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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과 세상 권세
롬 13:1-7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1-7 / [권위에 대한 복종]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2) 그러므로 나라의 법률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3)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배자를 무서워하지 않으나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두려워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겁을 먹지 않으려거든 법을 지키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심하고 지낼 수 있습니다. 4) 지배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보내신 사람들이니 만일 여러분이 나쁜 짓을 하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심에 따르기 위해서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6) 여러분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7) 납세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자진해서 모든 공과금을 내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성도가 맺는 기본관계인 하나님과 나의 관계(1-2),성도와 성도의 관계(3-13), 성도와 사회의 관계(14-21)를 말한 바울은 더 나아가 성도와 국가의 관계를 다룹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중국적과 신분을 가진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천국 시민이면서 이 땅에서는 성숙하고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두 신분에서 오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두 신분의 조화와 균형을 성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1-2) 권세의 기원은 모든 권세 위에 계시며 인간 나라들 위에 뛰어난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단 4:17, 25, 32). 지상의 모든 권세는 자신의 선하고 온전한 뜻대로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권세의 기원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복종입니다. 이 복종이 국가에 대한 성도의 의무가 지닌 성격을 규정합니다.
양심을 따라 행할 것이니라(3-5) 하나님과 국가는 반(反)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자신을 권세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합니다. 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공권력인 칼을 가졌습니다. 국가는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고 악을 벌하시기 위해 세우신 권세이자 기관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권세에 복종하고 국가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세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권세를 위임받은 위정자들의 악행에 대한 방관과 그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협력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권력자에 대한 의무가 어긋날 때, 성도는 세상 권세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행 5:29). 권세에 대한 복종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라는 큰 틀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6-7) 당시 로마제국에는 크게 두 종류의 세금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쳐야 하는 직접세의 성격을 가진 공세와 관세, 유통세와 같은 간접세의 성격을 지닌 국세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자인 국가에 조세와 관세를 바침으로써 국민의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마 17:24, 27; 22:21; 막 12:13-17). 이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사역자인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a)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께 돌아감을 압니다. 나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삶을 잘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와 국가
이필재 목사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6·25를 기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과 이번 주간에 제게 약속된 모든 설교 요청 받은 곳에서 이 말씀을 전하려고 준비하였습니다. 이제는 6·25같은 날은 국민의 마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6·25를 기억하는 사람이 소수가 되었다는 점과 6·25를 부각시키는 것이 남북평화 모두의 손해가 된다는 판단 때문에 그렇습니다. 6·25 이후에 남북 관계는 두 가지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는 초긴장 상태고 하나는 평화 협력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더욱 긴장을 준다고 봅니다. 어떤 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 한 험악한 관계가 오고 갑니다. 반대로 금방 통일이라고 될 듯 한 희망을 주기도 하는 이런 관계의 불확실성 정치 관계입니다. 7·4 공동성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국민들은 ‘아!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눈앞에 통일이 왔다는 감정을 가졌습니다. 30년이 지났는데도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가장 인간다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국가 건설을 해야 하는가 연구해 왔고 또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세 가지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하나가 생명의 존엄성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진리에 기초해서 생명 존중의 철학을 국가 정책 1순위에 놓은 것이 선진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자는 철학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대 선물이 하나 있는데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이 사는 이유는 행복의 추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최대한 노력하는 국민 철학, 이 세 가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하는 국가들은 나쁜 나라라고 규정하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절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과 제도를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세상은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선진국일수록 범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식하고 머리 나쁜 사람이 망치는 확률보다 많이 배우고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망한 역사가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필요한 것인가? 또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잘 된 것인가? 어떠한 제도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 주변에 매우 절친한 목사님 한분이 북한통입니다. 북한 주민들 돕기 운동을 수십 년 하셨습니다. 또, 그런 것을 하시니까 제가 주변에서 좀 도와드리기도 했고 협조도 해드린 일 있습니다. 또 하도 북한에 가서 무엇을 갖다가 많이 주니까 북한에서도 고위층이 알아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거기 가서 자기는 대우 받으니까 자유스럽게 다니고 청년들과 이야기하시는데 어느 날 북한 청년들이 좌담회를 한번 하자고 해서 응했답니다. 청년들이 하는 말이 “남한과 북한의 비교로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북한이 더 깨끗합니다.” 북한 청년들이 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북한의 제도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니까 훌륭한 것인가? 그래서 목사님이 대답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덕적으로 더러워질 분위기와 자유가 없다. 너희들이 남한의 유흥가에 가서 살면서도 깨끗해야 그게 깨끗한 것이지 더러워질 곳도 없는 곳에서는 깨끗해질 수밖에 없다. 마라톤도 혼자 뛰면 일등이다.” 여러분들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 많이 다니셨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도둑질 하는 사람은 무조건 손을 잘라버립니다. 볼 것도 없습니다. 