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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묵상글 ( 연중 제4주일. - 행복을 찾아 산 위로 오르겠는가? - 성경과 함께 춤추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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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5:40 추가>
2026.02.01 05:37
- 행복을 찾아 산 위로 오르겠는가?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지난주일 복음은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허약한 이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본다면 이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행복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데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신 것과 거기에 자리 잡고 가르치신 점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평지에서 첫 제자들도 부르시고,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신 다음
굳이 산 위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행복에 관한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행복에 관한 비결을 그냥 평지에서 계속 가르치시지 않고
주님께선 왜 굳이 산에 올라가시어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만 가르쳐주실까?
또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이란 누구인가?
주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첫 제자 넷인가?
아니면 그들 말고도 군중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명백하게 풀어 줄 단서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군중들을 보시고 산 위로 오르셨다는 점이고,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 행복 비결을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군중 모두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도 궁금해하겠지만
그 행복 비결을 알려면 산 위로 올라오라고 초대한 사람 가운데서
산 위에 올라 온 사람들 곧 행복 비결을 꼭 알려는 열성이 있는
사람들만 주님께서 제자로 여기시고 가르쳐주신 것일 겁니다.
실로 행복은 누구나 원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끝까지 탐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예수님께 그 답을 얻으려는 사람은 더 많지 않습니다.
그저 돈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고 돈 열심히 벌며 일생을 살고,
재물과 지위와 명예를 누리며 희희낙락하면 그것이 행복인 줄로
알고 일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군중과 달리 주님의 진실한 제자들이라면
산에 오를 정도까지 참 행복에 관한 갈증과 갈망이 있어야 하고
다른 이의 행복 비결이 아니라 주님의 행복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란 주님께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신 행복은 역설적입니다.
가난해야 행복하고 특히 영으로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사실 부유할 때는 누구나 행복할 수 있고 그런 행복은 누구나 찾습니다.
그런데 부유할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해도 하느님 나라 때문에 행복한 영적인 행복은 제자들만 찾습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살 때뿐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행복하고,
죽고 난 뒤에 더 행복하기에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참 행복 비결이고,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행복 비결을 따르겠습니까?
이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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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과 함께 춤추기 - 네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이 어떻게 야곱처럼 하느님과 씨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성경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요?
성경과 함께 춤추기
2026년 1월 31일 토요일
성서학자 크리스토퍼 호클로투베(Christopher Hoklotubbe)와 다니엘 자카리아스(Daniel Zcharias)는 성경을 읽는 토착적 방식이 ‘원(圓)’ 혹은 ‘춤’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 안에는 위로가 되는 말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도 함께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됩니다. 오글랄라 라코타(Oglala Lakota) 족의 원로 블랙 엘크(Black Elk)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인디언이 하는 모든 일이 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고리에서 흘러나오는 힘입니다.” : [1]
우리가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곧 성경과 맺는 관계를 형성하고 빚어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갈색 피부를 지닌 토착민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땅에서 살아가셨던 분으로 인식합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이야기와 창조주께서 주신 계시, 그리고 히브리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 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세계적이고 다민족적인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맏형이십니다(마르 3,34–35; 로마 8,15–17; 갈라 4,4–7). 이제 우리는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친족이 되었기에, 그분의 조상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우리의 이야기와 역사 안에 함께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곧,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갈라 3,7).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기존 이야기와 역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원' 안에서 함께 어우러집니다. 성경의 말씀은 이제 우리의 양부모와 조상들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 토착 문화 전통을 폄하하거나 대체하려는 태도는 식민적 형태의 그리스도교이며, 이는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이 경험해 온 아픔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원주민 신앙인들은 성경과의 관계에 무지하거나 현실을 외면한 채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 안에 담긴 때로는 거친 현실과도 마주하며, 말씀과 씨름하고 비판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야곱, 곧 이스라엘은 베텔에서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였습니다(창세 32,22–31). 그는 그 만남을 통해 축복을 받았지만 동시에 절뚝거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은 신앙 공동체에게 현대의 베텔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그 만남을 통해 축복을 받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간직합니다. 곧, “하느님의 숨결이 깃든” 성경(2티모 3,16)이 거룩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References
[1] Raymond J. DeMallie, The Sixth Grandfather: Black Elk’s Teachings Given to John G. Neihardt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4), 290.
