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4월18일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8,1ㄴ-8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5-40
◈ [서울] 영생선물 준 세상벗 영생벗
2018년 나해 4월18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
누가나 닥칠 사건중의 사건은 죽음이며 이를 준비하는 것이 믿음이죠.
이 믿음을 제대로 받은 신자들은 이 세상살이 제 길로 들어선 겁니다.
제 길로 못 든 채 계속 죽어가는 사람들 보며 가만있으면 잘못입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이웃사랑 계명에 크게 위배 된답니다.
모두 죽을 운명과 안 죽을 인간주체였던 영혼의 영생문제 긴박합니다.
당장 1명이라도 선교하여 영생선물 준 세상벗 영생벗 만들어요. 암요!
재교육 받고 선교해야 되는데 가만있으면 그 잘못 내 생애 실수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 긴박성 때문에 시대에 맞게 인터넷교리를 만든 겁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4월18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요한 6,35-40
피정을 잘 다녀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행복은 먼가를 채우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잠시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타볼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곤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보혁명이라고 합니다. 2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한 대량생산과 기계의 등장이라고 합니다. 1차
산업혁명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먹거리의 생산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로봇의 등장이라고 합니다. 로봇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로봇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자리를 대신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꽃을 피우면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
공동체의 삶, 창조적인 능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공감능력,
공동체의 삶, 창조적인 능력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인터넷의 정보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까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보고 있는 스마트 폰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공기는 너무 가까이에 있고, 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소중함을
모르듯이, 물은 아주 저렴하게 마실 수 있기에 소중함을 모르듯이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숨은 진주를 모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성당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성경입니다. 성당과 성경은 우리에게
공감능력을 줄 수 있고, 공동체의 삶을 보여줄 수 있고, 창조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고맙고, 소중한 성당과
성경을 멀리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면,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성당으로 보낸다면,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한다면,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우리의 것들을 나눌 수 있다면 4차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와도,
10차 산업혁명이 다가온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바른 길을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는 중에도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도 그렇습니다.
박해가 심했을 때, 오히려 신앙은 더욱 뜨거웠고, 복음은 더 많은
곳으로 전해졌습니다. 교회의 재정도 여유가 있고, 새로운 성당도
많이 신축되었고, 사제의 숫자가 더 늘어나지만 요즘 교회는 예전처럼
뜨거운 활력이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였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너무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하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결국 강물에 몸을 담갔으며 나병은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세상의 것들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자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성사생활을 통해서 건강한 신앙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가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러나 아무나 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표징을 받아들이면 또 다른 표징이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18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5-40
표징을 받아들이면 또 다른 표징이 된다.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오말순 할머니는 결혼 직후 남편과 사별하고
남겨진 아들 하나 잘 키워보려고 억척스럽게만 살아온 분입니다.
물론 아들은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며느리에게는 누구보다 견디기
힘든 시어머니였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병이 심해져,
가족은 결국 어머니를 시설에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오말순 할머니는
몰래 가족들이 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평생을 희생해 온 대가가
이것인가?’라는 먹먹함으로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느 신비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고 나서는 50년이
젊어지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노래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흐른 곳은 이내 이전 나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피를 흘리면 젊음을 다시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말순 할머니의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당장 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또 할머니 외에는 누구도 그 피와 맞는 타입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며 꿈을 펼쳐볼 단 한 시간도
가지지 못했던 할머니. 그리고 이제는 인생을 즐겨볼 평생 오지 않을
유일한 찬스. 그러나 할머니는 손자에게 피를 주고 다시 70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손자의 생명은 거기서 끝나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자신만을 위해 고생하신 것을 아는 아들은 어머니가
인생을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시라고 권하지만, 오말순 할머니는 손자의
죽음을 보며 혼자만 행복할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새로운 삶을 포기하고 다시 손자를 위해 자신의 피를
수혈해 줍니다. “이것이 내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길이여...”
얼마 있으면 어버이날입니다. 저의 아버지-어머니는 배운 것도
없으시고 가진 것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아버지-어머니께서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느라고 그렇게 가난해
지셨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 힘이 없고, 학교에도 다니시지 못하고, 그래서 비록 교양
있고 돈도 많은 부모님은 아니시지만 나를 살리시기 위해 그분들이
그렇게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리셨다는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인간이 되어
죽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죄 속에서 죽어갈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그것을 보며 편히 사시는 것보다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더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사랑의 불이 있으면 자신이 소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생명의 빵’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빵은 ‘표징’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계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를 흘리심으로써 ‘성체성사’를 세우셨기에
성체성사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피에 당신의 생명이 들어있듯이, 그리스도의 성체 안에
당신 생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가난한 나라, 수단에 가셔서 그들의 위해 너무나
엄청난 수고를 다 하셨기에 그분의 몸이 그렇게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그런 죽음이 그분을 만났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사랑의 표징이고, 성체가 그리스도 사랑의
표징인 것처럼, 우리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사랑으로 피를 흘릴 수
있다면 우리도 ‘사랑의 표징’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사랑을 믿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란 말로써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하느님의 선물, 즉 사랑의 표징이 되어 그 사랑을 보고 믿는 이마다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보며 그분의 사랑을 믿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사랑의 작은 표징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인간의 끝과 하나님의 시작: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4월18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인간의 끝과 하나님의 시작
오늘은 “인간의 끝과 하나님의 시작”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은 언제나 인간의 절망에서부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애굽의 바로
군대는 뒤에서 죽이자고 달려듭니다. 눈앞에는 살기등등한 거센
파도가 달려드는 홍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좌절과 절망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그 절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모든 사람도 절망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절망을
부활의 능력으로 깨뜨리십니다. 그러므로 막장 인생길에서 우리
삶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만 의지하면 바로 그 끝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수원] 내가 생명의 빵이다.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4월18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복음: 요한 6,35-40: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다.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본래 죽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이 빵을 먹는 이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이 빵은 신자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살아 계신 빵께서 우리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세상에
참 생명을 주셨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36절)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과
성경의 증언을 보고서도 그분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라고도 하셨다. 그들은
성경도 보았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데는 너무 무뎠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37절)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37절)이라고 하신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38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당신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고 그 권능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하며 당신을 닮도록 초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바치신 분이시다.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39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 구원이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 이제는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응답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이
같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고 하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고 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우리들이 행복하다고 예언처럼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셨다. 사도들은 정확하게 증언해야 했기에
보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상이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완성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께로
인도하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다시 살리시며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죽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시는
일이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믿음, 곧 생명으로 넘어감이 첫 번째 부활이며,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음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고, 마지막 날에 참으로 부활하는,. 구원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