도둑질한 것만 발견하면 끌어다가 손목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도둑놈이 없습니다. 있어도 아주 극소수가 있거나 말거나입니다. 길바닥에 돈이 떨어져있어도 그것을 주워가면 안 됩니다. 주워가면 손목이 잘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둑놈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 제도는 훌륭한가? 아니면 도둑놈이 좀 있다 해도 손목이 자르지 않는 사회 제도가 더 좋은가?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담임선생님께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려주셨는데 “서구 사회는 얼마나 사회가 정직하고 훌륭한가?”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들은 서구 사회를 한 번도 안가보고 말씀하신 거 같습니다. 도둑놈이 없다고 하시고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손을 닦으려고 손에 시계를 풀어서 옆에다 놓고 손을 닦고 깜박하고 그냥 나왔는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아무도 안가지고 가고 그 시계가 그냥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서구사회라는 겁니다. 나는 사실 그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말씀을 화려하게 해주셔서 거기에 대한 동경이 제가 서구사회를 가보는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이제 제가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구라를 치신건지 전혀 다른 세상인 겁니다. 아주 험악한 우범지대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밤일을 하면서 아주 간단한 단순노동을 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내가 있는 그 우범지대에 내가 있는 그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 다 도둑놈입니다. 셀프 서비스 주유소에서 조그만 스낵 가게를 겸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이 나 혼자서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혼자 앉아서 돈을 받는데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50퍼센트 이상은 하다못해 껌 한통이라도 집어넣어야 나가지 그냥 나가는 사람이 없을 만큼 눈만 돌리면 뭐 하나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때 시간당 2.75달러를 받고 일을 할 때인데 휘발유를 넣었으면 와서 돈을 내고 가게 되어 있는데 그냥 도망가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혼자서 쫒아갈 수도 없고 황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부터 미국이 변한 게 뭐냐 하면 선불제 영어로 하면 Pay first라고 하는, 돈 먼저 내지 않으면 주유할 수 없는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도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과 나와의 약속! 도둑을 맞던지 도망갔던지 내 월급에서 다 빼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는데 도둑놈들 뒷바라지하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 뿐입니까? 총을 갖다 대고서 돈을 빼앗는 사람이 없나, 칼을 든 사람이 들어오지 않나,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지 않나?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여기 와서 죽나보다.’ 그때 나는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제 옆에 가게 하시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그분과 둘이 한참 만나서 서로 피차 넋두리를 하는 겁니다. 그 아저씨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전 10시가 되었는데 어떤 강도가 들어와서 총을 들이대고 돈 내라고 했습니다. 이 아저씨가 침착하십니다. “야! 이 가게를 9시에 문을 열었다. 지금 10시인데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손님 한 사람도 안 들어왔는데 돈이 있겠느냐?” 그랬더니 강도가 생각을 하더니 “아!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이따가 오후 5시에 오겠다.” 정말 5시에 다시 온 겁니다. 총을 가지고 있으니 잘못하면 죽잖아요? 그래서 500달러를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는데 6~7명의 가족사진인 겁니다. “이 아이들을 내가 아빠로서 먹여 살려야 되는데 내가 직업이 없다. 할 수 없이 나쁜 일인 줄 알지만 이러며 다니니까 미안하다. 또 오겠다.” 그러면 가셨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는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도 한번이라도 당한 사람 모이십시오.” 최고 강도 많이 당한 사람이 30대 초반의 여집사님인데 13번 당했습니다. 13번 가슴에 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발표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ABC TV방송에 내 말이 다 나갔습니다. 기자들이 나에게 다 왔습니다. “이게 뭐냐? 생명 존엄을 국가 정책의 제1순위로 정하고 교육을 시키는 나라가 돈 몇 푼 때문에 생명을 죽여야 되는 이 사회는 잘된 사회인가? 이게 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고 나빠집니다. 이 관리책임은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잖아요?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나라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달려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그의 이름이 본래 카시우스 클레이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정신으로 무하마드 알리라고 개명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신앙과 미국 국법의 차이 때문에 그의 인생에 가장 화려했어야 되는 전성기 기간 3년 6개월을 출전 금지를 당해서 꼼짝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순교자란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과 국가 이념이 맞지 않았을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요 그로 인해서 국가의 물리적 힘에 의해 처벌된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속하고 있는 민족을 사랑하고 소속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복종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통치적인 질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창조의 순서부터가 통치적 질서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위해서 어떤 특정인에게 고난을 주셨다고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권세자는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통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의 통치에 순종하여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여기의 말씀인데 선진국이란 뭐냐? 법의 정신이 훌륭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그 법을 질서 있게 지키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법을 만든 사람들이 법을 가장 안 지키는 나라가 후진국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법도 있지만 악법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따지면 이 세상은 법이 있어야 지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법 위에 정치가 있어서 법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정치로 인해서 법을 뜯어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 위에는 뭐가 있냐? 철학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법인가? 이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잘 되었을 때 국가의 모든 시민들은 통치자의 지도를 잘 따라야 국민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려움이 국가에 찾아올 수가 있는데 무정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는 혼란은 그 국가를 망하게 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나라 창조의 질서가 나타나는데 모든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 질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주 천체가 그 어떤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권을 이탈해서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 사건은 인류의 소멸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절대 순종하여 이 우주가 마치 톱니바퀴와 같이 맞아 돌아가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항상 장마철이 되고 겨울이 되면 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납니다.