T. Christopher Hoklotubbe and H. Daniel Zacharias, Reading the Bible on Turtle Island: An Invitation to North American Indigenous Interpretation (IVP Academic, 2025), 8–1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réj Richárd,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경과 우리의 관계는 때로는 분명하고, 때로는 신비로우며, 그럼에도 언제나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과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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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소유냐 존재냐?" -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06:10. 추가>
산상설교는 복음의 심장부이며, 그 가운데 진복팔복단(眞福八端, Beatitudes)은 산상설교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응축된 모습, 곧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성 예로니모(4세기)는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팔복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얼굴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첫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십계명 하나하나가 무엇을 금하고 무엇을 명하는지, 또 그에 따른 세부 규정까지 외워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진복팔단에 대해서는 배운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진복팔단이 지니고 있는 내용 자체가 아직 어릴 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법으로 정리된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영의 깊은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어른 가톨릭 교리서에서는 진복팔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의 삶」, 제1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에서 다루어지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적 지침으로 제시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그 중요성이 자주 강조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법은 명확하지만 진복팔단은 미묘하고 모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도둑질 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그저 글자 그래도 이해하면 되지만, "영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깊은 성찰과 식별이 요구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준수보다 내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규범화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아마도 복음서의 핵심인 이 부분을 우리는 깊이 성찰하기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십계명은 구약에서 주어진 기본적인 행위 규범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진복팔단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에 새롭게 등장한 현실입니다.
"영(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이는 당시 문화와 완전히 역행하는 말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앞서 나가고, 성공하고, 부유해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겉모습이 실재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사실 이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인간 자아의 본성입니다. 구약조차도 성공과 부, 승리를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을 배제한 채 스스로 그것을 추구할 뿐입니다. 단지 더 조직적으로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 특히 팔복은 훨씬 더 미묘하고 깊은 이해를 제시합니다. 복음은 인생의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측면을 고려합니다. 부와 성공이 오히려 사람을 파괴할 수 있으며, 우리의 강점 때문에 오히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는 매매에 능했지만 결국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반대로 패배와 실패가 깊은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패배하셨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첫 번째 것은 나머지 모든 복을 담고 있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진복팔단에 대해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영의 가난은 사랑보다 더 근본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묘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영의 가난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고(거짓 자아)는 사랑을 알지만, 그것은 자기애와 자기 확장의 사랑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의 사랑은 에고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면밀히 성찰해 보면 진복팔단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자체를 드러냅니다. 달리 말리 진복팔단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얼굴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 영의 가난하심: 자신을 비우심(필립 2장).
- 애통하심: 예루살렘을 위해 우시고, 나자로의 무덤에서 눈물 흘리심.
- 온유하심: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심.
- 자비로우심: 원수를 용서하심.
- 마음이 깨끗하심: 아버지께 온전히 헌신하심.
- 평화를 이루심: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심.
- 박해받으심: 부당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심.
따라서 진복팔단은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진복팔단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며 거짓으로 온갖 악을 꾸며 말할 때에도 우리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학자 브렌던 번(Brendan Byrne)은 마태오 복음의 "행복 선언(팔복)"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결국 ‘탐욕 없이, 공감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모아진다고 지적합니다.
1976년, 정신분석가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 자체가 재물과 소유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드러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성공을 재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로 성공을 평가합니다.
프롬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존재의 본질마저 소유에 두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곧,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는 두 편의 시를 인용하여 삶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두 시 모두 꽃을 만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은 길을 걷다 꽃을 보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벽 틈에 핀 꽃이여, / 나는 너를 뽑아 올려 / 뿌리째 손에 쥐었네." 그는 꽃을 소유하려고 뽑아버립니다. 그러나 뿌리째 뽑힌 꽃은 곧 죽고 말지요.
17세기 일본 시인 바쇼는 울타리 곁에 핀 나즈나를 보고 이렇게 읊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 울타리 곁에 나즈나 꽃이 / 피어 있네. 아!" 그는 꽃을 만지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며 순간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변모됩니다.
