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까지 뻗은 삼나무 숲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정오의 햇살.
햇살은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를 교묘히 지나 숲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오두막집까지 그 따스한 미소를 담아주고 있다.
한창, 점심 준비에 바쁜지 허름하지만 자그마니 아담한 오두막집은 그 작은 굴뚝으로 모락모락 뽀얀 연기를 잘도 뱉어내고 있다.
또, 굵은 나뭇가지를 맨질맨질하니 뽀얗게 다듬어 만들어 놓은 창문 너머에서는 솔솔 맛 나는 향기는 풍겨 나왔고, 반쯤 열려있는 반원 모양의 적갈색 참나무 문 너머에서는 보글보글 음식이 끓고 있는 소리가 어린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다.
" ... 그래서, 결국 백설공주는 멋진 이웃 나라 왕자님과 결혼을 했고, 나쁜 마녀 왕비는 벌을 받아 햇살에 까맣게 타...죽었습니다. 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일이. 흑흑. "
음식이 한창 끓어오르고 있는 커다랗고 까만 솥 앞에는 단정하니 올곧은 검은 단발머리가 예쁜, 눈이 커다란 소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슬픈지, 이제 갓 14,5살이 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는 그 큰 눈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서는 읽던 책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흑흑흑, 어쩌면 이렇게 슬프고도 무서운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오, 불쌍한 마녀. 오, 불상한 내 동..."
"언니!!"
그때, 소녀의 서글프기 짝이 없는 울음소리를 단칼에 날려버리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오두막 밖에서 들려 왔다.
그리고, 곧 적갈색의 앙증맞은 문이 떨어져 나갈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 언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내 독초 밭에서 절대로! 다시는! 이런 허접한 정체불명의 꽃들 키우지 말라고 얘기했잖아. 게다가 이건 또 무슨 꽃이야? 무슨 꽃이 길래 독초 밭에서 자라는 주제에 이런 요란한 땟깔을 유지할 수 있는 거냐고!!
세상에 이것 좀 봐, 이 꽃들 때문에 내 귀한 독초들이 영양가를 제대로 못 받아서 비실비실하단 말야. 눈이 있으면 좀 보라구! 이 생기를 잃고 축 쳐진 거무죽죽한 잎사귀하며, 실가닥 같이 비약한 이 뿌리를 좀 보란 말야. "
부서져라 문을 박차고 나타난 이는 울고있는 소녀의 동생인 듯한 소녀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소녀는 아니 소녀라 부르기 참으로 민망한 그녀는 울고있는 소녀의 동생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성숙했다.
20살은 벌써 넘겼을 나이에, 길고 흑단 같이 검은머리가 엉덩이까지 길게 자라있고, 긴 머리의 가르마를 타고 특이하게도 녹색 빛깔의 머리가 자라나 있어 그녀의 검은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뽀얀 피부를 가진 작은 소녀에 비해 차라리 창백하다고 말할 정도의 흰 피부를 가진 그녀는 검은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며 어린 소녀를 계속 다그쳤다.
" 도대체 말이라고는 콧구멍으로도 안 들어먹어요. 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엉? "
긴 머리 동생은 솟구치는 화를 못 이겨 손에 들고 있던 현란한 빛깔의 꽃다발을 내팽개쳤다.
"어머나,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어머, 세상에. 불쌍하기도 해라. 이를 어쩌면 좋아? 흑흑 "
언니라 불리지만 절대로 언니로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소녀는 동생이 집어던진 꽃들을 주워 들며 동생이 들을라 숨죽여 훌쩍거렸다.
"징징 짜지마! 짜증나 죽겠어. 나이는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거야? 한두 살도 아니고.. 도대체 그 물건은 또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설마, 또 지난번 그 무식하게 생긴 무슨 '파리사냥초'라는 벌레 잡아먹는 괴물 풀때기처럼 상수리나무 숲 주먹코 마녀 할망구에게서 돈주고 사온 것은 아니겠지?"
"저...저...그게 말이지. 주먹코 할머니가 이 '스코아리아누울리아즈'는 아주,아주 귀하고 비싼 꽃이라고 했어.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래. 나니까 특별히 싸게 해주는 거라고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했는걸."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는 그 큰 눈망울을 데구루루 굴리며 진실을 담아 얘기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어떤 화든지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지게 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짝반짝 순진무구 눈망울 작전은 결코 소녀의 눈앞에 떡 버티고 서서 불을 뿜고 있는 동생에게는 먹힐 것이 아니었던가 보다.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생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똥이 튀어나올 듯이 꿈틀거리더니 그녀의 주위로 싸늘히 바람이 휘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까맣고 긴 머리가 바람에 나부껴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다. 시. 말. 해. 봐!! 뭐라고? 그러니까 그 "소코아어쩌구저쩌구리아즈'를 결국에 그 주먹코 할망구에게서 또 속아서 덤탱이 쓰고 샀단 말이지? 또, 또, 또!! 이번엔 또 얼마나 줬어? 이 망년난 인간아, 저번처럼 생활비까지 몽땅 준거야?
