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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묵상글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걱정하지 말고 다만 믿게 하소서!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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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31 03:43
- 걱정하지 말고 다만 믿게 하소서!
오늘 복음은 요리조리 조목조목 따져볼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는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하신 점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를 볼 때 주님은 제자들을 고통스러운 길로 내몬 나쁜 스승입니다.
그런데 더 잘 생각하면 같이 가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신 경우처럼 제자들만 따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는 한배를 타고 가시며 하시는 말씀이고
너희와 나는 공동 운명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같이 길을 가기 위함이고,
우리가 갈 곳까지 우리를 틀림없이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시고 한배를 타심은
우리 스스로 가려고 하지 않고 갈 수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가려 하고 잘 갈 수 있다면 굳이 같이 가자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로 건너감인데
이 여행길이 실은 싫고 매우 두렵기에 떠나려고도 하지 않고
혹 떠나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힘들기에 초대도 하시고 같이도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는 주님께서 한배를 타시긴 하셨어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풍랑이 거세고 제자들이 죽게 되었어도 주무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 시험입니까?
뒤에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을 시험해 보고 야단치시기 위함입니까?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면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면서 우리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바칠 때 야훼이레 하느님께서는
제물을 다 마련해주실 거면서도 아들을 바치라 시험하셨지요.
이런 시험과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도
안 계신 것 같거나 내 고통을 모른 채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느껴져도 우리와 한배를 타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도 우리처럼 걱정하시는가 그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묻는데 주님은 진정 걱정하지 않으실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걱정은 우리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른 걱정은 하십니다.
우리 구원과 관련하여 걱정은 하십니다.
죽게 될까 봐 걱정은 하지 않아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날까 봐 걱정은 하십니다.
한배를 타고 같이 가시는데도 우리가 이탈할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 구원을 걱정하시며 한배를 타고 가시는 하느님!
늘 저희와 함께하심을 저희가 느끼게 하시고 믿게 하소서!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구원을 걱정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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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문자적 해석을 넘어서는 진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을 단순하게만 이해하려 하다가, 그 안에 담긴 신비와 깊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성경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문자적 해석을 넘어서는 진리
2026년 1월 30일 금요일
리즈 샬롯 그랜트(Liz Charlotte Grant)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성경을 문자적이고 거짓이 없다고 여기는 방식으로만 읽던 습관을 넘어, 말씀 안에 깃든 깊은 신비와 교회의 전승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성경을 이분법적으로 읽었습니다—무오(無誤: 거짓이 없는)냐 오류냐, 불완전하냐 완전하냐. 이러한 방식은 저와 많은 미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앙 전체를 단순한 이분법 속에 끼워 맞추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구절은 옳게 읽거나 그르게 읽을 수 있고, 해석은 참되거나 거짓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구원받거나 저주받거나, 친구이거나 적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성경 읽기는 또한 단 하나의 해석, 곧 "평이한 읽기"만을 옳다고 여기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숨기실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화하려다 우리는 성경의 깊이를 평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랜트는 성경을 단순한 문자 해석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역사와 교회의 지혜를 존중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심과 탐구심으로 다시 바라보는 길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 책이 여전히 우리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적 사실만을 요구하는 시대적 기준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문자주의를 내려놓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사실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적 이야기들을 거부하는 것은 영혼을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신앙의 선조들을 지탱해 주었고, 이 이야기들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키워가는 데 필요한 상상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비스듬히, 곧 열린 시선으로 읽습니다. 하늘과 땅을 자유로운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과학과 예술의 기원 이야기를 성경의 창세기—하느님께서 인류와 처음 만나신 이야기—와 함께 엮어 묵상합니다….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저는 "방황"을 권장합니다. 우리의 가장 훌륭 질문은 종종 의심처럼 들리지만, 저는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외로운 태도라고 믿습니다. 방황 자체가 하나의 영적 훈련입니다. 믿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황을 통해 믿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여전히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고, 창조주를 우리에게 소개할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더 신중하게 움직이며, 신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 필사본 연구자 등 다양한 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저는 인내와 겸손을 다짐합니다. 학자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으로서 성경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말고, 거룩한 것을 질문할 자유가 있습니다. 문을 힘껏 두드리십시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물을 흘리십시오. 지나치게 단순한 답변은 거부하고, 이야기의 깊은 울림을 찾으십시오. 찾는 그 과정 자체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방황 속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올해 성경에 집중하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머물렀던 복음주의 공동체를 떠난 뒤, 마음에 남아 있던 불편한 해석들 때문에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눈과 귀를 열어, 제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제 영적 여정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Andrea C.