진복팔단은 제자의 내적 태도와 타인과의 관계에 초점을 둡니다. 중요한 점은, 진복팔단이 말하는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 제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영이 가난한 이들"이라는 표현에서 '가난하다'는 그리스어는 πτωχοί(ptōchoi)인데, 이는 "엎드리다, 움츠리다"라는 뜻의 동사 πτώσσω(ptóssō)에서 나왔습니다. 곧, 구걸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따라서 πτωχοί는 극도로 가난하여 거의 완전히 타인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영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의 존재를 홀론(holon = whole+alone)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하느님이라는 전체에 속해 있는 한 부분으로서 전체 자체를 이룰 뿐 아니라, 다른 홀론들과 연결됨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살아가는 진정한 [부분적 전체]요, [전체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바로 리처도 로어 신부가 말하는 "Everything Belongs!"(모든 것이 각기 고유한 제 자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전체인 하느님과 서로에게 속해 있음)를 실현해 가는 사람이고, 이미 지금, 여기에서 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삶과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실현해 가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지위나 상태에 있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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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스바니아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예고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스바 3,1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주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으니”(1코린 1,30 참조) 우리의 행복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 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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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신축하고 10년가량 되었습니다.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데, 야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깔아 놓은 나무 조각들이 비에 쓸려서 없어지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식되었습니다. 사목회에서 두 가지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하나는 예전처럼 나무 조각을 새로 깔아 놓은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잘 다진 후 인조 잔디를 설치하는 방법입니다. 미관상 인조 잔디가 좋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이라서 먼저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작년에도 창고 공사가 있었는데 형제님들이 함께해서 아름답고 멋진 창고가 탄생했습니다. 이번에도 아이들을 위해 안전한 놀이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매주 토요일 작업을 하기로 했고, 여성 분과에서는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업자에게 맡기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교우들의 힘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시티에 먼저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을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점심 준비하는 자매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재작년에 있었던 ‘창고 공사’가 생각났습니다. 2월부터 시작했던 공사가 6월에 끝났습니다. 업자에게 맡겼으면 1달이면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형제님들이 재능 기부를 하였고, 자매님들은 점심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4달이 지나면서 저는 형제님들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웬만한 작업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형제님들이 지금의 사목회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고이는 주차장에 새롭게 배수로를 설치하였습니다. 죽은 나무를 뽑고 새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80개가 넘는 에어컨 필터를 교체했습니다. 농구장 바닥을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걷기대회에는 안전요원으로 함께 했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뒷정리했습니다. 달라스 지역 연합 교회 축구대회에는 맛있는 국밥을 준비했습니다. 다른 교회는 컵라면을 먹을 때 우리는 국밥을 먹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교우들이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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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행복은 결핍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한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이제 슬슬 무대 뒤로 물러설 나이가 되어가니, 사목자나 수도자로서 절정기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밤잠 못 이루고 괴로워하며 너무 힘들다고 투정하는 후배들에게 저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이 호시절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힘겹다 할지라도 살레시안으로서 아이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세월 지나면 이 순간이 정말 그리워질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고통도 컸지만,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꿈결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행복 불행이라는 것이 마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사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감사했지만 부담스러운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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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어제 절친인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제일 먼저 전화를 줬습니다. 친구는 20년째 집사람을 간병해왔습니다. 친구는 결혼 후 1년 지나서 아내가 처음에 뇌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서울에 가 진단을 받았는데 몸에 신경이 잘 전달되지 않는 특이한 병이었습니다. 진단을 받고 친구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사람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만 온통 신경을 쏟아부었습니다. 1년을 정말 죽을 각오로 명의라고 소문난 명의는 다 수소문해서 치료를 받아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치료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의학적으로는 기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기를 했다고 하면 그렇지만 거의 희망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근데 친구는 힘들긴 해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친구 아내는 대학 커플이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된 후에 모든 친구를 다 끊고 저와만 연락을 하며 지내왔던 것입니다. 저는 친구이지만 다른 건 모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만 친구를 존경합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며칠 전에 올린 글 어떤 자매님의 이상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그 내용의 생각을 가진 게 어쩌면 이 친구를 20년 동안 지켜보면서 무의식 속에 저도 모르게 가지게 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술을 잘 못하지만 아주 간혹 한 번씩 이 친구에게 술친구가 돼 줍니다. 아내가 사고로 그렇게 된 이후에는 어떤 사람과도 만날 그런 처지가 안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술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 친구를 만나면서 어쩜 친구를 통해서 인간을 배운 것도 있습니다. 같은 나이의 친구인데 왜 존경한다고 했을까요? 단순히 아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통채로 버렸다고 해서 존경하는 게 아닙니다. 친구가 가진 정신 마인드가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친구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습니다.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기적이 일어나면 아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은 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늘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 말을 친구는 항상 머리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일 전에 잠을 자는데 꿈을 꿨다고 합니다. 꿈에서 누군가 자꾸 자기를 깨우더랍니다. 그 꿈에 그만 일어나게 됐던 것입니다. 마침 일어난김에 물을 먹으려고 거실로 나가서 물을 먹고 들어오는데 집사람 손을 보고 엄청 놀랐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배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은 신경상 어떤 문제 때문에 배 위에 올라갈 수도 없고 또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뭔가를 잘못 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에서 일어나 봤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게 왠 일입니까?