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를 깨뜨림이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지게 했고 출애굽기에 나타난 히브리 민족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세라는 특정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중들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심으로 그 제도 안에서 인간 행복이 창조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땅 저 가나안을 보면서 갑니다.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십시다. 그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은 처벌하면서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사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하고 계신가를 보여준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이며 바로 그것의 질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우리는 애국자라고 명칭을 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큰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나라가 망하면 그 성공이 행복하겠습니까? 국가라고 하는 전체 공동체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만 개인의 행복이 보장을 받는 것이지 나라가 혼란스러워 다 망했는데 내 성공한 것이 무슨 행복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국가관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교회는 국가를 사랑하여 애국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국가는 교회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협조하는 상생의 관계를 갖지 아니하면 불행해 집니다. 모든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 사역을 도와줘야 하며 지상에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켜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국가관입니다.
구약 성경에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의 활동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입장에서 세상의 역사를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라는 그런 소리를 계속 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에 관련이 되고 그 주권 아래서 정치 행동이 진행되어질 때 인간 역사에 참 평화와 번영이 올 것이며 그와 반대로 인간의 정치 역사가 하나님의 정치를 이탈하거나 반역했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간 불행이 찾아온다는 이 말을 계속 한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지금 이 예배당 안에 우리와 직접 관계된 두 깃발이 양쪽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왼쪽에 태극기가 있고 오른쪽에 갈보리 깃발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국가의 권세나 교회의 권세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나라와 이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공동체가 되라는 소원을 저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 지상의 국가나 통치자가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을 부인하거나 반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는 역사의 주인이시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지 아니하고 거절할 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어왔습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의 신앙과 반대의 입장을 취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에 나타난 사건이 순교의 발자취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순교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항거해야 됩니다. 일제시대, 혹은 공산당 시절에 우리나라의 기독교계를 그런 것들이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반대하지 않습니까?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적 기초라고 해서 살아있는 현인신 천황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국가 이념과 맞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수없이 순교당하고 주기철 목사 같은 사람은 그래서 그렇게 죽은 거란 말입니다. 시편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권세 밑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도 하나님의 통치권 밑에 있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통치 국가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세계 역사에 그렇게 무식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을 주장한 국가나 통치자들은 모두 망하고 슬픈 말로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관에 있어서 이중국적의소유자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나라의 국적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적은 서로 배타하거나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상 나라의 국적은 개인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어떤 형편에도 변경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 다인종 문화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며느리들이 수없이 들어오고 중국 조선족이 끝없이 오며 세계 모든 동남아의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코리아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을 찾아와서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상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토록 내셔널리즘이 강한 유대 민족도 지상의 국적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은 출생국가가 어디가 되었든지 성공을 했던지 전쟁을 했던지 어디에 가서 살던지 아무 상관이 없이 영원한 국적입니다. 어떤 경우 이 지상의 나라가 내 하늘나라의 국적을 포기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상 나라의 국적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예 미련을 두지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국가가 나를 핍박할 거 아닙니까? 핍박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끝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국가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국가관이란 말입니다. 어떤 기독교 국가도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국가 부름에 나가서 전쟁터에 가서 수없이 살인을 해야 되는데 잘하는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 이런 말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전쟁을 해야 하되 불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어서 내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문화는 아닙니다. 선한 일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고 악도 작은 악과 큰 악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이고 비극도 적은 것이 있고 더 큰 비극이 존재하는 그런 문화입니다. 전쟁은 분명히 악입니다.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전쟁은 안하면 더 큰 악이 생기니까, 마귀와 같은 침략자의 그 흉악한 불의에 대해 충실한 협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악을 선택해 싸우는 것이 전쟁의 합리성이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건강하면 의사는 필요 없잖아요? 어떤 때는 의사가 사람의 다리를 뚝 잘라버릴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왜 잘라버리는 것입니까?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의사는 병균이라고 하는 이 악의 존재를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을 선택하는데 그 작은 악은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의 모순되는 존재인가를 항상 검토해서 불의의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일 때는 목숨을 바쳐 순교자적으로 전쟁을 해야 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 아닙니까?