References
Liz Charlotte Grant, Knock at the Sky: Seeking God in Genesis After Losing Faith in the Bible, (Eerdmans Publishing, 2025), xvii–xviii, xix–xx.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réj Richár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경과 우리의 관계는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신비로우며, 그럼에도 언제나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과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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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날 우리는 흔히 믿음의 반대가 "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구절을 보면 믿음의 반대가 오히려 "두려움"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신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믿음의 대조가 드러납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본능 중 하나입니다. 본능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두려움도 본래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이 본능이 왜곡되면 우리를 마비시키는 힘으로 변합니다. 겉으로는 무릎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속으로는 도전과 기회를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두려움에 의해 좌우될 수 있습니다.
풍랑 이는 호수를 건너는 작은 배는 우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진리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숨기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겸손하고 단순한 자리에서, 달리 말해, 거짓 자아, 즉 에고가 붙잡을 것이 없는 그곳에서 믿음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씨앗의 성장은 처음에는 죽음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산꼭대기나 하늘에서가 아니라, 무덤—패배와 죽음의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심한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가득 차 오는 혼란의 상황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우선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시느라 길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셨을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 풍랑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표징이 아닐까 합니다. 두려움 대신 평화 속에 계셨다는 것은 곧 믿음의 본보기이겠지요!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안에서 평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잠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제자들이 믿음을 배우도록 이끄는 교육적 장면입니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교회의 여정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때 풍랑을 만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에 결국 안전히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잠은 겉으로는 침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이 상황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잠과 「침묵」의 하느님은 모두 "겉으로는 부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침묵을 견디며, 그 속에서 믿음의 씨앗이 자라 부활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인간적 반응이지만, 그 자리를 통과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신뢰와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와 성숙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풍랑 속의 잠, 박해 속의 침묵은 모두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신앙을 성장시키는 도전이 됩니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의 침묵을 견디며, 그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체코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현대 영성가인 토마시 할리크의(Tomáš Halík, 1948년 6월 1일~)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수필 역시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침묵'과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깊이 묵상하며, 불신앙과 의심,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신앙이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단순한 교리 해설서가 아니라, 현대인의 삶과 교회의 현실을 성찰하며 신앙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끄는 영성 에세이입니다.
할리크는 성경 속 자캐오 이야기를 중심으로, 불신앙자들을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캐오에 비유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내려오게 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듯, 교회는 불신앙자들을 배척하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가톨릭의 보편성(catholicity)을 드러내며, 신앙은 닫힌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불확실성이나 불안함의 두려움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 삶이 편리해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인간 내면의 믿음이 약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교세를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우리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사람들 안에 사랑의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증거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의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그러고자 하는 의지와 의도를 갖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mindfully)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정성에 당신 도움의 손길을 펼쳐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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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저는 평화로이 이 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시편 4,9)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 23,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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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에 사과를 먹고 있습니다. 껍질이 단단한 사과는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껍질을 벗긴 사과는 하루만 지나도 색이 변했습니다. 껍질은 사과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책길에 나무를 보아도 껍질이 있습니다. 나무의 껍질은 나무를 비와 바람, 벌레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장’이라는 껍질이 있습니다. 지구 자기장은 태양풍과 우주 방사선을 막아 주는 '물리적 방패' 역할을 합니다. 오존층이라는 껍질도 있습니다. 오존층은 태양의 유해 한 '자외선을 흡수'하여 생명체를 보호하는 '화학적 방패' 역할을 하여, 지구를 우주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핵심적인 두 가지 보호막입니다. 자기장은 전하를 띤 입자를 굴절시키고 오존층은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구 생태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본당에도 껍질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기도하시는 분들입니다. 굳은 날에도, 맑은 날에도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은 우린 본당을 지켜 주시는 영적인 껍질입니다. 구역장과 사목회 봉사자입니다. 2025년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행사가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구역장과 봉사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도 당연히 껍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던 예수님처럼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봉성체를 원하는 분이 있으면 달려가야 합니다. 고백성사를 청하는 분이 있으면 들어주어야 합니다. 시대의 표징을 말씀으로 해석하여 방향을 제시하는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공동체를 지켜야 합니다.
