7-13)
Jesus summoned the Twelve
and began to
send them out two by two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말씀의 초대
아모스는
예언자의 길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남왕국 유다 출신이면서도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북왕국의
베텔에 가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임금과 사제의 권위도 아모스가 전하는 하느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제1독서). 에페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마련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때에 약속의 보증인 성령을 받는다(제2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타당하고 옳은
말인 줄은 잘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 출신인 그가
북왕국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외치고 있으니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모스도 본인이 자원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서 그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느님께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말하면서 많은 이가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짊어지고 그분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힘이 없고 억눌린 사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 자신의 의사마저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신원과 역할 때문에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고달팠는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의 경우처럼, 힘 있고 가진 사람의 눈에는 예언자의 외침이 늘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해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사실 지금까지
제거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먼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소유로 속량될 것입니다.
글을 집중적으로
써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잡지사에서 부탁한 글이나, 방송 원고를 써야 할 때에는 글을 정신없이 써야 하지요. 몇 달 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앉아서는 도저히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문득 어떤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책들을 짊어지고
조용한 곳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저 역시 책들을 가방에 넣고 목적지도 특별히 정하지 않고 훌쩍 떠났습니다. KTX 정류장에 가서야
목적지를 부산으로 정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찾은 부산, 특별히 신학생 때에 그곳에서 가졌던 좋은 기억이 떠올려져서 떠난 장소였지요. 옛
기억을 떠올리면 글을 잘 써질 것만 같았습니다.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제 생각과 달리 부산에서 아무런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사람만 엄청 많이 보았지요.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산책을 나가도, 숙소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경치 좋은 곳의 카페에 자리를 잡아도 글을 쓰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잘 떠올려지지 않더군요.
결국 부산에서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하루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집에 오니까 글이 써지기 시작하더군요. 이때 느낀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바로 잡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환경
탓을 많이 합니다. 또한 주변의 영향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은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먼저 바로 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불가능한 것은 없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시키십니다. 그런데 둘씩 짝 지어 보내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지요. 먹을 것도 필요할 것 같고, 급한 일이 생길 때 필요한 돈도 있어야 할 것 같고, 갑자기 추워지면 입어야 할 옷도 필요한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파견을 하실까요? 어쩌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세상의 다른
조건들을 필요하지 않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의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그런 세상의 조건들이 없어도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사명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여러 이유를 들어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시간이 없어서, 건강상의 이유로, 가정의 문제 등의 이유를 들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필요 없다고 하시지요. 마치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외부 이유를 붙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신영복).
첫 번째 펭귄이 됩시다
남극에 가면
펭귄들을 볼 수가 있지요. 그 추운 곳에서 펭귄들은 바다로 뛰어 들어 먹을 것을 마련합니다. 사실 그 차가운 바다 앞에서 펭귄들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 앞에서 뛰어 들지 못해서 무리지어 있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한 마리 펭귄이 뛰어듭니다. 그러면 다른 펭귄들도
잇따라 그 뒤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첫 번째
펭귄이 없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추운 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지요. 그 첫 번째 펭귄이 있었기에 추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질 수 있고, 또
원하는 먹이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내가 되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할 때, 내가 먼저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모든 이들이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이다(신영복).
하느님께로
귀의
-이기정신부-
옛날에는
마귀들린 사람이 많았는지 의학 미발달로 그리 봤는지 모릅니다. 지금 보면 치매 암 계통 풍 등 아직도 의학이 해결 못할 병이 많습니다.