이제 대한민국은 뚜렷해진 희망과 갈등이 확실해졌습니다.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런 경우를 많이 거쳐 갔습니다. 이때 잘하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가가 건설될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아르헨티나이나 필리핀 같은 결과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세계 4대 강국이라고까지 말하던 아르헨티나가 급격한 빈민국가로 타락했고 동양의 흑진주라고 불리던 필리핀이 빈민굴이 되지 않았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국민 각자가 이성적 판단을 하여 국민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무정부 상태, 무질서인 혼란의 상태, 이성적 판단 없이 그렇게 나간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텍사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미국 교회를 빌렸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존 크레그 목사였습니다. 그때 미국 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우리에게 그렇게 좋은 차를 만들어주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되다니!’ 목사님이 그 주간에 자기 자동차를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여러분 중에 지금 차를 바꿀 시기가 된 분이 계시다면 망해가는 클라이슬러를 살려주기 위해서 클라이슬러 자동차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광고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담임 목사님의 광고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많은 교인들이 클라이슬러로 자동차를 바꿨습니다. 클라이슬러 회사 망하지 않았잖아요? 국민 각자의 의식이 분명하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을 축복하셨습니다. 축복받은 한국을 관리하고 지키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국민 모두가 지혜로운 판단을 하면서 우리가 늘 부르는 “대한민국 만세”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2장에서는 사랑과 용서와 원수 갚기를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9-10절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했고, 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했습니다. 또 17-20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했으며 마지막으로 21절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바로 다음의 8절에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는 말로 다시 사랑의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12장은 13장 8절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인 13장의 1-7절은 그 전후의 문장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낯선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 본문이 바로 앞선 12장의 내용에 뒤따라야 하는 꼭 필요한 권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금하는 권면을 한 후 사도 바울은 그 권면이 국가가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기독교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정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관해 뭔가를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12:17)는 말이나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2:17)는 말을 오해하거나 악용하여 사회적 범죄를 쉽게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신앙에 입각한 바른 사회생활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판단에서 쓴 글이 오늘 본문이라고 보며 그러기에 그것은 낯선 내용도 아니고 갑자기 끼어든 글도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데 관해 가장 기본적인 사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나라의 삶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믿는 이들을 의롭다 여기시며, 의롭다 하신 이들을 계속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가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해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켜 가십니다. 믿는 이들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에로 택하심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본래 죄인인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생명과 복된 삶에로 구원하시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안 믿든지 차별 없이 누구나 누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햇빛의 유익을 누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죄 지은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가 내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골라서 내리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님께 죄 지은 사람이라고 해서 인간세계가 하루아침에 짐승들의 세계나 마귀의 세상처럼 되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비록 그들이 죄를 범한 인간이지만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존재답게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재능을 남겨두셨고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인간세계의 삶이 가능한 한 편안하며 평화롭고 윤택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은 기술과 학문을 발전시키고 예술을 발전시키며 인간의 삶이 다른 피조물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세계가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우며 불안하고 살기 끔찍한 지옥 같은 세상으로 돌변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은혜의 하나가 정치적인 능력입니다. 즉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며 사회적 약속을 존중하여 서로 신뢰할 수 있고 편리하며 평안한 삶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국가권력이며 정부이고 공권력을 위임 받은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창주이시며 주권자이신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그 어느 집단, 어느 국가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통치자가 없으며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불법 집단이나 모든 포악한 통치자도 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어떤 공동체나 사회나 국가도 공권력과 그 공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 권력을 탈취하고 포악함으로 다스리는 군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들도 지혜롭고 공의로우시며 언제나 결국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군주나 통치자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권력은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근본적으로 그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부인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따라서 국가 권력에 불복종하는 것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쓰기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빌라도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 하셨습니다(요19:10-11).