지구에는 자기장과 오존층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을 보호하는 껍질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입니다. 다윗은 하느님께 큰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우리를 악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껍질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에 시달렸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단단한 껍질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바로 이 껍질의 삶을 몸소 보여 준 분입니다. 그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아이들, 기술도 배움도 없던 젊은이들을 품에 안고 교육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세상의 거친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신앙과 기술이라는 보호막을 입혀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 전체를 감싸 주는 따뜻한 껍질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껍질이 필요합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평안과 불안의 순간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은 단단한 신앙의 껍질입니다. 회개로 마음을 바로 세우고,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는 삶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성 요한 보스코를 기리며, 우리도 누군가를 지켜 주는 신앙의 껍질이 되기를 청합시다.
“저희에게 회개의 은총과 믿음의 용기를 주시어 저희가 공동체를 지키는 단단한 껍질이 되게 하소서. 성 요한 보스코의 전구로, 젊은이들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도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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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휘파람은 불 줄 아니?
1841년 12월 8일 돈보스코가 사제가 된 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날 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토리노에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 제의방에서 제의를 입고 있을 때였습니다.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제의방 근처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제의방지기 요셉 코모티는 그 아이가 복사 서러 온 아이인줄 알고, 빨리 복사복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의방지기는 복사도 할 줄 모르면서 왜 제의방에 들어왔냐며 촛불을 켤 때 사용하는 긴 막대기로 아이의 머리와 어깨를 마구 때렸습니다. 아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돈보스코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제의방지기에게 따졌습니다. “지금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아이를 때리십니까?” 제의방지기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신부님이 저 아이를 알기나 하십니까?”
돈보스코는 말했습니다. “알다마다요. 저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 빨리 그 아이를 불러주십시오.” 돈보스코는 쭈볏쭈볏 되돌아온 아이에게 미사는 드렸냐고 물었습니다. 아뇨. 그럼 내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한 뒤 나를 꼭 좀 만나자고, 끝나고 네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헀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그 유명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이름이 뭐니?” “바르톨로메오 가렐리예요,”
“고향은 어디지?” “아스티예요.”
“아버지는 살아 계시니?” “아뇨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몇 살이지?” “열여섯 살이요.”
“읽고 쓸줄은 아니?” “아뇨. 전혀.”
“첫영성체는 했니?” “아직 안했어요.”
“노래할 줄 아니?” “아니요.”
제가 돈보스코였다면 그 순간 엄청 답답해서 뭐라고 했을 것입니다. 야, 그럼 도대체 너는 할 줄 아는 게 뭐냐? 그러나 돈보스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 아이가 할 줄 아는 게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물었습니다.
“휘파람은 불 줄 아니?”
그제야 아이는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휘파람은 예나 지금이나 뒷골목 아이들의 특기지 않습니까? 유일하게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물어봐 준 돈보스코의 전략에 아이는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고해성사는 본 적이 있니?” “아주 어렸을 적에요.”
“교리반에는 나가니?”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왜?” “꼬마들은 대답을 잘하는데 전 아무것도 몰라서 챙피해요.”
“그럼 내가 교리를 가르쳐준다면 오겠니? ” “그럼요.”
“이 방에서 해도 기쁘게 오겠니?” “막대기로 때리지만 앉는다면 기꺼이 오겠어요.”
“아무도 너를 못살게 굴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이제 너는 내 친구니까 오히려 존중해 줄거야. 그럼 우리 언제 교리를 시작할까?” “신부님이 좋으신 때요.”
“오늘 저녁에?” “좋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럼요, 당장이라도 좋아요.”
