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사야 30,19-21.23-26 마태오 9,35-10,1.6-8
“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마태오 9장 35절-10장 1절.6절-8절)
하루를 지내면서 평화롭고 기쁜 적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고통스럽고 슬프고 혼란스러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루라도 우리는 늘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고사하고라도 우리를 묶어두고 또 괴롭히는 일들을 무엇일까요?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의식주 문제이겠지요. 사는 곳이 소음이나 악취로 차 있는 곳이면
아무리 지내는 곳의 시설이나 여건이 좋다해도 불편과 함께 고통을 겪을 수 있는 것이지요.
또 몇 끼를 굶어 배고픔의 고통도 있겠지만 반대로 음식은 좋은데,
위나 장의 통증 때문에 못 먹는 경우도 사실은 큰 고통 중에 하나이지요.
헐벗는 다는 것은 쉽게 이해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 나가거나 사람을 만날 때 옷가지가 변변치 못하다면
거기에 따르는 불편이나 고통도 있을 것입니다.
포로수용소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군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이 얇거나 헤어져 있어서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서 군화도 다 떨어져서 행군할 때에
피맺히거나 동상에 걸린 발을 볼 때, 의복에서부터 사람은
당장 의식주의 중요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어디 이뿐이겠어요?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해서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전쟁의 위협,
기아 등의 소식에 고통스러운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이 괴롭힘을 겪는 것을 물리적인 피해, 정신적 피해로 나누는데,
그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늘상 쓰는 말로 괴롭힘을 겪는 것으로 꼽기도 합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대인관계에서 오는 고통도 그 비중이 큰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크고 작은 고통 속에서 실망과 더 나아가서는 희망이 없는 절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삶에 지친 이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다가올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야 예언서 30장 19절)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슬픔에 싸였던 예루살렘, 시온의 백성에게 응답과 함께 희망을
베풀어 주심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느님으로 사람들을 치유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음을 두루 다니시며 회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시지요.
목자 없는 양들을 찾아다니며 치유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에는 벅차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 9장 3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쫒아 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예루살렘, 시온 산으로
되돌아 갈 희망의 메시지를 예언자를 통하여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처럼
인류를 죄에서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약속한 희망의 날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는 지난 묵은 죄에 머물지 말고 새롭게 희망이 날이 예루살렘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합시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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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 바오로 신부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사야 30,19-21.23-26 마태오 9,35-10,1.6-8
저는 늘 이렇게 단순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나 한 낱말을 찾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기도 문구처럼 하루 한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찾은 말씀을 외우고, 하루 종일 되뇌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으로 저에게 크게 와닿은 말씀이
오늘 복음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오 10장 8절)였습니다.
이 말씀을 외우고 되뇌이면서 후배들과 함께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한 후배가 자기는 이번에 졸업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여행비가 없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행 경비를 물으니 13만 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가족들로부터 받은 용돈이
13만 원 있었고, 마침 그때 되새기던 말씀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였기에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조용히 13만 원을 그의 책상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였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후배들이 졸업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경비를
내주었던 그 후배는 돌아와 인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배를 속으로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화가 날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었더니 한 달쯤 지나자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라는 말을 하려면 ‘엄마’라는 말을 만 번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제나 대부모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귀에 만 번은 들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만 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이 열려 비로소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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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루카 신부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사야 30,19-21.23-26 마태오 9,35-10,1.6-8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태오 10,8)
오늘 복음(마태오 9,35-10.1.6-8)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십니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도 당신의 일을 내맡기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맺습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지금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큰 병폐 중에 하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가엾은 마음인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이에 크게 역행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너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병폐입니다.
'주고 받는 것'(보편적인 선을 주고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친교(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주고 받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것은 '비그리스도의 모습'이며,
'비구원의 모습'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거져 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주시는 것을 잘 받고, 잘 나누어야 합니다.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나누는 것도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기쁘게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은
기쁘게 나눌 줄도 압니다.
'주고 받음이라는 역동성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고, 받은 것을 너와 함께
잘(기쁘게) 나눕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