도대체 언니는 생각이란 것을 하는 거야? 그 머리는 뒀다가 어디 쓰는 거냐고? 장식품으로 달아놨어? 어떻게 그렇게 속고도 또 속고 말이야.
내 허락 없이는 콩 한쪽도 맘대로 사지 말하고 그렇게 입이 닳아 떨어지도록 얘기했는데도 늘 이런 말썽만 피우고! 보따리 장수들이 언니더러 뭐라고 부르는 줄이나 알어? '기본급'이래, 기본급! 내가 정말, 언니 때문에 못 살아!! "
동생의 주위로 불던 바람이 더욱 거세 지더니, 머리가 수십 마리의 뱀을 풀어놓은 양, 사방으로 솟구쳐 날렸다.
"저기, 긴 머리 마녀 동생아. 잘못했어. 훌쩍, 훌쩍.. 내 다..다시는 아, 안 그럴께. 훌쩍. 진짜야! 그러니까 그만 화 풀어. 훌쩍, 훌쩍.
네가 그렇게 머리를 세우면 너무, 너무 무, 무섭단 말야. 훌쩍. 네가 자꾸 그렇게 아무 데서나 머리를 세우고 그러니까, 나쁜 마녀라고 소문이 나잖아? 훌쩍, 훌쩍 "
"뭐?"
훌쩍대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철딱서니 없는 언니를 보며 동생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누가 그래? 누가 나더러 나쁜 마녀라고 그러더냐고? 내 그 함부로 주절대는 마녀 년의 주둥이들 찢어놓고야 말겠어!"
흥분하여 더욱 거세게 머리를 휘날리는 긴 머리 마녀는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낼 기세로 소리쳤다.
그렇게 소리쳐대는 동생의 모습이 무서웠는지, 작은 마녀 언니는 동생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리고는 금방까지 서럽게 읽고 있던 책을 들어 올려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마지막 페이지는 아름다운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이 담겨 있는 그림이었고, 그 옆으로는 햇살을 받아 까맣게 타들어가는 마녀의 그림이 실려있었다.
"이것 봐! 여기 이 얘기, 이거 지난 번에 너 소풍 다녀온 얘기잖아. 이봐, 이렇게 착하고 예쁜 공주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벌 받아서 죽잖아. 흑흑. 너무 불쌍하다. 오, 불쌍한 내 동생. 알고보면 그래도 착한 아이인데...얼마나 아팠을까?? 오, 불쌍한 내 동생. 흑흑흑..."
작은 마녀는 책의 내용에 도취되어서는 책을 꼬옥 끌어안은채 다시 서럽디 서러운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 긴 머리 마녀는 얼굴 가득 어이없어하는 기색을 담고서는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울고있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죽겠구만, 이젠 현실과 얘기도 구별 못해서 멀쩡한 동생을 죽이네, 그것도 재수없게 까맣게 그을려서 죽여? 내가 죽긴 왜 죽어. 이 한심아! 계속 그렇게 띨빵하게 굴래?
그리고, 뭐? 누가 이쁘고 착해?? 이쁘고 착한 년 지난 겨울에 다 얼어 죽었나 보다. 그 년이 얼마나 사악했는 줄 알아? 잘난 지 아비 빽믿고 설레발치고 다니다가, 이 사고 저 사고 있는대로 치고 다녀서 온 나라에 개망나니 공주라고 소문난 년이라고. 그년 쫓겨난 것도 다 지 아버지가 하도 나라 살림 망쳐대니까 위기를 느끼고 쫓아낸 건데...뭐? 어쩌구 어째? 내 기가 막혀서...
지 주제에 남자 꼬시는 재주하나 탁월한 걸 무기삼아, 운 좋게 이웃의 얼굴만 멀쩡하고 골통인 왕자를 만났으니 그나마 팔자 핀 거지. 그년 성격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
"정말? 쿠울쩍. 팽, 킁킁. 쓰윽,쓰윽."
서럽게 우는 와중에도 동생의 말을 다 챙겨 들은 언니는 그 왕방울 눈을 굴려 눈물을 떨궈내고는 폭이 넓은 옷 소매로 스윽 닦아냈다.
"그래! 그거 죽이겠다고 난리친 것도 그년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이 암살자를 산 거지. 내가 아니라고! 오히려, 난 그거 불쌍히 여겨서 때 마다 구해줬더니? 뭐? 내가 지를 죽이려 해?
그 년이 얼마나 웃긴 줄 알아? 기껏 살려주고 내가 결혼식때 축하인사한다고 쫓아갔더니 사람들더러 내가 지 아버지를 꼬셔서 지를 죽이려했다나? 내 참 뭐 그런 배은망덕한 년이 다 있어? 내가 확 뒤집어 놓을까 하다가, 괜히 미친년 건드렸다가 피곤할까봐서, 성질 죽이고 곱게 돌아왔더니만. 이젠 나를 죽이기까지 해? 어메, 벌떡증나는 거."
