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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3장 1절 ~ 8절
또 예레미야가 아직 감옥의 뜰에 갇혀 있을 때, 주의 말씀이 두 번째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1)
Moreover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Jeremiah the second time, while he was yet shut up in the court of the prison, saying, 1)
moreover 부사 격식 게다가, 더욱이 (=in addition)
court 법정, 법원 (→courthouse, courtroom)
moreover을 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and를 쓰지 않고 moreover를 사용한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한번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주어졌고, 이에 더하여 새로운 말씀이 주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더하여 주어진 말씀의 의미는 먼저와 다른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에서 두 번째 예레미야라는 번역은 첫 번째 예레미야와 두 번째의 예레미야가 있다는 의미로 혼동될 수 있는 번역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은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그 부분을 고쳐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더하여 예레미야가 아직 법정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주의 말씀이 두 번째로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법정 (法廷/法庭) 법원이 소송 절차에 따라 송사를 심리하고 판결하는 곳.
廷 조정 정 1 조정(朝廷) 2 관아(官衙), 관서(官署) 3 뜰, 앞마당
법정의 정 廷의 의미가 뜰 앞마당이라는 한자이므로 법정이라고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앞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에 추가로 말씀하시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곳의 조성자인 주, 그것을 형성하여 견고히 세우는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가 그 이름이라. 2)
Thus saith the LORD the maker thereof, the LORD that formed it, to establish it; the LORD is his name. 2)
thereof ① (문어) 그것의 ② 그것에 관하여 ③ 그것으로 ④ 그것이 원인이 되어
the maker thereof 를 그곳의 조성자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곳과 그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그곳이라는 번역은 그 지역을 한정하여 창조하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느 지역을 개발하거나 제가 모임을 만들거나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주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그것의 조성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러한 번역실수는 thereof를 there(그곳)와 유사한 뜻으로 인식한 흔적입니다. 그러나 thereof는 사전적인 의미로 그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그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그곳에 이어 나오는 그것은 다시 그곳을 지칭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만든 자 {주}, 그것을 조성하고 굳게 세운 자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주}가 그의 이름이니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킹제임스 흠정역 / 개역개정 예레미야 33장 2절
킹제임스 흠정역과 개역개정에 모두 그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말씀보존학회는 한글 킹제임스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공급하고 있으므로 "그곳의 조성자"라고 하나님의 창조를 한정되게 번역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는 말씀보존학회의 혼동을 일으키는 번역을 정리하는 것에 지칩니다.
이러한 번역의 오류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글 킹제임스 유일주의는 이러한 모습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경진도 모임을 다시 재정립하려고 합니다. 저는 처음 공지부터 성경진도 모임으로 시작하였는데 모임이 나오신 분들이 모두 딥스테이트와 같은 정보와 서로 위로를 나누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모임을 기획하고 주관한 것은 저이고, 성경진도모임으로 반복하여 공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만이 성경진도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할때의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한 분이라도 모임의 시작의 취지에 동의한다면 저는 모임을 갖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임을 가질 이유도 여유도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써 만물의 조성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찮은 인간이 기획한 모임에서도 그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가면 그것을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분의 마음에 아주 조금이라도 제가 공감할 수 있음도 은혜라고 느껴집니다.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3)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3)
분별과 은혜는 각자의 몫입니다. 제글로 저의 분별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읽는 분들의 분별에 이르는 것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도 이웃블로그의 글들을 보는데 제 글을 읽는 분들의 분별함에 있어서 실망스러운 부분들을 발견하였습나다. 그러므로 분별은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그 방법은 딱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과 기도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이 세상을 이기기에는 부족하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중의 하나의 형식으로 성경진도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나누고자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모임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마태복음 6장 31절 32절 33절
마지막때에 딥스테이트나 일루미나티의 정보들에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염려로 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그들의 압제에서 살아나려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침공에 있어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바빌론을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길도 기도도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일루미나티의 위협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 땅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보와 분별 위로로 인내에 이를 수 없고, 일루미나티의 비밀 고급정보로도 세상을 이길 인내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게되는 일루미나티의 정보들은 모두 그들이 일부러 흘린 것입니다.