시대상황이야 어떻든 하느님의 능력은 언제든 발동가능 상태라 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하느님께로 귀의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생활 하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유혹, 욕심)도 물러가고 마음이 편해 병들도 낫게 될 테지요.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코
6,12~13)”
영웅이신
예수님
-박재식
신부-
신문과 TV에
관심을 끄고 살아가기로 결심을 해봤습니다. 언론에서 거짓과 슬픈 소식만을 전달하고 있는 현실이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살자고
다짐했지만, 결국은 신문ㆍ방송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많은 영웅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과 함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메르스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의료진의 소식을 접하면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이들처럼 눈물 흘리고, 좌절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회개와 자유를 통해 진정한 기쁨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동지침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 경험을 나누며 제 자랑을 할까
합니다. 용서를 부탁합니다. 16년 전 병자 영성체를 다닐 때 일입니다. 한 할머니께서 제가 방문할 때마다 점심을 주문해 주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간병인 제도가 보편화 돼 있지 않아서 환자 집에 방문하면 정결하지 못한 환경과 독특한 냄새 때문에 솔직한 심정으로 빨리 나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정성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식사를 했습니다. 방문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페루 선교를
준비하면서 할머니와 만남은 중단됐습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본부에서 교육을 받던 어느 날, 수업 도중 전화가 와서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전화를 해보니 할머니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임종 전에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신부님과 통화를 원하셔서 전화를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죄송한 마음과 함께 마음속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할머니를 위한 미사와 기도를 봉헌했던 기억이 납니다.
페루
리마본당에서 사목하던 시절 매주 목요일에 미사를 봉헌하던 한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사 후에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여성이 다가오더니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혹시 거짓말로 나를 납치하려는 것은 아닌가?’, ‘나를 유혹해 금품을 노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교우들과 함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증인(신자)을 통해 제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는 사실이었습니다. 80대 초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한 달 사이에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를 베풀고 가족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할아버지와 자주 대화를 나누고 성경을 읽어드리고 기도를 해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그 여인이 미사에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장례미사를 청하러 왔나? 아니면 더 병세가 악화돼 따지러 왔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공지 시간에 발언권을 요청하더니 “빠드레(아빠, 신부) 토마스가 우리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가신 다음 날부터 할아버지가 걷기
시작했고, 말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 동네에 ‘기적을 일으키는 신부’라는 소문이
돌아 미사 참례 신자도 많아지고 대접도 잘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은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테세우스전’에 보면 테세우스는 진실한 마음으로 마을과 가문들을 찾아다니며 “아테네를 왕이 없고
민중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주는 도시국가로 만들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에게서 편견과 이기심이라는 병, 명예와
성공이라는 우상, 거짓이라는 마귀를 퇴치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들의 영웅이신 예수님!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최득수신부-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진 것 없이 떠나도록 하라.”며 제자들을 파견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산을 오를 때는 눈썹도 떼어놓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짐스러운 것은 다 버리고 따르라는 것이고, 지나치게 많이 준비하는 것,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오히려 짐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들과 함께 살고, 함께 나누면서 선교했던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회고한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다가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는, 힘없고 돈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물질로써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나 재능을 가지고 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그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그런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도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요긴한 것, 꼭 한 가지만은 준비해야 하는 준비물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의지하는 마음, 그
지팡이 하나만은 빠뜨릴 수 없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생명까지 버리면서, 사랑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 그분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마음, 이 한 가지만은 꼭 챙겨야 할 가장 중요한 필수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하신 이 말씀의 뜻은, 전적으로 주님만 믿고 따르며, 주님께만 의지하여
선교하도록 하라는 것이고, 주님만 믿고, 주님 하고만 떠나도록 하라는 것이며, 그 이외의 것은 어떤 것이든 다 짐이 되고,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온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 같은 것, 더더구나 이기심과 편견 같은 것은 더욱더 독이 되고 금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 제자로서 너무 많은 것을 지닌 채 따르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오늘의 말씀을 늘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한 눈 팔지
마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묵히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의
처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융통성 없는 사람취급을 받습니다. 신호위반, 속도위반, 음주운전을 하고도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 삼아 얘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도 모르게 내 가치관을 흐리게 하고 잘못된 것을 합리화하게
됩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것은 어둠의 세력이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호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원칙을 준수하고 근본에 충실한 것이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일이 결코 먼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인간적인 유익 때문에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내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마음먹고 돈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고급사진기를 사서 자동차 뒷자리에 놓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정 방문을
하고, 봉성체를 하고 할 때 문득 문득 그 카메라가 생각났습니다. 정성으로 기도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시간에 자동차 문을
잠갔나? 누가 가져가면 어쩌지! 하고 마음은 카메라에 가 있었습니다. 고급 카메라 때문에 쓸데없는 근심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본당신부 발령 받고
새 자동차를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긁어 놓으면 어쩌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렸습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 한
것은 돌려 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이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조재형신부-
요즘은 계산기가
있어서 편리하지만 예전에는 주판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사칙연산’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실시간 교통
상황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편리하지만 예전에는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있는 ‘현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법칙과 원칙은
복잡한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길잡이와 같습니다.
