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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시간째, 온유는 거리에 서서 물끄러미 한 곳만 응시했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의, 공기가 별로 좋지 않은 어두운 거리.
오래 있으면 오래 있을수록 오염된 물질이 폐에 쌓이겠지만, 온유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온유는 그저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바로 앞에 위치한 [원이 도시락]은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꽤 많이 들락날락했다.
원이 도시락의 메뉴를 담은 광고지들이 창문에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안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광고지들 사이로 가끔씩 다애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온유는 마치 금광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샘솟았다.
요 몇 시간 동안, 몇 번씩이나 그런 기쁨을 경험하며 다애의 모습을 지켜봤다.
손님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다애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 다애를 확 끌어안고 싶었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온유는 쓴웃음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듯한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물 밀 듯이 들이닥치는 충동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놈의 다리는 제멋대로 움직여 다애에게로 향하려 해서 가게 문 앞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다애를 잡고 싶었던 온유의 손에 만져지는 거라고는 차가운 문고리뿐이었다.
다애의 옆에서 다애와 함께 알바를 하는 가원이 부러웠다.
폭발할 듯 일어나는 질투심의 크기는, 온유 자신도 놀랄 만큼 컸다.
자신의 안에 이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가원을 밀어내고 그 옆에 서고 싶었다.
‘내가 다애랑 같이 있고 싶어.’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쓰디쓴 한약재라도 씹은 듯 일그러진 인상을 제 힘으로는 펼 수 없었다.
이러다가 얼굴에 다림질이라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온유의 옆으로 누군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옆에 멈춘 그 사람이 태환이라는 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열부 나셨구만.”
태환이 조롱하듯 말했다.
태환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태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온유의 옆에 온유와 같은 모습으로 서서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태환이 씹던 껌으로 커다란 풍선을 만들었다가 터뜨렸다.
“방금 봤냐? 조낸 컸지?”
“응, 대단하다.”
“기네스북에 올릴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것 같아.”
“왜? 네놈 머리통보다 더 컸어.”
“아냐. 내 머리통보다는 작았어.”
“쳇. 아직 멀었나?”
“기네스북에 올라가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될 거다.”
“그럼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너만큼 열부여야 하는 거냐?”
태환이 빈정거렸다.
온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태환을 돌아봤다.
“오늘따라 왜 그래, 인마?”
“네가 다애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밖에 서서 하염없이 다애만 쳐다보는 모습을 보니,
소꿉친구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런다. 아주 그냥 가슴이 찢어진다, 찢어져.“
“그러냐?”
“그래. 대체 왜 지애랑 사귀는 건데? 너 사실은 다애를 좋아하잖아.”
“네가 다애에게 고백하지 않는 거랑 같은 이유야.”
단호한 답변에 태환은 할 말을 입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물었다.
씹던 껌을 바닥에 퉷 뱉었더니 온유가 한 소리 했다.
“너, 그렇게 아무데나 껌 뱉지 마.”
“냅둬, 이러다가 죽게.”
“후우.”
“후우.”
태환과 온유가 같은 표정, 같은 길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말이지. 네가 다애를 좋아하는 줄 알고 양보하려고 다애한테 고백을 안 했거든.
그런데 네가 갑자기 지애랑 훌쩍 사귀어 버리니까 당황을 했어. 당황한 틈을 타서
가원이 놈이 다애를 낚아채 버린 거 있지.“
“가원이라…….”
“나도 처음에는 질투도 나고, 그 놈이 좀 얄밉기도 하고 그랬지. 그런데 가원이 놈이 뭐라는 줄 아냐?”
“뭐라는데?”
“너도 가원이 아니까 걔 어떤 놈인지 알지? 걔가 자기 이외의 사람한테는 관심 없고, 무뚝뚝하기로는
따라잡을 사람이 없는데다가 여자들을 싫어하기로 유명하잖냐.“
“응.”
“그런데 걔가 그러더라. 다애한테서 반짝반짝 빛이 나서 도저히 다애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고.”
“……!”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놈을 미워할 수가 없더라. 도저히 그 녀석을 이길 수가 없어.”
“…………어.”
뒤에서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온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태환이 미간을 좁히며 온유를 쳐다봤다.
“뭐라고?”
온유의 얼굴에 사라질 듯 위태로운 미소가 걸렸다.
“아무 것도 아냐.”
“어? 뭐라고 했는데?”
“지애 만날 시간이다. 그만 갈게.”
“어? 야, 야. 똑바로 대답하고 가! 내가 네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해지잖아.”