돈보스코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아이는 성호경도 제대로 긋지 못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그렇게 성호경 긋는 법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첫 번째 시간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는 돈보스코와 바르톨로메오 가렐리와의 만남을 살레시오회가 태동된 순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 안에 몇 가지 중요한 교육적 요소가 있습니다. 제의방지기는 당대 어른들의 일상적인 태도를 대변합니다. 당시 아이들은 인간 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때려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하시고 그 안에 현존하시는 거룩한 존재라고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돈보스코는 굳게 믿었습니다. 소중하고 거룩한 성전인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폭언은 용납이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어서 돈보스코는 그 가련한 소년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거듭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아이가 지금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돈보스코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아이를 더 사랑하기 위해 그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목소리나 톤도 중요합니다. 무표정, 무뚝뚝이 아니라 세상 친절하고 자상한 아버지처럼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돈보스코는 딱딱한 상담가나 관찰자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자상한 아버지로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거듭되는 질문에도 아이의 대답은 시종일관 없다, 모른다 였습니다. 그 정도라면 보통 어른들은 구제불능이구먼. 상종 못 할 아이구먼 했을 텐데, 돈보스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휘파람 불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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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왜 창녀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마태오 복음 21장 31절에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백프로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인식이 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신을 하는 건 있습니다.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이해가 잘 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니 그럴 겁니다. 제가 이번에 목욕탕 청소를 하면서 어느 날 이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겠다고 피부로 절실히 와 닿을 정도로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운 게 있다고 말씀드린 게 이 사실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알려드리고 싶지 않아서 알려드리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참으로 표현하기가 너무 민망해서 도저히 말씀을 드리지 못 할 뿐입니다. 사석에서 개인적으로 남자 형제에게도 말하기 민망합니다. 그런데 여긴 자매님들도 다 오시는 공간이라 더더욱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표현은 못 하겠지만 제가 알게 된 그 사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게는 최대한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실제 제목을 어떻게 달까 고민을 많이 했고 또 달고 싶은 제목은 아주 깁니다. 제목이 아니라 문장처럼 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지었습니다. 이 제목에 사실 세리가 빠졌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 이유까지 서술하면 삼천포로 너무 많이 흘러 생략하겠습니다. 일단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것은 슬퍼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지만 죄에 빠지는 것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이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같은 소리이지 않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근데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게 아주 어렵습니다. 저는 이 미묘한 차이가 무엇일지를 엄청 고민하고 고민했는데 바로 작년에 탕청소를 하면서 우연히 어떤 한순간에 알게 됐습니다. 그때 바로 왜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그 말씀이 이해가 됐던 것입니다. 그 근거를 우회해서 표현하겠습니다.
일단 우리는 먼저 죄를 짓는다는 것과 죄에 빠진다는 것과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지어서 표현하지 않고 둘 다 다 같이 통용해 사용하곤 합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이 자체를 설명하려면 아마도 A4 복사지 다섯 장 정도의 분량을 설명해야 할 정도로 서술해야 할 분량입니다. 제가 고민한 것을 메모한 분량을 보니 그 정도 나올 것 같습니다. 그걸 표현했다가는 자지러질지도 모를 겁니다. 그또한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결론만 아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다고 할 때 이 표현은 죄를 짓겠다고 적극적으로 의욕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보다도 소극적인 의욕도 해당됩니다.