긴 머리 마녀는 열에 들떠 한바탕을 쏟아붓더니 이내 씩씩대며 주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영구적으로 아이스 마법이 걸린 마법 상자를 열어 얼음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얼음을 한입에 털어넣고는 아득아득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아, 다행이다 "
동생의 말을 들은 작은 마녀 언니는 금방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던 것도 잊은채, 함박 웃음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검은 솥이 걸려있는 아궁이로 다가가 팔뚝만한 큰 국자로 솥 안의 내용물을 휘휘 휘저어 맛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불을 조절하여 솥을 들어내려던 작은 마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전히 얼음 씹어 먹기에 여념이 없는 동생에게 물었다.
"그런데, 동생아. 네 성격에 그걸 그냥 참고 왔다니 참...정말로 그냥 곱게, 아무일 없이, 깨끗하게...그렇게 돌아온 거야? "
동생이 불 같은 성격에 되로 받는 것은 말로 돌려주는 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아는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아는 작은 마녀 언니는 동생이 그냥 돌아왔다는 결말을 떠올리며 믿기지 않음과 동시에 이제 동생이 철이 들은 게 아닐까 하는 대견함과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언니의 마음을 눈치챈 동생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일어나는가 싶더니 코웃음을 흘리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곱게? 내가 또 그렇게 아량이 넓지는 못하지. 곱게는 안 돌아왔어. 돌아오기 전에 약간의 저주를 내려줬지. 후후.."
"무슨 저주?"
언니는 눈을 빛내며 동생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 멍청한 골통왕자의 씨를 말려버렸어."
"씨? 무슨 시를 말려? 어머, 설마 너 공주와 왕자가 아기를 못 낳게 만든거야? "
작은 마녀는 동생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동생의 성격에 그냥 넘어왔을리가 없고 무슨 일을 저질렀다면 그 강도 또한 높으리라 짐작이야 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저주를 걸었다고 하니 조금은 동생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를 살려준 나를 나쁜 년으로 몰았는데 당연한 결과지. 치사하게 내가 살려놓고 목숨을 도로 받아올 수는 없으니, 앞으로 후세를 못 보게 해놨어. 오호호호. 지 주제에 감히 나를 엿 먹이려 들어? 어림없는 수작! 어디 밤낮으로 평생을 용써봐라! 오호호호홋, 오호호호호홋...."
사악하게 웃어대는 동생의 웃음소리에 작은 마녀는 소름이 돋아올랐다.
'역시 ... 그나저나 큰일이네, 저렇게 우쭐해 있으니 한동안은 계속 저 상태일 텐데..'
작은 마녀는 이제 손까지 입가로 올리고는 전통적인 사악한 마녀 포즈를 잡고 본격적으로 웃기 시작한 동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호호호호홋, 오호호호호호호홋, 오호호호..꼬르륵. 어라? 언니 배고프다. 밥 먹자!"
누가 그랬던가 인간의 그 무엇보다 생존본능이 더 우선한다고..
천만 다행이도 긴 머리 마녀의 뱃 속을 뚫고 나온 본능으로의 회귀에 대한 외침에 의해 작은 마녀는 동생의 끔찍한 웃음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작은 마녀는 동생이 자칫 다시 웃어댈 것이 두려워, 서둘러 식사 준비를 했다.
흰색 테이블보가 깔끔하게 씌워진 빨간 색의 테이블 위에 작은 마녀는 금방 끓여낸 쇠고기 스튜와 치킨 샐러드 그리고 일찍이 구워두었던 따끈 따끈한 롤빵을 올려 놓았다.
식탁이 거의 차려지자, 긴 머리 마녀 동생은 그 길고 검은 머리가 의자에 깔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음~ 냄새 좋다. 오늘은 쇠고기 스튜네. 언니의 스튜는 정말 맛있다니까"
긴 머리는 마녀는 그녀의 머리가 앞으로 쏠리는 것도 관심에 두지 않고 스튜 그릇에 코를 들이밀고는 연신 킁킁 거리며 침을 삼켰다.
"정말? 동생아. 아이..기뻐라! 사실은 오늘 내가 너를 위해 특별 메뉴를 준비했단다."
동생의 칭찬에 힘을 얻은 작은 마녀는 눈을 빛내며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가마 속에서 둥근 접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짜잔~ 네가 가장 좋아하는 갖은 버섯 구이야. 어때? 맛있겠지. 특별히 향신료도 그 동안 아껴두었던 캬지민을 사용했어. 버섯 특유의 향을 없애주는 향긋한 향과 함께 매콤 달콤한 맛이 나도록 했지.어서 먹어봐! "
작은 마녀는 머리와 엉덩이에 뾰족한 귀와 꼬리만 단다면 영락없는 애교부리는 강아지 모양을 하고서는 동생의 칭찬을 기다렸다.
"와, 안 그래도 버섯 구이 생각이 간절했는데, 어쩜 역시 언니는 다르다니까. 어유, 이쁜 우리 언니, 좋았어. 기분이다. 오늘 '스코아어쩌구저쩌구리아즈'일은 잊어주지.
어디 먹어볼까? 아암,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