며칠
전,
신학생들과 함께
‘청소년
사목’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청소년 사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하는
3가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버려
두세요,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너나 잘
하세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꿈,
이상,
사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듯이,
아이들의 마음과
접속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의 중에
3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도 힘들 것이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은 발전이 더딜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 하도록 하는 것은 사명의 문제이고,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그날 몇 가지
법칙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이 전부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첫째는
80
: 20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재화의
80%는
20%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20%의 사람이 대부분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20%의 사람만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미의 세계에서도
20%의 개미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90
: 10의
법칙입니다.
‘핸드폰을
사용하고,
자기 차가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안에 든다고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의 차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늘 먹을 양식
때문에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99
: 1의
법칙입니다.
예전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걱정했다면 이제는 잃어버린 99마리의 양을
걱정해야 할 때라고 합니다.
특히 청소년 사목은
그 상황이 더욱 심각한 것 같습니다.
99.9
: 0.1의
법칙입니다.
비전과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0.1%라고
합니다.
이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효과적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야 할 곳을 알고
길을 떠나는 사람과,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결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99.99
: 0.01의
법칙입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오늘의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자신감을 키워 주는 사람입니다.
상실과
체념,
절망과 고통 때문에
하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 오를 수 있도록 발판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탐욕과
허세,
교만과 분노로
그릇된 길로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자본의 힘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힘에
빠져드는 사람들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를,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던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자세와 태도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참된 예언자는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제자들은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사랑의
선교회’는 바로 이런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꽃동네의 오 웅진
신부님도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고
하였습니다.
꽃동네는 우리
사회에 갈 곳 없는 분들이 마지막으로 의탁할 수 있는 사랑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의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회개의
삶
-자유의
길-
-이수철신부-
세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상징성이 깊은 예화입니다.
1.
얼마전
피정을 다녀간 형제분이 전역을 앞두고 정장을 하고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알고보니
현역의 대령으로서 오랜 군생활의 마감을 앞두고 주님께 인사차 수도원에 들렸던 것입니다.
순간 '아,
무겁겠다. 착각할 수 있겠다. 자유롭지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훈장들과 갖가지 번쩍이는 장식들인 단추, 계급장등
너무
무겁고 부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다음
얼마후 전역을 하고 남방을 입고 온 모습이 참 경쾌하고 자유로워보였습니다.
정말
나에 맞는 마음의 옷을 입고 가볍고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2.
얼마전
단체피정을 계획중인 젊은 형제가 전화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피정 강론도 부탁했습니다.
그대로
현실의 어려움이 감지되는 듯 했습니다.
노년은
물론이요 젊은이들의 현실적 두려움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많은
이들이 불확실한, 불투명한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여
'두려워하지 마라'는 강론 제목을 넣어 검색해 봤더니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같은 제목들이었습니다.
여기
수도원의 십자로 예수부활상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도
대다수
수도형제들이 찬성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오늘날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아,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다시 생각했습니다.
3.
며칠전
일간지에 나온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라는
저명인사와의
인터뷰시 나눈 대화들입니다.
-(안희경)=
제가
작년에 지그문트 바우만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인간의 역사는 '추의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88세
사회학자가 말하길, 젊어서는 진보를 '직선운동'이라 여겼는데,
나이들어
되돌아보니 계속 후퇴를 반복하는 추의 운동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매우 낙담했더랬습니다.
