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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GEM / 콘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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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4 오후 9:31:30 입력 / 2010-10-24 오후 10:13:13 수정 |
![]() [제1부]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인노시마 - 바로가기 [제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토모노우라 - 바로가기 [제3부] 조선통신사 VS 본인방/교토 [제4부]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테 [제5부] 19로, 1만 리/관서일대 [제6부] 20세기의 영웅들/도쿄 [제7부] 기타니를 기억하는 1천명의 대국/히라츠카 S#1. 신비한 부목반(浮木盤)의 전설 일본 정창원에 백제시대 바둑판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둑 팬들이라면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이 바둑판은 상아로 상감된 측면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 최고의 예술품이자 일본 왕실의 보물로 손꼽힌다. 바둑통에 코끼리가 새겨져있어 백제가 아니라 남방 지역에서 온 것 아니냐는 설도 나오지만 일본의 기록을 보면 과거 백제에서 낙타도 보내온 적 있고 기록이 남아 있으니 사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뿐만 아니라 용호문 나전기반이나 나전장생문기반 등 일본에서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우리의 바둑판이 상당히 많다. ![]() ![]() ▲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목화자단기국과 은평찰합자 바둑판(일본 정창원 보관) 오래 전에 MBC에서 바둑드라마 <부목반>을 방연한 적 있었다. 국내에서 바둑을 소재로 제작된 최초의 작품이다. 부목반이란 물에 뜨는 나무로 만든 바둑판인데 일본 본인방 가에 비전(秘傳)되는 보물로 통한다. 그 내력인즉,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 본인방 산샤(本因坊算砂)라는 도승(道僧)이 있어 바둑에 정통하니 때때로 오다 우대신(右大臣)과 대국하여 기법(棋法)을 논하고 정을 붙였다. 그 무렵 바닷물 위에 떠 있던 비자나무 고목을 한 어부가 건져 올려 오다에게 헌상한 것으로서 바둑판을 만들어 산사에게 선사했다. 산샤는 그 바둑판을 전가(傳家)의 보물로 소중히 간직하며 본인방가의 영예로 삼았으니 기도(棋道)의 융성함이 이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훗날 화재가 발생해 부목반이 개울에 버려졌다 발견되고,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본인방 가에 위기가 닥치면서 부목반이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그 부목반이 엉뚱하게 조선의 망명객 김옥균에 의해 거론된다. 17세 본인방 슈에이가 후계자 슈호(秀甫)에게 부목반과 함께 본인방 자리를 물려줬는데 석 달 만에 슈호가 사망하면서 바둑판이 다시 슈에이에게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슈에이가 부목반을 김옥균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 사실이 1891년 1월 19일 후쿠오카 신보에 실렸다. <조선의 명사 김옥균을 찾아갔더니 사람을 시켜 고색창연한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그가 뚜껑을 열면서 ‘이것이 부목반이오.’ 라고 했다. 단순소박하나 고아(古雅)스런 운치를 풍기는 바둑판은 본인방 세가(世家)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진품이었다.> 또 다른 문헌을 보면 김옥균이 당시 일본 바둑계 중진급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바둑계의 위기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조선의 외로운 망명객 김옥균은 그 무렵 본인방 슈에이, 슈호, 슈겐, 슈사이 등과 절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부목반의 행방은 묘연하다. ![]() ▲ 일본 여인들의 바둑두는 모습이 담긴 그림. S#2. 교토를 헤매다. 10월 4일 신칸센을 타고 후쿠야마에서 교토로 이동했다. 과거 조선통신사 행렬이 두어 달 걸렸을 여정을 세 시간 만에 주파했다. 바둑 로드 이벤트의 다음 장소는 교토 인근의 히코네(彦根). 하루의 짬이 있어 교토의 바둑 유적을 찾아 다녔다. 필자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므로 통역이 없으면 짧은 영어와 필담으로 현지인들과 소통했다. 과거 조선통신사들이 필담창화를 했던 것처럼. 그런데 희한하게 그럭저럭 잘 통했다. 그런데 교토에서 필담이 빗나갔다. ![]() ▲ 지나가는 길에 바라본 교토성. 택시기사에게 작코지(寂光寺)를 가자고 글씨를 보여줬더니 단번에 알아보고 핸들을 꺾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교외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장장 40분 넘게 달리더니 깊은 산 속의 계곡 길로 들어갔다. 거기에 웅장한 사찰이 있었다. ![]() ▲ 적광원 안내판을 보니 작코잉<寂光院>이다. 