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ddanzi.com/free/838894377
이승만 하야 과정은 이승만이 하야 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전환된지 겨우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라, 이승만을 하야 직전까지도 "국부"라 예찬하던 시기였던 관계로, 현재 알려진 내용들이 상당히 윤색되어 있음을 감안하여야 함.
따라서, 당시의 윤색을 빼고 사실만 본다면, 전 국민적인 하야 압박 + 군의 시위 진압 포기선언 +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1960년 4월 19일 하루에만 서울에서 104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서울 시내 거의 모든 파출소가 방화/파괴된 상태에서 오후 3시 계엄령이 발효되고 이어 오후 5시에 계엄군이 서울시내 일원에 배치되며 4월 20실 새벽까지 이어지던 무장 시위대가 고대에서 국군 15사단에 의해 해산된 것을 마지막으로 서울시 일원에서의 시위는 잦아들었음.
이때, 자유당과 이승만은 이기붕 사퇴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이미 이것은 당시 국민 정서에는 크게 모자란 상황이었음.
또 하나는 4월 19일 시위로 서울시 일원의 경찰력이 사실상 증발하였음, 경찰 복장만 입고 있어도 시민들에게 맞아 죽을 상황이었고 실제로 시민들에게 발포하며 도주하던 경관들이 시민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음. 서울시 치안은 사실상 계엄군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
4월 21일 국무위원 전원 사퇴 (2025년 현재와 비교해 보면...)
4월 23일 당시 부통령 장면 사퇴,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사퇴고려 발표(사퇴 고려 성명에서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핀 꼴)
이 성명에 의해 결국..
4월 19일의 6일 후인 4월 25일 서울대 교수진이 봉급 수령을 위해 모이는 자리에서 비상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258명의 서울대 문리과 교수들이 시위에 나섰음. 시위는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당시 서울대 문리과 대학 대학본부 앞 광장)에서 시작하여 종로를 거쳐 중앙청앞 현재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음.
그런데 이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순식간에 시위 규모가 1만명이 훌쩍 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음.
이때, 서울대 문리과 대학교수들의 요구는 "이승만 하야" 였음.
통금을 앞둔 6시경 교수들 시위는 자진 해산하였으나 이미 시위대는 통행금지 사이렌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의 계엄군 1차 저지선 앞에서 철야 농성을 하였고 다음 날 새벽 5시부터 이 상황을 목도했던 시민들이 다시 모여 들기 시작함.
이 상황에서 4월 25일 밤, 당시, 계엄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이승만에게 시위가 다시 일어나면 진압 불가임을 통보 (혹은 김정렬 장관?). 해결책은 "하야"임을 통보한 것으로 보임.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7년 밖에 안되어, 이승만과 주요 장성들이 한국전쟁 당시 상황으로 자주 얼굴을 맞대는 바람에 이승만에게 직접 보고 요구등이 가능했음. 그런데 전쟁 후 이기붕의 비서실이 족청계 숙청을 통해 권한이 강화되며 군과 소원해지기 시작)
출근 및 학생들의 출석이 시작되던 때에 광화문 상황을 보게된 시민들이 너도나도 광화문으로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고 오전 9시에는 이기붕 자택이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끌어 내려져 파괴됨. 이어 시위대는 다시 경무대로 향하면서 계엄군 1차 저지선과 맞닥뜨리게 됨.
이때, 계엄군은 모두 받들어 총 자세로 부동자세를 취하였고 시민들에게 그 어떤 시위 해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 10대 시위 학생이 탱크위로 올라가서 "국군은 우리편이다" 라 외치자, 너도나도 계엄군 탱크에 올라타기 시작한 사진이 그것. 이어, 광화문 광장 제 2 저지선도 그렇게 돌파됨. 효자동으로 가는 제 3 저지선에서 최초로 최루탄이 발사됨.
이때, 계엄군에서 시민대표를 선정하여 이승만과의 만남을 주선함. 이때가 오전 10시였고 최소 광화문 광장 앞은 10만명의 시민으로 가득차 있었음.
같은 시각, 군은 이승만에게 지위 진압 불가를 보고 하고 있었음. 오전 9시경에 김정렬 국방장관은 시위 진압 불가 및 이승만 하야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4월 25일 국무위원 전원 사퇴로 공석이 된 외무장관에 사실상 과도정부 수반격으로 입각한 허정 외무장관역시 이승만 사퇴를 강력히 요구함. 이어 매카나기 미국대사도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0시 경, 경무대를 방문하기로 약속되었음.
이때, 송요찬 계엄군 사령관이 시민대표 5명을 경무대로 초청, 시민대표 역시 이승만 하야를 강력히 요청. 같은 시각, 미국대사는 경무대에 도착 후, 대기 중. 여기서, 시민, 군, 관료,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이승만이 하야를 결정.
(이때 매카나기 대사는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하는 모양새로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 처럼 하기 위해 일부러, 시민대표 면담 후 이승만 하야 결정이 내려 진 다음 이승만을 면담한 것으로 보임. 외교적 수사로 이승만을 미국의 국부 워싱턴에 비유하기도 함)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 이승만 사임 발표
== 뱀발==
그런데 하야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 하였음에도 그 다음날인 4월 27일 끝까지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이승만은 국회에 제출해야 할 사임서를 갑자기 제출하지 않겠다고 몽니을 부림.
허정 외무장관과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에 나섰으나 요지부동. 결국 허정 외무장관이 거의 협박에 가까운 강압을 하자, 그제서야 사임서를 제출.
1.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 제도가 폐지되고, 외무장관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현재의 국무총리를 겸하는 제도로 변경 되었음. 따라서 1960년 4월 25일~4월 26일에는 허정 외무장관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지금의 국무총리 역할이었으며, 당시, 중립적인 국정운영으로 4.19 이후 상황을 잘 정리하고 제 2 공화국 헌법 개정과 이어 총선거까지의 국정을 잘 이끌었기에, 허정 수반은 지금도 혼란기 과도정부가 어떻게 국정을 이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됨. 2025년의 누구와는 완전히 비교됨
2. 이승만은 약 한달 뒤인 동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 이 망명은 정상적인 망명은 아니고 매우 비밀스럽게 추진되었으며, 당시 망명관련 신문 보도도 실제 취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추리" 로 이루어졌음. 이 바람에 정확한 망명 날자를 맞추지 못했고, 망명이 이루어진 후 이승만의 망명이 발표됨.
이승만 망명이 마치 하와이에 몇 달 요양하려 갔는데, 후에 한국 정부가 귀국을 불허했다는 식의 서술이 있는데, 이는 고령으로 깜박깜박 하던 이승만의 주장으로 보이며, 실은 허정 과도정부와 미국측이 급하게 이승만의 망명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임. 실제로 이승만은 하야 당시, 하와이로 망명하라는 말인가..하며 하야시 망명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으로 생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