저는
그래도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해간다고 여겼거든요-
"(아옌데)=
저
또한 나선형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 나선형 안에서 추의 운동 같은 반복이 나와요.
항상
후퇴하곤하죠.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죠.
그래서
우리가 좀더 주의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있었던 실수투성이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이뤄내기도 하며 역사는 물러갔다 앞으로 나가요.“
여러분의
관점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물론 나의 역사는 '퇴보의 추의 운동'이라 여깁니까,
혹은
'진보의 직선운동'이라 여깁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선형'이라 여깁니까,
혹은
'나선형 안에서 추의 운동'이라 여깁니까?
우리
믿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답은 하나, '나선형 안에서의 추의 운동'입니다.
물러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 후퇴했다 이보 전진하는 나선형 안에서의 추의 운동 같습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 요소가 회개입니다.
제가
많은 식자들의 논의를 보면서 깨닫는 점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회개를 제외시킨다는 것입니다.
정답을
놔두고 계속 주변만 맴돈다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도 잘 들여다 보면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회개만이 나선형 안에서 추의 운동중에 끊임없는 전진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인류는 물론 나 개인이 살 길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파견 받은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한 일도 '회개의 선포'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의 선포한 메시지도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회개의 삶-자유의 길'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길은 회개의 삶, 하나뿐입니다.
마음으로뿐
아니라 실천을 통한 회개입니다.
무엇이
회개의 삶입니까?
첫째,
성소에 충실한 삶입니다.
회개는
성소(부르심)에 충실한 삶입니다.
한번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는 끊임없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
앞 내 제자리에서 내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을, 내 삶의 목표를, 내 삶의 방향을, 내 삶의 의미를,
바로
주님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중심을,
목표를, 방향을, 의미를 잃어 혼돈 중에 방황이요 점증하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성소의 발견이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1독서 아모스의 확신에 찬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한 아모스입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부르심을
받아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부르심이
없었다면 무명속에 살다가 무명속에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살다가 사라져갈 우리들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아모스처럼
양상이나
정도는 달라도 모두 주님께 붙잡힌 축복된 사람들입니다.
세례
받아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 가고 있을 까요.
부르심에
충실하여 참 나를 살 때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이요 참 자유인의 삶입니다.
둘째,
존재에 충실한 삶입니다.
소유가
아닌 주님 안에서 존재의 삶이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존재에
충실할 때, 주님과의 우정도 깊어지면서 서서히 내려 놓게 되는 소유의 짐들입니다.
불필요한
가면도, 마음의 옷들도 벗어버리고 가볍고 홀가분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존재에
충실할 때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니 실상 내적 부요의 삶입니다.
오늘
2독서 에페소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은총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주님
안에 머물러 존재에 충실할 때 누리는 넘치는 축복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합니다.
이
찬미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8회)'란 말마디가 부단히 반복됩니다.
우리
삶의 제자리는 새삼 '그리스도 안'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음이 바로 존재에 충실한 삶이요 충만한 기쁨이요 충만한 행복입니다.
여기
우리 삶의 최종 의미가 밝혀지는 대목이 셋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6절).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12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16절).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이자 신원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궁극의 진짜 신원입니다.
우리
인생 문장의 주어인 하느님을 모름으로 자기를 잊고, 잃고 살아가는
껍데기,
헛개비, 유령인생은 얼마나 많은지요.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돌판에 새겨진 분도회의 모토도 이와 일치합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바로 이런 파스카의 주님안에 머물렀다 파견 받기에
이런
자발적 기쁨에 무소유의 삶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으로 충만할 때 저절로 가면은 벗게 되고 불필요한 짐은 내려 놓게 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얼마나
가볍고 홀가분해 보이는지요.
이렇게
최소한의 소유에 만족할 때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됩니다.
충만한
존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고 떠나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두려움 없는 자유인의 삶입니다.
셋째,
파견에 충실한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는 끊임없는 파견으로, 새로운 시작으로 직결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뿐 아니라 이 기쁨을 나누게 합니다.
