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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 기사전송 2011/06/29 16:24
아래는 이희호 여사 강연 전문
순천매산여고 강연문 (2011.6.29.수)
꿈과 용기를 갖자
존경하는 순천매산여고 장용순 교장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선생님들, 학생 여러분. 오늘 나에게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니 마음이 설렙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만, 나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이화고녀를 졸업했습니다. 지금의 이화여고의 전신입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이화고녀는 매산여고와 마찬가지로 미션스쿨이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다닌 까닭에 학교의 채플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교회에서 연극활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에도 연극반 활동을 했습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연극을 할 때면 저는 남장을 하고 이수일 역을 맡아 했습니다.
이화고녀에 입학해서 처음에는 검정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따고 댕기를 달았습니다. 입학 때부터 단발머리를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머리 기른 학생은 머리를 되도록 자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3학년때 수학여행을 금강산과 경주 두 군데를 갔는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게 됐으나 4학년생은 일년 입고 졸업하게 되므로 부모님 부담이 많으니 부모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해서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양복을 입었으나 다른 학생은 허락없이 양복을 입었습니다.
나는 너무 고지식한 학생이었으며, 어떤 학생은 머리는 자르고 싶은데 아버지가 반대할까봐 집에서 알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단발을 허락함’ 이라고 써서 선생님께 보여드리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화고녀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은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입니다. 그때는 남과 북이 지금처럼 나뉘어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금강산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비로봉을 걸어서 내려오자 해금강이 보였습니다. 모두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내가 1등으로 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이화고녀 졸업 후 지금의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자 전문학교을 마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나는 남녀차별이 심한 시절에 이렇게 남다르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부모님, 형제들,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나의 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1940년대, 1950년대는 여성에 대한 차별, 남존여비 사상이 아주 강했습니다. “여자는 집안 일 돕다가 남편 잘 만나 시집가면 된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 이름 세 자 쓸 정도만 배우면 되지” 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자들도 배워야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여성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여성문제연구회를 만들고 참여했습니다. 한국 YWCA 연합회 총무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내가 한 활동은 우리 사회의 남녀차별 문제를 지적하고 시정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남녀평등, 여성의 권리를 찾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여자가 결혼하면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운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돈 많은 남자들은 본처가 있는데 첩을 데리고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첩이 들어와 호적에 자기의 이름을 올리면 본처는 하루아침에 첩이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 정치인들이 요정에 다니는 일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치인들이 요정에서 만나 일을 하는 ‘요정정치’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나는 1962년 마흔 살의 나이에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했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저의 결혼을 모두가 한결같이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반대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내가 여성운동의 지도자로 남아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할 상대인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당시 남편은 아주 곤궁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남편은 몇 차례 국회의원 출마로 재산을 다 잃었고 특별한 직업도 없었습니다. 전처 소생의 어린 아들 둘과 병을 앓고 있는 시누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동료들은 나의 선택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남편과의 결혼은 저에겐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전 남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남편은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이 풍부했고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올바른 정치를 해보겠다는 굳은 신념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편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혼 후 생활은 나아지고, 기쁜 시간도 있었지만 고난의 시절이 훨씬 더 많았고 길었습니다. 나의 <동행>이라는 자서전의 부제는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와 남편은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 후 남편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71년에는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영광의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남편과 나는 고난의 긴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1973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본에 있던 남편을 납치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1976년에는 3.1민주구국사건으로 남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실 광주 민주화 사건에 대해서 남편은 이유없이 연행됐기 때문에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조정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더불어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귀국후에는 연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고난의 무대는 무려 30여년 가까이 오래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습니다.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나와 남편에게 주어진 영광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기나긴 고난의 시간을 겪고 난 후에 그 영광의 시간은 찾아왔습니다.
학생 여러분!
나와 남편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분단된 나라 대한민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남편을 비롯한 위대한 민주주의 수호자들이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고 목숨을 바쳐 얻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이처럼 역사와 국민에게 충성스러운 분이었고 나와 가족에게도 정성을 다하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수십년 동안 우리 가정에게 주어진 박해를 이겨내는 힘이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저와 제 남편이 살아온 원동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앞으로 긴 인생에서 어떤 길을 갈지를 찾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그동안의 제 인생 경험에 비추어 여러분에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뜻을 세우고 인생 설계도를 그려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회에 나가면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인생의 계획과 설계도를 그려보는 일입니다. 설계도 없이 사는 사람과 설계도를 보며 사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설계도를 가진 사람은 자기 주관이 분명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미리 알고, 한 길로 노력하게 됩니다. 설계도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린 설계도는 엉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설계도는 필요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면서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용기를 키워나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용기란 도전하는 힘입니다. 용기란 미지의 세계,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남편은 수십년 동안 한 길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납치, 감옥생활, 사형선고, 연금, 망명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민주주의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확신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나와 남편은 수많은 고통을 받으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의 앞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탄탄대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불확실함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쉬지 않고 앞으로 나가다보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 용기를 키워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나는 여러분에게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내 남편의 평생의 좌우명이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은 자신의 양심대로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처한와 환경에서 양심이 명령한 대로 실천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출발입니다.
나는 ‘행동하는 양심’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지만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남편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신앙에 대한 나의 경험을 말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미션스쿨에서 공부를 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계속해 왔습니다. 결혼 후 남편은 천주교 성당을, 나는 감리교 교회를 다녔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크리스찬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온 것을 매우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나에게 신앙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때는 바로 1973년 남편이 일본에서 납치당해 생사를 모를 때, 그리고 1980년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싸우는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신앙은 이처럼 고난을 받을 때 큰 의지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것이 뜻대로, 계획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에는 좋은 일도 많이 찾아오지만 고통도 찾아옵니다. 나와 남편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겪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신앙은 나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안식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답답한 일이 있으면 성경을 큰소리로 낭독하거나 찬송을 소리 높이 부르곤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밝아지고 가슴도 상쾌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 소외 받은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의(義)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결국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내 남편 김대중 대통령은 재작년 우리 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롭고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에 있습니다. 꿈과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디.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이희호여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요....()
여사님이라도 늘 건강하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금강산 보는 것이 꿈이다"든 일반적 사고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아태재단에 6 만원을 입금하고 금강산 구경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몀박 정권 하에선 도저히 가능성이 없겠네요.
그나마 금강산 관광권이 중국 기업에 넘겨질 모양이니 자꾸" 늙어만 가는데 에라, 빌어먹을 팔자야! 한숨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