“헛소리 좀 한 거니까 미안할 거 없어. 그럼 간다.”
온유가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꽂히는 태환의 시선을 느끼며 온유는 조금 전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난 가원이의 사랑을 이길 수 있어.’
다애와 기숙사 앞에서 헤어지고 들어가는 길은 행복하면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돌아서면 다애가 그리워져서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간신히 충동을 참고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누웠더니 천장에 떠오르는 다애의 얼굴.
활짝 웃는 얼굴이 참 예뻐서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하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가원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빠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감정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할 줄은 몰랐는데.
드라마나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 주인공들의 감정이 이해가 됐다.
“아냐, 역시 이해할 수 없어. 다애는 짜증날 정도로 예쁘니까 이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다애처럼 예쁜 애가 또 있을 리가 없잖아. 아, 난 역시 여자 얼굴만 따지는 속물이었던 건가?“
팔불출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소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벨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다애에게 지정해둔
벨소리이기 때문이다.
가원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다애에게 전화가 온 게 기뻐서 입가의 근육이 실룩거리지만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야, 뭐하냐?]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다애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공부한다.”
[범생이. 대체 그렇게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게?]
“왜 전화했는데?”
[목소리 듣고 싶어서 했다, 이눔아.]
다애의 말을 들은 가원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청량한 물빛의 미소를 가득 담고 다애의 목소리를 즐겼다.
[나, 네 트라이앵글 연주 듣고 싶어.]
한참 혼자서 떠들어대던 다애가 말했다.
“이 오밤중에 무슨 트라이앵글이냐? 뱀 나온다.”
투덜대면서도 가원은 책상 위에 있던 트라이앵글을 가지고 왔다.
“듣기 힘든 연주니까 잘 들어.”
[응. 마음 놓고 연주해봐라.]
다애의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원은 핸드폰을 베개 위에 내려놓고 트라이앵글을 연주했다.
데엥- 데엥-
맑은 소리가 방안에 가득 퍼져나갔다.
다애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은 기쁨의 연주였다.
한동안 연주를 하던 가원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야, 잘 들었냐?”
[…….]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서 끊긴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통화 중.
“야, 자냐? 어이, 김다애.”
[…….]
“멍청이. 연주하라고 해놓고 잠들기는.”
중얼거리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비단결처럼 고운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졌다.
눈을 감자, 긴 속눈썹이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좋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가원은 핸드폰 저편에서 자고 있을 다애에게 속삭였다.
“잘 자, 다애야. 나, 네가 정말 좋다. 사랑해.”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혜선과 세호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고민들이 다애를 꽉 짓눌러서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가원에게 전화를 걸면, 가원은 투덜대면서도 언제나 트라이앵글을 쳐줬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부드러운 트라이앵글의 울림을 듣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면 늘 좋은 꿈을 꿨다.
자두맛 사탕처럼 새콤하고도 달콤한 꿈인데, 어떤 꿈인지 확실한 기억은 없었다.
세호가 학교를 그만두고 며칠이 지났지만, 다애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다애와 친한 아이들은 다애를 믿어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대부분이
‘순진한 척하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까다니.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믿으면 안 된다니까.’
라고 생각하며 다애를 불신했다.
다애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소중한 사람들은 자신을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혜선이 마음이 걸려서 견딜 수 없었다.
알바를 하는 동안, 가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다애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애의 머리에서 솟아오르는 김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러다가 누군가 심지에 불을 붙이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폭발할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손님이 다애에게 도시락 하나를 주문했지만, 다애는 입을 꾹 다물고 손님의 손가락을 노려봤다.
“저기요. 이거 달라니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다애의 답변이 없자, 손님이 짜증스럽게 채근했다.
다애가 눈을 번뜩이며 손님을 노려봤다.
“뭐?”
서슬 퍼런 눈빛에 질린 손님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원이 도시락에 1년 전부터 원이 도시락에 매일 찾아오는 여중생이었다.
가원은 한숨을 내쉬며 다애를 밀어냈다.
“네, 5천 4백원입니다.”
“오빠. 제가 오빠 얼굴 봐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알바하는 저 사람,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쟤가 오늘 기분이 나빠서 그래요.”
가원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중생의 말이 전부 옳았지만, 다애를 질책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여중생은 가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는 걸 보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아, 정말 저 사람 때문에 무서워서 이 가게에 못 오겠어요. 계산도 빨리 못하고.