적광원은 594년 성덕태자가 지은 사찰로 신분이 높은 가문의 여성들이 주지를 이어와 유명한 곳. 천 년 전에 조성된 정원이 눈길을 끈다. ![]() ▲ 적광원의 정원과 연못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뚫고 까마득히 높은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섰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바둑 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기념품가게에 들러 여직원에게 문의했더니 인터넷으로 검색해 적광사의 주소를 알려준다. 맙소사! 지도를 보니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 부근 아닌가? “죄송합니다. 절은 작코잉이 유명하거든요. 작코지는 처음 들어 봅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적광사를 찾아내니 반가움이 더했다. ![]() ▲ 어렵게 찾은 적광사. S#3. 본인방과 바둑을 두다 적광사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유명한 관광명소도 아니고 규모도 작아서 이방인이 찾기 어려운 사찰이다. 그러나 이 절에 조선통신사와 본인방의 기록이 남아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러보고 싶었다. 신칸센역에서 히코네로 직행하지 않고 교토에 남은 이유는 오직 적광사 때문이었다. 필자의 발길을 따라 동행한 유창혁 9단은 장거리 이동에 지쳐 보였는데 적광사의 사연을 듣더니 눈빛이 살아났다. “와! 이런 곳이 있었나요?” 한국에서 취재를 왔다고 밝히자 주지스님이 반색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적광사는 불상을 모신 사찰이지만 바둑과 관련한 조선인의 글씨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같은 곳이었다. ![]() ![]() ▲ 주지스님의 안내로 적광사를 둘러 보았다. ![]() ▲ 주지스님과 인터뷰 중인 필자. ![]() 건곤굴(乾坤窟)- 이 글이 바로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온 이약사(李礿史)의 작품이다. 1615년 이 절의 주지였던 본인방 산샤와 이약사가 대국을 했다. 치수는 3점이었고 산샤가 이겼다. “평생 바둑만 연구한 본인방에게 3점이면 이약사란 분은 거의 조선의 국수(國手)급이었을 겁니다.” 유창혁 9단이 설명한다. 하긴 그 당시 조선의 바둑과 일본의 바둑이 달랐으니 3점의 치수는 부끄런 운 게 아닐 터. 이약사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적광사로 <건곤굴>이란 글씨를 써 보냈다. [운명을 건 큰 승부였다.]는 의미다. ![]() 도대체 그 한판의 바둑이 어째서 큰 승부였단 말인가? 운명을 걸었다니 더욱 궁금해진다. 조선과 일본의 바둑 수준을 겨뤄보자고 했던 건 아닐까? 이약사란 인물은 국내 어느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수라면 조선통신사를 선발할 때 일본의 바둑 붐을 감안해 일부러 국수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학자, 문인, 장인, 예인할 것 없이 조선통신사 구성원은 다양했다. 궁술의 달인이나 기마기예의 재인들까지 데려갔으니 바둑의 고수도 포함될 법한 일이다. 그러나 기록을 자세히 보니 또 묘연해진다. 겐나(元和) 1년이면 1615년인데 그 시기에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없었다. 1차가 1607년(선조40년)이고 2차가 1617년(광해군9년)에 파견됐으니 이약사와 산샤가 둔 시점이 공중에 뜨고 만다. 혹시 선발대로 먼저 간 게 아니라면 이약사가 조선통신사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길이 애매한 것이다. 그러나 적광사에 남아있는 기록이 유일한 바둑사료이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바둑과 관련해서 정말 귀중한 우리의 국보 급 유물들은 거의 일본에 남아있다. 임진왜란과 일제 36년의 침략을 통해 약탈해간 것이 대부분이니 문화재 반환운동을 펼쳐 환수해 와야 할 것이다. 민간 차원에서 몇몇 소장가들이 그런 바둑판을 국내로 반입해온 적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 ▲ 조선통신사 행사를 기획한 기타니 손자, 적광사 주지, 유창혁 9단, 필자. 의자왕이 바둑판을 보낸 것처럼 일본에서도 바둑판을 조선에 선물한 적 있었다. 조선 인조 때 도쿠가와 막부에서 보냈다. 일본의 사신이 그림, 경대, 바둑판을 가져왔는데 좌부승지 홍명형이 임금께 건의했다. “왜국과 화해했으니 예물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둑판만큼은 완희물(玩戱物)로 사대부가 멀리해야 할 물건인데 구중궁궐에 둘 순 없는 일입니다. 돌려보내는 게 합당합니다.” 그러자 인조가 대답했다. “네 말이 합당하다. 그리 하도록 해라.” 이래서 바둑판은 되돌려 보내졌다. 조선과 일본의 바둑 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때 받았더라면 지금 의자왕의 목화자단기국과 교환을 제의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다음 화에 계속) 내일은 제4부 -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네) 편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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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GEM / 김종서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