사실 이걸 이해하려면 세상 형법 법률인 '미필적 고의'를 설명드리고 이걸 표현하면 잘 이해가 될 수 있을 건데 그것도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죄를 아무리 짓는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의욕을 해서 짓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분명 있습니다. 이건 자기가 분명 죄라는 것을 인식을 하고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미필적 고의와 같습니다. 하지만 죄에 빠지는 건 조금전 언급한 내용 둘 다 해당이 될 수도 있지만 해당이 안 되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식은 하지 않았는데 또 몰랐는데 처음에는 말입니다. 근데 나중에 결과를 보면 그게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바로 이게 죄에 빠진다고 했을 때 그때의 죄입니다. 사실 이 표현도 정확한 건 아닌데 이 정도 이해만 하면 이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실 겁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은 경계를 하고 두려워하고 회개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죄에 빠진 것은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아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다시 말해 죄에 빠지긴 빠지되 그게 또 반복이 돼 더더욱 죄인으로 되지만 그게 구제불능의 죄인같은 그런 죄인으로 변질은 잘 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죄인이냐? 바로 이런 죄인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 수 있고 언젠가는 회개하고 또 자기가 죄를 짓게 돼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는 사실을 눈물로 통감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은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죄에 빠진 사람보다는 회개를 할 확률이 더 낮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면 여러 번 읽으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글을 올려도 여러 번 읽어보시라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럼 왜 이런 사실이 중요할까요? 바로 같은 죄인이라도 회개를 하는 죄인이 있고 회개를 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를 짓고 나서 말입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이 죄를 누군가 옆에서 말할 때 흔히들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하나 숨어 있습니다. 꼭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건 맞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일단 금물입니다. 그런 생각보다는 오히려 단호히 거부를 해야 합니다. 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심에는 무의식 상에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개전의 정이 있기 아주 힘듭니다. 하지만 거부를 하는 사람에겐 회개를 하는 시점도 훨씬 그 사람보다도 더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빨리 자기의 죄를 뉘우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녀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표현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녀가 아닌 사람이 창녀를 보고 창녀라고 하지만 실제 그 사람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자기도 창녀라는 사실입니다. 이건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해당됩니다. 남자라면 뭐 창남 이런 언어유희가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인식을 하고 보는 사람도 창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백 번 양보해 그 사람이 창녀라고 해도 그 창녀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건 몸을 팔았다고 해서 고운 시각으로 보지를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몸은 안 팔았다고 자신은 창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기에는 남자도 해당됩니다) 몸을 팔았다고 해서만 창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을 파는 것도 영적으로는 창녀에 해당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남녀 불문하고 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도 영적으로는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면 비근한 예 하나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거룩한 성전이 되기는커녕 온갖 세상 유혹에 빠져 그 유혹에서 허우적거리면 바로 그게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게 육적으로 타락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세상 육적인 쾌락에 마음을 파는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몸만 판다고 해서 창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도 다 창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녀를 더럽다고 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경시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는 창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육적으로는 창녀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내용인데 여러 번 읽으보시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시고 공감이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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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깨끗한 영혼보다는 맑은 영혼이 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이번 묵상글 제목 끝을 보시면 제가 '겁니다'로 했습니다. 사실은 '습니다'로 하고 싶었지만 너무 단정을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 했습니다. 오늘 묵상글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합니다. 잘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내용을 공개를 해도 전혀 어색한 게 없어서 공개를 합니다. 제가 탕청소를 작년에 했을 때 묵상거리를 정리해보면 약 80개 정도되는 것 중에서 중요 수위를 따지면 2위 내지 3위 정도 될 겁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런 걸 알게 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청소를 남탕을 빨리 하고 나서 여탕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시간은 순서를 바꾸어도 똑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근데 심적으로 이게 더 좋고 안정적입니다.
왜냐하면 남탕 청소는 그냥 기본적인 것만 하면 됩니다. 또 이상한 변수가 별로 없습니다. 여탕은 이상하게도 변수가 많습니다. 똑같은 루틴으로 할 수 없습니다. 먼저 탕 내에는 딱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날 그날 상황이 달라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학생들 시험으로 비유하면 시간 배분을 잘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엄청 시행착오를 많이 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제가 처음이기 때문에 처음에 그냥 탕 내부에서 뭐뭐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주문 정도만 말씀하셨는데 그게 불과 7분 정도였습니다. 고작 그 시간이 다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먼저 남탕을 청소를 하게 되고 그다음 여탕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탕을 보면 남탕과 여탕의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는 게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제가 청소를 한 사우나 그 사우나만 그런지 다른 사우나도 이와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 보면 탕 내부에 있는 물이 남탕과 여탕이 확연히 다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 차이가 나도 왜 그렇지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세신 아주머니에게나 주인 아주머니에게 질문을 하고 싶지만 좀 이상한 질문 같아서 하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사우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우나에서는 왜 그런지 의문이 풀렸습니다.