아,
바로 이것이 앞당겨 체험하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복음선포를
통한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요 본질적 사명입니다.
선교없는,
파견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만
가벼워져 홀가분한 자유를 누릴 게 아니라
이웃의
짐을 가볍게 해주고 홀가분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을 만남으로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 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회개의 선포에 이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서 병을 고쳐줌으로
이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고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고 참 자유인이 되게 해줍니다.
그대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의
삶만이 자유의 길입니다.
부르심에
충실한 삶, 존재에 충실한 삶, 파견에 충실한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이 셋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셨고,
당신
안에 머물러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며,
당신으로
충만케 하신 후 당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끝으로
오늘 아침에 쓴 '축복'이란 자작시 나눕니다.
-하늘길/수도원길
걸어보라
메타세콰이어/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눈들어/하늘
희망 가득 담고
가슴
활짝 열어/초록빛 사랑 가득 담고
힘차게/믿음의
두발로 걸어보라
본래의
참 모습/땅이 되고 하늘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마르 6,7)
-오상선신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주로
혼자 활동하였습니다. 기득권층들이
싫어하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온갖
박해와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홀로
파견하시지 않고 둘씩
짝지어 보내시네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소명은 홀로
독불장군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행여 빠질 수 있는 오류나 위험으로부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라는 뜻이었을까요?
여하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동반자 내지는 협력자를
항상 보내주십니다.
오늘은
나의 조력자로 나와
하느님 나라 여정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가 누군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가 없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출청소년들을
밤거리로 내모는 악마들 -박영식신부-
필자가
로마에서 마지막 두 해(1983-1984년)를
이탈리아 사제들의 기숙사인 ‘성직자의
집’Casa
del Clero에서
머물렀다.
이곳은
로마시내 한 가운데라 날마다 저녁식사 후에는 문화유적지로 산책을 갈 수 있다는 이점 말고도 학교가 가까워서 퍽 좋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기숙사에서 이탈리아인 쟝 프랑코 롤피Jean-Franco
Rolphi부제와
친하게 지낸 것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인상적인 체험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퀴즈 왕으로 꽤 유명했는데 오상의 기적을 받은 성 비오 신부님 만나 회개해서 명성과 재물을 다 버리고 플로렌스 교구 신학교에
들어와서 로마로 유학 온 부제였다.
주말이
되면 그는 사라졌다가 주일 저녁이 되어야 나타났다.
호기심과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주말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세운 ‘사랑의
선교회’에
속한 수녀님들을 도우러 주말마다 나가는 것이지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수녀님들은
함께 로마 역 광장에서 노숙자들과 알콜 중독자들과 마약 중독자들을 모아 씻겨주고 먹이고 치료하고 재워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남은 음식을 얻으러 다니는 음식물 공급책임을 맡았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뿐만 아니라 수녀님들에게 덤벼드는 노숙자들을 통제하고 목욕시키는 일도 거들곤 한단다.
책임수녀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직접 소위 인간말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수녀님들은
로마시장의 배려로 흐름한 집을 얻어 살았는데 가진 것이라곤 내의 두 벌과 이불 한 채밖에 없었다.
롤피
부제와 위 수녀님들은 로마에서 노숙자와 알콜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를 만들어내는 악마들을 예수님과 함께 내쫓기 위해 헌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 제자로 불러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러한 권한을 주어 많은 악마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
우리가
내쫓아야 할 마귀들은 누구일까?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독감에서 드러났듯이,
국가
전체의 안전망을 망가뜨린 악마,
정치인들과
공직자들과 경제인들과 언론인들 가운데 부정부패를 일으키는 악마,
이혼율의
급증으로 가정을 파탄시키는 악마,
한
해에 2만
명이 넘는 가출 청소년들을 성매매로 내모는 악마,
사랑과
정의와 신의를 내동이치고 물질만능주의를 부채질하는 악마 들일 것 같다.
우리나라는
가정파탄을 일으키는 악마 때문에 가정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는 앳된 청소년들이 날마다 밤 유흥가로 모여드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폭력이 심하거나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인 경우 청소년들은 집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출을 한 어느 소녀는 제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간경화 합병증에 시달리다 얼마 전 죽었다.