저 사람이 알바한 다음부터 되게 오래 기다려야 된단 말이에요.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대체 왜 쓰는 거예요? 늘 오빠가 거의 다 일을 다 하잖아요.“
“못 참겠어!”
버럭 외친 건 가원이 아닌 다애였다.
가원과 여중생이 놀라서 다애를 쳐다봤다.
가원은 다애가 여중생을 한 대 후려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여차하면 막을 준비를 했지만
다애는 여중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진짜 참을 만큼 참았어. 내 성격에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 아니냐? 앙?”
“아, 그래. 잘 참았다. 제발 진정해.”
“빌어먹을, 신혜선! 내가 이만큼이나 기회를 줬는데 전화 한 번 안 해?
내가 진짜 배알이 꼴려서 못 견디겠다.“
다애가 화내는 이유가 여중생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가원은 한시름 놨지만,
또 다른 불안함이 엄습했다.
성격 급한 다애가 혜선을 반쯤 팰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야! 나 진짜 많이 참았지? 응?”
“어. 진짜 잘 참았잖어. 그러니까 조금 더 참아라.”
“잘 참았으면 잘 참았다고, 정말 기특하다고 칭찬해줘야지! 왜 아무 것도 없어!”
버럭버럭 외치는 다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며 가원이 다애를 얼러주었다.
“그래, 그래. 너 정말 기특해. 아주 잘했어.”
“좋아.”
눈을 감고 가원의 손길을 음미한 다애가 눈을 번쩍 떴다.
다애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에 가원은 오싹함을 느꼈다.
‘이 기집애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다애가 가원을 휙 돌아봤다.
가원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애의 눈빛이 가원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야, 최가원! 나 먼저 들어간다. 뒤를 부탁해!”
가원에게 앞치마를 던진 다애는 가원이 잡을 틈도 주지 않고 바람처럼 가게를 빠져나갔다.
콰앙-
닫히는 문을 멀거니 응시하던 가원이 정신을 차리고 앞치마를 벗으려는데,
주방에서 보고 있던 가원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최가원! 너 지금 가버리면 다애 잘라버린다!”
“아, 젠장! 지금 알바가 문제가 아니에요. 다애, 오늘 살인자 될 거라고요!”
“됐으니까 가게나 봐!”
버럭 외치는 들어가는 어머니를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가원은 투덜투덜 대며 계산대에 섰다.
그리고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다음 손님!”
기숙사로 달려가며 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하다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계속 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에 부딪혔지만 사과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혜선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은 속도였기에, 기숙사 로비에 있던 아이들은 방금 들어간 게
다애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혜선의 방문 앞에 선 다애는 우선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예상했던 대로 혜선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똑-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쾅쾅쾅쾅-
부서져 나가도록 거칠게 두드려도 혜선은 나와보지 않았다.
혜선 대신에 옆방과 앞방의 학생들이 얼굴을 내밀고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하지만 그들의 불평은 다애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쏙 들어갔다.
그들은 혹시라도 다애가 자기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얼른 방문을 닫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포기하지 않고 10분쯤 더 두드려댄 다애는 잠깐 팔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가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외출했나 보네.”
다애는 털썩 앉아 혜선의 방문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야무지게 끼고 아무도 없는 기숙사 복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오늘은 날 피할 수 없을 거야, 신혜선.”
다행히 어머니는 평소보다 일찍 일을 끝내주었다.
가원은 투덜대며 가게에서 나와 다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야, 벌써 죽였냐?”
[엉? 죽이다니? 누구를?]
“혜선이 죽이려고 뛰어나간 거 아니었냐?”
[그런 일 없어.]
“그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
[이 자식아.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끊어!]
“야, 야.”
[혜선이 붙잡아 놓고 이야기 좀 하려고 온 거야. 오늘은 반드시 대화를 하고 말 거야.
일방적으로 속 끓이면서 기다리는 거, 진짜 내 성미에 안 맞거든. 알바는 끝났냐?]
“응.”
[고생했다. 오늘 내 대신 수고했으니까 내일 뽀뽀해줄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원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번쩍번쩍 빛이 날 정도였다.
가원은 핸드폰이 다애라도 되는 듯 꼭 붙들고 물었다.
“뭐, 뭘 해준다고?”
[뽀뽀해준다고, 이 자식아.]
“쳇. 누, 누가 네 뽀뽀 따위를 원할까 봐. 그래도 뭐, 굳이 해주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그래. 내일 점심 시간에 진하게 해줄 테니까 그만 좀 칭얼대고 끊어.]