물론 신자들이 복종할 수 없는 일을 정부나 통치자가 요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보편적 가치와 일치하는 신앙인의 양심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할 때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순종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권력의 명령에 불복종한 명백한 두 차례의 사례를 봅니다. 먼저 행4:1-20이 전하는 사례입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전하며 가르치자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도 한 끝에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며 그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후 사도들이 많은 이적기사를 행하고 백성이 그들을 칭송하며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오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또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어주어 밖에 나온 사도들은 다시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쳤으며 다시 잡혀가 공회 앞에 섰을 때 대제사장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는데도 말을 듣지 않음을 추궁하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답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던 것입니다(행5:12-29).
이렇게 그 어떤 권력이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명백하게 범하는 일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저항은 폭력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손해와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저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나 통치자의 요구나 명령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충돌하지 않으며 예배와 신앙생활을 억압하는 것이 아닐 때 우리는 기꺼이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사회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주기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국가권력이나 통치자는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다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소유여부를 떠나서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치할 칼을 주셨다고 합니다. 본문 4절 중간 이하를 봅니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칼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에게 벌할 자를 벌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사용할 권리를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에 거스르지 않는 한 나라 법에 불복종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고는 이에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라 법과 공권력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나라사랑은 곧 하나님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궁극적 주권자이신 나라도 사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나라사랑이 하나님사랑이라면 나라의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되 마지못해서나 처벌이 두려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라 지키며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5절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나라를 사랑하며 나라의 법을 지키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나라에 세금을 제대로 내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을 봅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모든 종류의 세금이나 공과금을 빠짐없이 정확히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세당국자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쓴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라사랑이 무엇인지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나라의 공권력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나라 법과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모든 나라가 법과 질서를 따라 다스려지기를 원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금 잘 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장전입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 투기로 재산증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찰에게 함부로 화염병 던지고 쇠파이프 휘두르는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공공기물을 파괴하고 시내교통을 마비시키며 무법천지로 만드는 시위행태도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국가권력과 통치자를 향한 국민의 의무와 도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권력과 통치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며 국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이나 통치자들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공평무사하게 권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국민에게 공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공포 대신 신뢰와 친밀감을 주어야 합니다.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준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쥐어 주신 칼을 써야 할 데는 안 쓰고 휘두르지 말아야 할 때 휘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한 계층에게서는 세금을 쥐어짜고 부자들에게는 요리조리 다 빠져나가도록 눈감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 앞에 솔선수범하여 탈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위공직자들이 자기 자식들 병역의 의무 기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랍시며 위장전입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 투기로 재산증식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권력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누구보다도 우리나라를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며 주인 되신 이 나라를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 나라와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세상법과 하나님의 법
로마서 13:1-7 / 조재호 목사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건네주는 선물은 눈에 보이지만 선물에 담긴 존경과 축하와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트와 집은 눈에 보이지만 그 집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가정의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학생의 성적표는 눈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의 실력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당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만 성도의 믿음과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보이는 나라는 세상 나라이고 보이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대한 민국은 눈으로 보이는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대한 민국의 땅이 다르고 대한민국의 말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산이 다릅니다.
보이는 일본 땅과 우리 땅이 다르고, 보이는 일본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릅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국경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 얼굴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땅 색깔이 다르고 집 모양이 다릅니다.
얼마 전 조선족교회 박전도사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일년에도 수 십 번 북한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두만강이라는 선만 넘으면 냄새도 다르며 서울에 오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데 북한에 가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두 나라에서 삽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이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시민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신문하면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행22:28)
로마 시민권은 보이는 나라의 시민권입니다. 바울은 대제국 로마의 당당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
로마는 보이는 나라이고 하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이었고 신앙적으로는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천국 시민이었습니다.
우리도 두 나라에서 삽니다. 하나는 보이는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라를 이끌고 다스리는 데에 법이 존재합니다.
이 나라에는 대한민국의 국법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은 헌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 중 최고의 법은 십자가의 법입니다.
오는 17일 수요일은 제헌절입니다. 제헌절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한 것은 기념하는 날인데 조선왕조의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추어 공포하였습니다.