가출
청소년들이 거리를 방황하며 방을 하나 얻어 모여 사는 가정,
‘가출팸’을
만들었다.
이렇게라도
잘 곳을 구하지 못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룻밤
잘 곳과 음식을 마련할 돈조차 떨어지면 범죄의 유혹에 빠져 어른들처럼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살해당하거나 최소한 인격의 품위마저 짓밟히고
만다.
악마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이런 가출청소년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이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거리 생활임에도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이들은 10만
명쯤이나 된단다.
집으로
돌아가야 다시 집을 나와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쉼터,
적어도
버스로 만든 이동 형 쉼터라도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은 가출청소년 긴급 구호와 취업 같은 자립을 돕는 법안을 아직까지 통과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이 선거권이 없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란다.
전국에서
청소년 쉼터 109곳이
운영되고 있으나 2014년
54만
명 이상이나 되는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자리와 재정지원이 턱없이 부족해 제 기능을 못한다.
위에서
살펴본 악마들은 쟝 프랑코 롤피 부제(지금
플로렌스 시내 본당 신부)
같은
성직자,
오늘도
로마 역에서 알콜,
마약
중독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내쫓을 악마들이다.
파리의
노숙자를 만든 악마를 내쫓으려고 주말마다 지하철역에서 밤을 세워가며 봉사활동을 하는 어느 젊은 한국인 유학생 사제가
기억난다.
오늘
우리가 영성체 때 모시는 예수님은 부디 악마들을 내쫓고 사랑과 정의와 기쁨과 웃음이 넘쳐나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라고
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부패와 온갖 사회악을 일으키는 이기심과 물욕과 자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이기심과
돈 귀신을 내쫓는 이들의 모범을 기억하면 이 자유를 보존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가로막는 부정부패를 몰아내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
가출청소년들의
비참한 삶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자.
그들을
위한다는 지향으로 제 임무를 더욱더 충실히 이행하고 작은 선행이라도 하자.
“남에게
한 선행은 곧 자신에게 한 선행이다.”(L.
톨스토이)
“사랑과
선행으로 얻은 내면의 평화로움을 바탕으로 자기의 삶을 살라.”(M.
아우렐리우스)
예수님을
닮지 않는 것이 죄이듯,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죄인이다.
-서공석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여,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면서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40년
후,
서기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 신앙공동체의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신앙인들의 활동 상황과 그들의 마음다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겪고,
실망하여
흩어져 각자 자기의 생업으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며,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조직과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여 경직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우월감도,
그런
경직성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우월감이나,
경직성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로이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는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고,
서로를
섬깁니다.
그
섬김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기까지 하는 겸손한 것이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의 역할이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인간
안에 어떤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
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무질서는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해악(害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이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1,27)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닐 것을 원하였습니다.
가지고
다니는 짐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섬기는
사람다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가정집 공동체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고,
그런
집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모두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으로 정한 곳은 가정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개인의 집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선교는 어느 신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은
복음을 충실히 살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혹은 사회적 무질서의 해악(害惡)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운동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사람들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과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경직된
개인이나 집단은 고립되고,
실효성이
떨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 중심의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갱신을 하자고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계시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관(冠)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며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
-한상우신부-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삶에 대한
놀라움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 대한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파견은 변화와
성숙을 내포하고
있는 사랑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서로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성장되고 변화됩니다.
옳고 그름에
묶인 나와
너를 다시금
사람이라는 사실에 눈 뜨게
합니다.
제자로 산다는
건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하느님 사랑이
무언지를 알아가는
것이며 모든 순간을
하느님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삶입니다.
잃어버린 삶의
목적지가 하느님임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새로운
행복은 새로워진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이 길을 우리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에
집중하는 삶의
전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자아를
버리면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견의
삶이란 복음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통하여 삶의 가장 큰
기쁨인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나누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참된
파견입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을 알고
찬미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