다애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흐흐흐흐."
거리를 걷는 중이니까 참으려고 했는데, 뱃속에서부터 생겨나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으하하하.”
한밤중에 핸드폰을 꼭 붙들고 웃음을 흘리는 가원을, 모두 흘끗흘끗 쳐다보며 피했지만
그래도 가원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으흐흐흐흐하하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하지만 그 미치도록 좋은 기분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가원은 입을 꾹 다물고 지애를 노려봤다.
기숙사를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지애.
도대체 이 빌어먹을 기집애를 왜 이리 자주 마주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 지나가려 했지만, 지애가 가원의 앞을 막아섰다.
회색의 긴 후드티를 입은 지애가 도발적으로 가원을 응시했다.
갈색의 매혹적인 눈동자, 반듯한 이마에 흐트러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
다른 남자들이었다면 침을 꿀꺽 삼킬 섹시한 모습이었다.
그래, 지애는 사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다애에게 눈이 멀어버린 가원의 눈에는 지애의 미모 따위가 안중에도 없었다.
지애의 생김새 같은 건 돌아서면 잊어버릴 부질없는 것이었다.
지애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가원을 올려다봤다.
가원은 지렁이라도 씹은 듯 오만상을 구기고 지애를 노려보다가 지애를 비켜 지나가기 위해 발을 뗐지만,
다시 지애가 막아섰다.
가원이 낮게 경고했다.
“한 대 처맞고 비킬래, 그냥 비킬래?”
“난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네가 뭘 알고 있는지 관심 없으니까 꺼져, 이 스토커 기집애야.”
“후후후.”
지애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상큼한 미소? 아니, 가원에게 그건 썩은 미소였다.
“최가원, 난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지애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숙사 로비에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이 시간에는 대부분 방에 있을 시간이기에 로비에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은 드물었다.
간혹 있다고 해도 숙제를 주고받는 학생들이거나,
일이나 연습을 끝내고 뒤늦게 방으로 들어가는 학생들뿐이었다.
사감실의 창문을 굳게 닫혀 있었고, 사감은 귀에 헤드폰을 끼고 PMP로 일본 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지애와 가원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애가 목소리를 낮추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춘다는 건 곧 비밀을 말하려는 것일 텐데, 가원은 지애와 비밀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다애 언니는 어째서 너보고 약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긴, 뭐. 다애 언니의 눈에는 네가
약한 것 같겠지. 다애 언니는 힘만 세잖아. 여자면서도 말이야.“
가원의 목탄처럼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튼 난 네가 정말 좋거든. 나랑 사귀지 않을래?”
“너, 이온유랑 사귀는 거 아니었냐?”
“아아, 그게 문제야?”
지애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거라면 문제없어. 온유는 너랑 내가 사귀어도 이해해줄 거거든.”
“내가 이온유의 이해를 받으면서까지 너랑 사귀어야 할 이유가 있냐?”
“응, 있어.”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당당한 대답이 나왔다.
가원은 물끄러미 지애의 입술을 응시했다.
도톰한 입술 안에 보이는 혀가 마치 뱀의 혀 같이 움직였다.
“다애 언니는 우리 집에 입양된 애거든. 부모도 없는 고아를 우리 부모님이 데려다가 키운 거라고.”
승리의 깃발을 잡은 듯 의기양양한 지애의 말을 듣는 순간,
전에 봤던 다애 부모님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입양된 딸이었기 때문에 지애와 다애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가원은 미간을 좁혔다.
가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지애는 게임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자, 어때?”
“그거 정말 잘 됐네.”
가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지애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지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원의 입꼬리가 서늘한 칼날처럼 휘어졌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가원이 지애를 노려봤다.
가원의 냉철한 눈빛이 지애에게 꽂히는 순간, 지애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 눈동자다. 이게 바로 지애가 가지고 싶었던 눈동자였다.
차갑고 강하고 아름답다.
온유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움이었다.
지애의 심장이 강렬한 소유욕으로 인해 불타올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그런 열망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휘몰아쳤다.
“난 정말 기쁘다. 다애의 몸에 너와 네 부모처럼 지저분한 피가 흐르지 않다니.
사실 다애랑 결혼하면 너랑 네 부모를 마주칠 일에 소름이 끼쳤었거든.
진짜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너…….”
지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가원이 무 썰듯 깨끗하게 잘랐다.
“그럼 이제 할 말 없지? 알려줘서 고맙다. 난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애를 사랑할게.”