당시 제정된 헌법 전문(前文)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正義)인도(人道)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중략)...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正當) 또 자유로 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단기 4281년 7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지금 현재 헌법의 총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12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 그 외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 비밀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 나라와 하나님을 위하여 바람직한 삶입니까?
1. 그리스도인은 합당하게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귄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1)
권세하면 주어진 권력을 자꾸 남용하여 개인의 유익을 챙기는 세도가, 탐관오리 생각이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세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권세를 번역하면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직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 이 사회에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권위주의가 아닌 진정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의 권위나 장관의 권위가 잘 세워져야 하고 직장 상사의 권위가 잘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하고 잘 세워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책임자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문을 지키는 경비에게도 권위가 있습니다.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굴복하라는 것은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가 아니라 잘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거리 교통신호등이 고장나자 차량들이 엉키기 시작합니다. 조금 후에 아주 젊은 교통경찰이 나타났습니다. 이내 빨간 봉을 꺼내들어 수신호를 시작하기 시작하자 모든 차들이 젊은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움직여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합당하게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공직자들 대표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와 자신의 발전과 평안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몇 년 전 1천명의 남녀에게 설문조사를 했었습니다. 93.5%가 법은 지켜야 한다고 응답했는데 72.2%가 법을 지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법은 지킬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쓰레기장 같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흩뜨려 놓은 지저분한 쓰레기통 같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회가 비닐봉지가 터져 지저분하게 흐트러진 쓰레기통같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어서 혼란과 혼동을 거두워내시기 원하십니다.
“형제들아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 14:40)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던 제헌절을 생각하며 법과 질서를 준수하는 선진 국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나라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바리세인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받쳐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을 가져 와라. 누구의 그림이냐?“ ”가이사으,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드려라“
예수님은 십자가와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세상에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행함도 말씀하셨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내려고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입니다.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6월의 월드컵을 지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백성 됨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태극기가 자랑스러웠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법 아래서 대한민국의 평안과 발전과 축복을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
김홍도 목사
<1.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40).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질서정연하게 운영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늘을 운행하고 있는 유성들이 조금만 자기 궤도를 벗어나거나 속도가 틀려진다면 별과 별이 부딪쳐서 질서가 깨지고 온 우주는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즉 코스모스(cosmos 우주질서)는 카오스(chaos 무질서, 혼돈)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도 혼돈과 무질서를 원치 않으시고 질서있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 여러 가지 제도와 권위 혹은 권세 (authority)를 주시고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아담의 지배아래 두셨고 아담은 하나님 앞에 복종하도록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여 제 멋대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이중적 권위를 무시했고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이 결과로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왔습니다.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게 됐고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만 됐고 그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세상에 온 것은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 고로 이 세상에 질서를 위해서 사람을 따라 권위와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 했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로마서 13:l, 벧전 2:13)고 했습니다. 또 세상에서 백성들은 집권자들에게 순종하라고 오늘 본문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나 간섭하시지 이 세상 정치 같은거야 무슨 상관 있을라구? 목사나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면 됐지 세상 임금이나 집권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이 선거해서 뽑은 대통령이지만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세운 것입니다. 직장이나 기관에서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순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교회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혹은 위에 있는 직분에 순종하라(히 13:1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에 순종하여 질서를 지키는 것을 원하시고 또 권위에 순종하는 그 사람을 권위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질서있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2.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위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3:l 말씀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authority)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떠한 권세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나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모든 권위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위임하신 것이지 하나님께 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위란 없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위임한 권위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권위자에게 범죄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면 순종은 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단순히 내 남편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남편에게 남편의 권위를 주셔서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셨음을 알아야 하고 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화평하고 그 아내는 복을 받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부모임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그 사람이 그 자녀가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22-24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더 똑똑한데, 공부도 내가 더 많이 했는데" 하면 그것은 하나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똑똑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6:1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 같아도 무식하고 술주정뱅이 부모님이라도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잘났든 못났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예수 믿지 않는 대통령,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그까짓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천만에 올시다. 왕이나 집권자들은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준 권위자임을 알고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 이하에 보면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챙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단 부모나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부모님이나 국가가 주는 벌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고 부모나 국가에 대해서는 벌을 받음으로써 복종하게 되니 둘 다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22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친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간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 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직장에서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인고로 그 누구보다도 순종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에서는 더욱이 하나님의 종들과 위에 있는 직분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7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순종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듣는 것이고 복종은 싫어도 억지로라도 듣는 것입니다. 순종을 못하겠거든 복종이라도 하십시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세계에서나 우리는 모든 권위있는 자들에게 그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3. 권위에 순종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권위에 불순종하고 범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이요 하나님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 최대의 요구입니다. 이사야 14:12-15, 에스겔 28:13-17에 보면 사탄의 기원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한 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먼저 배워 야 됩니다. 사무엘상 15:23에 보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우상 숭배나 다른 신 섬기는 것이 무서운 죄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거역하고 또 제 고집대로 하는 것도 우상 숭배나 점치는 죄와 같습니다.