저는 위의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성경진도를 유지함으로 제가 주께 부르짖고 주께서 응답하시고, 제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있는 일들을 저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길을 다른 분들에게도 추천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중에서 먼저하여야 할 것은 말씀을 읽는 것부터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승려와 이슬람의 이맘과 명상을 하는 사람의 기도와 다르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가 토루와 칼에 의해 무너진 이 성읍의 집들과 유다 왕들의 궁에 관하여 이같이 답하노니 4)
For thus saith the LORD, the God of Israel, concerning the houses of this city, and concerning the houses of the kings of Judah, which are thrown down by the mounts, and by the sword; 4)
예레미야에게 먼저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것이니 땅을 사라라는 것이고, 위의 말씀은 더하여 무너진 유다 왕들과 궁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그들이 칼데아인들과 싸우러 왔으나 내가 나의 분노와 진노로 죽인 사람들의 시체들로 이 성읍을 채우게 하였고, 그들의 모든 악함 때문에 내가 이 성읍에서 나의 얼굴을 감추었도다. 5)
They come to fight with the Chaldeans, but it is fo fill them with the dead bodies of men, whom I have slain in mine anger and in my fury, and for all whose wickedness I have hid my face from this city. 5)
주께서 칼데아인들과 싸우러 온 사람들을 주의 분노와 진노로 시체들로 성읍을 채우시겠다고 하시고, 그들의 불순종의 악때문에 위의 3절의 말씀의 반대로 그의 얼굴을 감추시겠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칼데아인들과 싸우러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칼데아인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운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서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에베소서 6장 12절
영적 악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악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핍박세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악과 싸워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부의 악들에게 이미 승리한 것이 됩니다. 영적 악에게 대항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어두움의 주관자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에 설명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악함으로 인하여 칼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칼데아인들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주관자들은 천주교입니다. 유럽은 중세의 종교개혁으로 교황권아래에서 벗어나서 왕권이 회복되었다가 프랑스혁명등으로 왕권이 몰락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점차 세계는 다시 교황권아래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한 중 일 세나라도 임진왜란으로 천주교를 잠시 경험한 이후에 다시 천주교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중세의 교황권은 정치 권력이었지만 지금의 교황권은 그 권력이 금융 권력으로 기업과 은행으로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앞으로의 세상의 모습은 중세의 유럽의 모습을 연상하면 됩니다. 15분도시와 탄소저감을 이유로 숨도 마음껏 쉬지 못하는 강력한 통제사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들의 배후는 사탄숭배자들 곧 어두움의 주관자들이고 영적 악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과의 전쟁이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이런 자들과의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시더라.
요한복음 16장 33절
미래에 일어날 전쟁이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탄도 알고 있으며 그 때가 가까이 올수록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확신하는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일 수록 이땅의 권력자인 천주교, 일루미나티와 예수회를 걱정하며 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가 그의 핏값의 공로로 죄의 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우리는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우리에게 미리 알리신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으로 환난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소문과 일루미나티의 비밀작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움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사탄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입니다. 사탄과 그 사탄의 종들이 이 세상에서는 지위도 높고, 돈도 많겠지만 그들앞에서 담대하십시요. 그들은 우리에 비하면 벌레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빌 게이츠의 면상을 발받침대로 쓰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읍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오고 또 내가 그들을 치유하며 그들에게 화평과 진리의 풍성함을 나타내리라. 6)
Behold, I will bring it health and cure, and I will cure them, and will reveal unto them the abundance of peace and truth. 6)
health and cure가 언급된 것으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중에 건강을 잃고 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필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아시고 그의 뜻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peace라는 화평은 사람간의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간의 화평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각자의 관계의 정도입니다.
사람과 하나님간의 화해가 곧 화평이며, 우리의 죄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또 내가 유다의 사로잡힌 자들과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 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우겠으며, 7)
And I will cause the captivity of Judah and the captivity of Israel to return, and will build them, as at the first. 7)
위 말씀으로도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다수가 왕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상류층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그들의 땅에 그들의 지위도 회복시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이 일제에 침략당하고 조선인들의 지위가 회복되지 않은 것과 비교됩니다. 일제 침략기간은 36년으로 바빌론의 침략기간인 70년의 반정도뿐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일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외세에 의한 부분적인 회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남아서 한국의 부유층을 형성하는 비극적인 역사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징계였고, 또한 그 회복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완전한 회복이므로 70년이 지나서 처음과 같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통 또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마지막 심판에 가까워 완전한 회복은 그 심판으로 미뤄져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시드키야왕의 불순종은 바로 징계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드키야보다 더 악한 자들이 아무런 징계없이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하나님의 관대하신 침묵은 마지막심판에 가깝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목격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태풍전의 고요함입니다.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지은 그들의 모든 죄악에서 깨끗게 하리니, 그들의 지은 죄악들, 곧 나를 대적하여 잘못한 그들의 모든 죄악들을 용서하리라. 8)
And I will cleanse them from all their iniquity, whereby they have sinned against me; and I will pardon all their iniquites, whereby they have sinned, and whereby they have transgressed against me. 8)
더하여 말씀하신 내용은 곧 이스라엘의 패배의 이유와 그 회복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빌론의 침공과 이스라엘의 패배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의 과정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개인안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일어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과정이 곧 우리의 과정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신의 접종은 결국 건강문제이고, 건강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백신에 속고, 백신으로 아프고 그래도 운좋게 회복되는 것도 같은 과정이라고 보여집니다. 백신으로는 파국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독극물 백신을 맞고도 회복될 것입니다. 왜냐면 진정한 파국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짐승의 표입니다.
바빌론의 이스라엘 침공이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사명으로 쓰시기 위하여 단련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백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 과정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의 비극은 여러번의 기회를 모두 자신의 생각으로 물리친 결과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적용이 되고 이 글을 읽는 분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제가 성경진도모임을 멈추는 것이 제 자신의 생각으로 순종을 물리치는 것일 수 있고, 이미 합당하게 공지된 모임의 취지를 가볍게 여기는 분들도 순종을 물리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진도모임의 취지에 반대하지는 않는 분이라면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권유는 할 수 있지만 제한할 수는 없고, 저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제 신앙을 제한 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진도모임은 계속 유지하고,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모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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