가원은 지애를 밀치고 걸어갔다.
가원의 반응은 지애의 예상과는 달랐다.
오래 전에 거실에서 엿들어서 알게 된 다애의 입양 사실.
그 때부터 지애는 다애가 가진 거라면 뭐든지 다 빼앗았다.
이상할 정도로 다애가 좋은 걸 갖는 게 보기 싫었다.
원래 온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온유와 다애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순간
온유를 빼앗고 싶었다.
온유에게 다애의 입양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온유는 크게 놀라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다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지금 가원의 태도는 뭐란 말인가.
이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원이 다애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지애가 얼른 가원의 팔을 붙잡았다.
가원이 막 남자 기숙사의 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였다.
“다애 언니는 이 사실을 몰라!”
지애가 다급히 외쳤다.
가원이 서늘하게 지애를 쳐다봤다.
지애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다애 언니는 자기가 입양됐다는 걸 몰라. 다애 언니에게 우리 가족은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야.
그런데 자기가 사실은 우리랑 가족이 아니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되겠어?
분명 절망할걸.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거야. 외톨이가 되는 거잖아.
어쩌면 자살을 하려고 할지도 몰라.“
가원이 거세게 지애의 손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지애는 비틀거렸지만 겨우 계단의 난간을 붙잡아서 넘어지지 않았다.
“너, 그런 말로 이온유를 네 옆에 붙잡아뒀냐?”
“그래. 그게 정상 아냐? 온유 같은 행동이 정상이야. 넌 다애 언니가 걱정되지도 않아?
다애 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물론 난 다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런데 말이야.
다애가 그런 걸로 절망하고 자살할 것 같냐?“
“뭐?”
“다애는 그 정도에 너부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연약한 애가 아니야.
괜한 짓거리로 날 붙잡으려는 생각하지 마. 정말 구역질난다, 너.“
이런 취급을 받다니.
지애는 언제나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던 자신이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걷어차이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지애의 눈이 분노로 불타오르고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간을 세게 움켜쥐고 가원을 노려보며 지애가 말했다.
“나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는 게 좋을걸. 난 다애 언니보다 똑똑해.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난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해서 다애 언니를 절망에 빠뜨리는 수밖에 없어.“
“한 번 해봐.”
가원이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온힘을 다해서 다애를 지킬 테니까.”
가원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기숙사 계단을 올라갔다.
뚜벅뚜벅 울리는 걸음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지애의 온몸을 후려쳤다.
지애는 이를 으드득 갈며 가원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오만상을 구기고 복도를 걸어가던 가원은 방에서 나오던 온유와 마주쳤다.
몰랐는데 온유와 가원의 방은 같은 층이었다.
가원을 본 온유가 총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며 멈췄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원에게 눈인사를 했다.
하지만 가원은 답해주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온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피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서 복도를 걸었다.
가원과 온유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졌다.
가원은 온유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온유는 어째서인지 가원의 눈빛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아 힘겹게 가원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갔다.
가원과 온유의 몸이 스치는 순간, 가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병신 새끼.”
조롱과 비난, 동정을 담은 그 목소리가 얼음송곳이 되어 온유의 심장을 후벼 팠다.
뒤에서 가원의 방문이 열리고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온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메두사의 눈을 보고 돌이 된 잊힌 영웅처럼, 온유는 우두커니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장편 ]
아수라장 스케치북 27
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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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3 20:15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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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젤 처음 보는거네요^^ 너무 재밌어요 다애랑 가원이랑 잘될것같은 예감~
지애 고 나쁜년이 또 무슨일을 벌일지.. 지애 너무 무서워요 다애도 이제 좀 똑똑해졌으면 조겠는뎀ㅋㅋ
재미있어요 ㅇ_ㅇ!!
저사실 쪼꼼 예상했더여 여러가지상상했떠여 ㅎㅎㅎㅎㅎ
오늘 첨 봤는데 와우 한번에 쫙 읽었다죠!!진짜대박인데요~~히히 잘읽고가요!!>8<
지애 정말 맘에 안드는군요
.. 왜 온유랑 다애랑 이어졌으면 좋겠지 ㅋ
정말 짱이야 !!!!!!1111111 쩔어요 나쁜 지애가스나 콱
헐...저렇게대할려면아예입양을하지나망지--
헙... 진짜로 가짜부모였군뇨.. 하하하…. 후훗 유영철이 살아있다면 지애뇬과 그 부모를 가져다 바쳐버리고 싶은 맘이 간절하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