단서는 어느 날 주인 아주머니가 화가 난 채로 뭔가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저한테 한 게 아니고 그날 목욕탕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혼자서 중얼중얼했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청소를 하면서 이래서 물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남탕도 물이 그렇다고 깨끗한 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더럽지는 않습니다. 근데 여탕 온탕 물은 아주 혼탁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사람들이 사용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남탕은 어디 사용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또 물이 사용하다 보면 좀 더러우면 보통 남탕은 사실 그렇게 드럽지 않아도 제가 20년 조금 넘게 사우나를 이용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물을 어느 정도 교체를 해 줍니다. 그건 누가 특정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보통 보면 상황 보고 온수와 냉수를 적정하게 틀어서 계속 어느 정도 물을 순환시키며 바꾸어주는 게 보통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결하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코로나 이전에 사용한 사우나는 24시간 계속되는 사우나입니다. 새벽시간에 그 사우나는 주로 청소를 합니다.
저는 오전에 갈 때도 있지만 오전 미사 갈 때는 오전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밤에 갑니다. 강의 다 마치고요. 고3 수업이 있는 날은 자정을 넘어서 잠시 하고 갑니다. 평균적으로 11시에 가죠. 그때 가도 그래도 제가 청소를 한 그 여탕 물보다 훨씬 깨끗합니다.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여탕만의 독특한 뭔가 남자와 다른 사우나 문화 차이에서 생기는 이유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걸 완전히 비교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추론에 의해 알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이유는 남탕 여탕 둘 다 사용하면 알겠지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데 제가 주인 아주머니의 넋두리를 통해 그 단서로 그 이유를 알아낸 것입니다. 물론 여자분들도 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물교환하는 걸 귀찮아 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한번은 놀라운 사실을 안 게 여탕 이용하시는 분들이 평균 다섯 시간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달목욕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것도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다섯 시간을 보낸다는 게 상상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때 알았죠. 그래서 탕에 온갖 음식물이 나오는 이유를 말입니다. 한 번은 청소를 하다가 바퀴벌레가 나와 기겁을 했습니다. 저는 바퀴벌레 완전 기겁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건 이해를 하는데 목욕탕에서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건 상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결국 탕 내에서 음식 같은 걸 먹기 때문에 생긴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청소를 하고 하는데 이게 아무래도 여탕에서 운영하는 매점이 원인인 것 같더군요. 그렇게 오랜 시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처음 와서는 모르겠는데 처음에만 사용하고 나중에는 계속 샤워기로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용이 남탕과 여탕을 비교하면 여탕 적자를 남탕 흑자로 채우는 형식으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겁니다. 이제 상황을 한번 정리를 하겠습니다. 이건 그냥 물을 빼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그땐 아무도 더 이상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할 때 세숫대야와 의자를 씻을 때만 물이 있으면 되니 말입니다. 그땐 제가 들어가 물을 어느 정도 교환을 하면서 세척을 합니다. 도저히 그 물로 세척을 한다는 건 양심상 할 수가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제가 그날은 탕에 몸을 조금 담구고 싶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그랬습니다. 이때 제가 중요한 사실을 목격한 것입니다. 탕에 있는 물을 교환을 조금 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어서 교환을 할 때랑 비교를 해보고 알 게 된 것입니다.
청소를 하기 위해서 물을 교환할 때랑 제가 몸을 조금 담구기 위해 먼저 청소를 다 하고 난 후에 다시 깨끗한 물로 채웠을 때랑 물을 비교해 본 것입니다. 이건 비교를 할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눈에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물은 수정처럼 맑은 물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청소하기 위해 물을 조금 순환시키려고 계속 어느 정도 틀어 교환을 하는데 그렇게 했을 때는 전과 비교하면 깨끗한 건 맞는데 완전히 물을 바꾼 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청결한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만약 두 개를 놓고 어느 쪽으로 목욕을 할 건지 보면 다 그쪽으로 들어갈 겁니다. 아주 물이 맑고 깨끗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곤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 잘 아실 겁니다. 이 표현을 빌려 표현한다면 물은 우리의 영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영혼이 깨끗하다와 맑다의 차이는 바로 이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물과 비교를 했을 때 상대적으로 좀 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은 완전히 빼고 다시 깨끗한 물로 채운 상태의 물은 깨끗하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그때의 물 상태는 맑다고 해야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물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말입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우리의 영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영혼도 좋긴 하지만 그 표현은 더러운 것과 비교했을 때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깨끗하긴 하지만 그 속에는 더러운 게 아직도 포함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맑은 영혼이라는 건 전혀 그런 게 없는 완전 깨끗한 물로만 있는 상태를 가지고 있을 때 그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젠 그럼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맑은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사례를 통해서 묵상해본다면 세탁에 약간 비유를 한다면 그냥 빨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삶아서 뜨거운 물로 세척을 해야지 그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같은 미세한 것도 다 제거를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해야 맑은 영혼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영혼은 깨끗한 정도에는 이를지 모르지만 맑은 영혼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깨끗한 영혼이 가는 게 아니라 맑은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 해야 그게 이치에 맞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조금 깨끗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전 무결한 상태의 청결이 유지되는 곳이라야 그곳을 천국이라고 해야지 깨끗한 정도의 수준으로 천국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게 어디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숙박시설로 비교하면 여인숙과 호텔과의 차이일 겁니다. 여러분은 여행가서 여인숙에 가고 싶습니까? 호텔에 가고 싶습니까? 호텔에 가기 위해선 그만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일단 조건이 바로 맑은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을 지금의 상태로는 부족합니다. 물을 완전히 교체하는 것처럼 통채로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까지는 제가 언급을 하지 않아도 다 잘 아실 겁니다.