창세기 9:20 이하에 보면 노아가 홍수가 지난 다음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하체를 드러내 놓은 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세 아들중 함이 이 광경을 보고 나와 셈과 야벳에게 비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찾아 눈을 감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노아가 잠이 깨어 이 사실을 모두 알았습니다. 그래서 셈을 축복하기를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했고 야벳은 "창대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셈족은 우리 황인종인데 영적 축복을 받아서 모든 영적 지도자가 대체로 셈족에서 나왔습니다. 야벳족은 백인들인데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대로 물질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함족은 흑인인데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실수는 노아가 했는데 왜 함을 저주해 이렇게 의문을 가지기 쉬우나 노아가 지은 도덕적 행위의 잘못보다는 함이 아버지 족장 노아를 비방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비방한 것이요, 하나님께 도전하고 죄를 범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가 벌거벗은 수치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함이 종의 종이 되리라 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은 점점 더 권위가 높아지는 것이고 권위에 불복종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노릇하고 밟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비방을 하며 또 여호와께서도 자기들에게도 말씀했다고 하며 도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범자 미리암을 쳐 문둥병에 걸리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가정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미리암의 권위에 따라야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는 데서는 모세가 권위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기 동생을 다스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자에게 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모세의 태도 가운데서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님과 형에게 말대답도 화도 내지 않고 자기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방어나 변명치 않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지키시며 미리암을 치셨습니다. 권위(authority)는 능력(power)보다 월등하게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지만 권위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4장 이하에 보면 사울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울도 왕으로 있고 다윗도 잠정적이지만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 앞에 버린 바 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굴속에 숨어 있는데 사울왕과 그의 부하들이 다윗을 찾다 못찾고 피로하여 그 굴에 들어와 잠을 자게 됐습니다. 이 때에 다윗의 신하가 "다윗왕이여 명령만 내리십시오. 단칼에 처치하겠습니다" 할 때에 신하를 말리면서 "하나님께 기름받은 자를 어찌 사람이 손을 대겠느냐" 하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 가졌습니다. 후에 다윗은 사울 왕에게 "내 주 왕이여!" 하며 부르고 절한 후 "왜 나를 죽이려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왕을 내 손에 붙혔지만 기름부은 자인고로 손대지 아니하였습니다 " 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약간 회개하는 것 같았으나 또 죽이려고 쫓아 다녔습니다. 얼마후 황무지에서 또 쫓아 다니다가 군사들을 다 포위하고서 사울왕이 잠을 잤습니다.
다윗이 또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사울왕이 잠자는 곁에 갔을 때 신하가 창으로 찌를 것을 종용했으나 사무엘상 26:9에 보면 "누구든지 손을 들어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며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연기할지언정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도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그러나 비록 시들어가는 사울왕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임을 알고 절대로 손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끝까지 지켜 보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내가 다윗을 보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 이하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데려다 심문하면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화가 나서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께서 너를 치리로다. 네가 나를 울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나를 치라 하느냐" 하며 대항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고 그러느냐" 하고 일러주니까 그 때 사도 바울은 얼른 사과하면서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훼방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는 대제사장들이지만 사울은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였으므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권위에 순종한 자만이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권위자가 지녀야 할 필수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①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공적에 의해서 권위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권위가 맡겨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족장들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다 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룻밤이 지난후 유일하게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고 잎이 돋아 열매가 맺혔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도 바싹 마르고 아래 위를 자른 나무인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특별한 것도 아니요 아론이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위란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도 남달리 무슨 권위가 있다든지 남의 지도자가 되었다든지 목사가 되고 또 교회가 부흥되었다 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권위를 맡겨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집행하는 것 뿐이오 내가 권위를 만들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권위있게 할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 뜻을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권위자가 되게 하십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다른 사람도 그에게 순종합니다.