만약 이게 도무지 뭔지 잘 모르시겠다면 저한테 개인적으로 쪽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가 아주 쉬운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걸 그냥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려도 되는데 답을 드리면 실망을 하실 겁니다. 싱거운 답이라는 것입니다. 답은 쉬운데 문제는 실천이 잘 안 된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 여인숙에서 자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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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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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4,35-41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이번 주 내내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실천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강조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아직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거센 풍랑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그런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들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오직 주님만 나와 함께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한데,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잃게될까 두려워 우왕좌왕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들만 그러는 게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들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마주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큰 호수를 건너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거센 풍랑을 만나면, 그로 인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잃게될까봐 두려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잃게되면 크게 실망하여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정작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큰 위기와 고난을 마주하면 주님께 온전히 매달리지 못하고 걱정과 두려움에 마음이 온통 사로잡혀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부족하고 약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인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던 주님을 깨웠지만, 실상 깨어나야 할 것은 그분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하느님의 능력과 섭리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의심’과 ‘불신’이라는 깊은 잠에서 얼른 깨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지 못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잃게될까 두려워하는 연약한 믿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질없는 것들에 연연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어둡고 캄캄한 밤에 예수님과 한 배를 탄 것은 무슨 일이 닥치든 그분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으로 한 일입니다. 저녁 때 갈릴래아 호수에 심한 돌풍이 분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거센 풍랑을 직접 마주하게 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과 함께 하겠하던 의지가 약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이 올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두려워죽겠다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죽기 싫으니 어떻게든 살려내라고 그분을 붙들고 닥달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셔서가 아닙니다. 부마자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듯, 그들에게서 두려움이라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참되고 굳건한 믿음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면 육체적인 욕구에 더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도, 그분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함도, 고통이나 죽음을 피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혼자 힘으로는 서 있기도 버거울 때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꼭 붙들고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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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믿는 대로 사는 것.』
1) 이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는 ‘자연계’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만물’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 시간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는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계속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라고 물었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요한 20,28).
그리고 그 ‘깨달음’은 ‘믿음과 헌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는 사람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사람입니다.
2) 오늘날의 사람들이 교회를 점점 더 멀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항상 혼나기만 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구체적인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어야 한다는 것만, 또는 믿음만 강조하면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강론과 설교가 실제로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기만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떻게 해야 믿음을 키울 수 있는지를 알려 주지는 않으면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잘못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꾸짖으려면 해결 방법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말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만 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혼내기만 하면, 혼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교회를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로와 힘을 받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가 위로와 격려를 하기는커녕 꾸짖고 혼내기만 한다? 혼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칭찬하는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어떤 가나안 여자>
▶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어떤 백인대장>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
▶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어떤 가난한 과부>
칭찬받은 사람들의 믿음과 삶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믿는 대로 사는 것이 곧 믿음을 더욱 강하고 굳건하게 키우는 방법입니다.>
4)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 압니다.
실제로 그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믿음으로 무서움을 극복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제자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한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살리기로 정하셨다면, 나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살아날 것이고, 내 목숨을 거두시기로 정하셨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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