[② 권위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입을 열고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소중하게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권위자가 되려면 자아가 완전히 부서지고 녹아져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자는 영적 권위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권위는 점점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③ 항상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려면 하나님과 깊이 영교하는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교해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문제가 생기고 또 확대됩니다. 대개 교회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난문제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살면서 하나님과 계속 기도를 해야 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만 따르면 다른 재주가 없어도 다른 지식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권위자가 조심해야 될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인간 자신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들지 말고 자기 스스로 권위를 방어하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순종 안 한다고 강요하지도 말고 결코 다투어서도 안 됩니다. 내 말을 안듣는 것은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타인이 반대해도 꾹 참고 자기를 반성할 줄 알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 권위가 위태롭게 도전을 받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변명도 투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비방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미리암이 비방할 때 모세는 변명도 약간의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비방의 말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 방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어를 해 주셔야지 내가 방어를 하려 하면 권위는 점점 떨어지고 맙니다. 변호는 시간이 되면 해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지극히 온유해야 합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 온유함이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사람, 강퍅한 사람에게는 권위를 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처럼 신체적으로 약하고 구변이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강력한 결단력과 현명한 사상 능란한 웅변이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 줄 압니다.
또 한 가지는 권위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권위를 많이 가질수록 권위위식을 갖지 마십시오. 자기가 권세자이지만 권위자인 줄 모르는 복스러운 어리석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여 저에게 이 어리석음을 영원히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의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김태영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던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시민이며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천국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의무를 다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여하신 모든 권위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인간평등 사상이 편만한 오늘날 통치자들에게 굴복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실행하기에는 부적합한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도 현존하는 통치체제를 통해 안정된 사회를 가꾸어 가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리사욕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한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해야 하고 통치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자를 제지하는 일도 해야 할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질서를 부인하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사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세상의 통치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모습은 순종함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함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는 삼락가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조화로운 품성과 걸맞게 평화와 안정 속에 풍요로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이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양심에 따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무오한 인도자는 아닙니다.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의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의의 길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법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반면에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선함의 기준입니다. 악을 막기 위한 법의 테두리 보다는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깨끗한 양심의 길이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에 따라 살아도 되지만,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따라 더욱 바르고 더욱 정직하게 살아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 속에 있지만 깨끗한 양심에 따라 바르고 정직함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세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세상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 하기에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고 그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사회적인 의무를 다함으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평강을 누리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가 바르게 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질서 속에서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며, 법이 아닌 깨끗한 양심을 따라 더욱 정직하고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왕의 위엄과 제사장의 거룩함과 선지자의 정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
민병석 목사
성경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하여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까지를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분명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이 사회의 한 구성원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생활이나 사회법규의 치외법권 자가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과 국가 또는 권세 자들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1.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바울은 13장 초두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권세란 국가권세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별개의 것이지만 이 모두를 세우신 분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대 주재 심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신22:28). 모든 권세란 표현은 선악의 구별을 둔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폭정을 베푸는 권세이든 이 땅 위에서 세워진 권세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 바벨론, 헬라, 로마 같은 나라의 존립도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주관자들도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말해 주었습니다(단4:25).
(2) 권세 자들에게 굴복해야 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거역하는 일은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분명 악한 통치자였습니다. 물론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도 악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세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9:11). 2절을 보면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지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권세 자들의 권위는 주로 도덕적인 차원의 법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된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포악한 권세자라 할지라도 사회생활의 안정과 평안을 위한 선한 법규는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것을 파괴하려고 한다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인류의 안정된 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양심을 인하여 굴복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세 자들에 대하여 굴복하는 일에 대하여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도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에는 다음 몇 가지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한 양심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고 세례의 뜻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3:16,2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 자들에게 이 같은 통치권을 주신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독재 정권 하에 있는 국가라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에 의한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가 야기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권세자가 기독교를 법령으로 금지시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취할 태도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마22:21). 가이사의 권세는 일반적인 세상적 권세를 상징합니다. 가이사의 권세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어떤 권세 자들의 명령에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온 인류로 우상 앞에 경배케 한다고 했습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했습니다(계13:15). 이런 경우의 해답을 다니엘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이 같은 대답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세운 왕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다고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뱃느고가 왕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사람의 양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양심은 도덕적 선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보다 더욱 차원이 높은 절대적인 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공세와 국세에 대해서도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에 속한 일입니다. 공세나 국세가 없이는 국가 권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은 국가기관이나 지방 자치기관이나 일반 국민으로서 바쳐야할 공과금에 대하여 그 의무를 이행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이사의 것들이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 론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존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렘18:5-10). 이 사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섭리되면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지속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속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하면 그때 인류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사회에 안녕 질서와 평강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입니다(딤전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