친구가 아내 가까이 가 봤는데 손이 배 위에 있고 또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봤다는 겁니다. 너무 놀라 다음날 서울 병원으로 갔는데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이럴 수 없는데 기적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하반신 신경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이면 재활을 잘 할 경우 장담은 할 수 없는데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친구는 그날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런 후에 장모님께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고 장모님이 바로 비행기로 서울로 왔다고 했습니다. 평소 장모님은 딸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차마 눈을 감고 죽을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늘 말했는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니 장모님도 역시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 딸을 살린 건 제 친구라면서 처음으로 장모님이 친구를 안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친구는 어떻게 장모님 이걸 은혜라고 하니 당치도 않습니다라고 하며 같이 부둥켜안고 병원이 눈물바다로 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신앙은 없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언젠가부터 친구에게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가끔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 친구야, 너는 다음에 죽으면 하늘나라 천국에 갈 거라고 확신을 한다 "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저는 친구에게 위로를 이렇게 항상 해줬습니다. 만약 너가 하늘나라 가지 않는다면 내가 만약 하늘나라 갈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약 가게 돼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면 너를 위해 하느님께 탄원해 줄 걸 약속하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설득시킨다는 건 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느님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하느님을 믿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실제로 목숨을 바치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친구의 삶은 삶 자체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보다 더 위대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비록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평생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희생을 잘 하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보다야 더 낫지 않겠는지요 하고 제가 탄원을 한다면 과연 하느님은 어떤 판단을 하실 것 같으신지요. 저는 하느님께서 제 탄원을 들어주실 분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가 믿는 하느님은 분명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자신의 아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다 누군가를 위해 헌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 정도인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보다는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보다 더 해야 한다는 건 바로 ' 숭고한 사랑 '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친구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아내를 위해 희생을 했을 때 나중에 어떤 신이 자신에게 뭔가 보상을 해 줄 것이라는 그런 기대심리 같은 것조차도 없는 그저 단순히 자신의 와이프만 바라보며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그런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할 때 그때의 사랑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일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조건도 보상도 생각하지 않은 진정으로 순수 사랑이었기 때문에 더 위대할 거라고 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런 사랑을 하는데 우리는 이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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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5,1-12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정작 행복이 무엇이며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못할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지요. 그러다보니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처럼, 늘 행복을 쫓기만 할 뿐 정작 그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행복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 ‘만족’을 느끼는 정도는 내가 ‘욕망’하는 정도에 비해 얼마큼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니,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소유를 늘리거나 아니면 욕망을 줄이거나.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를 늘리려고만 합니다. 문제는 소유가 늘어나는 만큼 욕망도 커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커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려 드는 악순환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줄이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살을 빼겠다고 무턱대고 먹는 양을 줄이면 더 강해진 식욕에 사로잡혀 ‘요요’가 오고 말지요. 그러나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 운동을 꾸준히 실천하여 내 삶의 일부로 만들면,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욕망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턱대고 욕망 자체를 줄이겠다고 덤빌 게 아니라,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먼저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런 존재로 변화되어야겠지요.
주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그렇게 변화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신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의미’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재물이 아님을 알기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임을 알기에, 그분 뜻을 생각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그분과 완전히 일치되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맘껏 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신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슬픔을 느낍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자녀로 받아주셨는데, 그분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며 그분 뜻을 따르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서 애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마저 기꺼이 끌어안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오히려 마음에 큰 위로를 받게 되기에, 주님은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행복을 누려본 이들은 자연스레 마음이 온유해집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처지, 상황, 여건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거센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이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자 어느 새 목적지에 닿았던 것처럼,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시고 살면 거센 풍랑에 흔들리며 고생할지라도,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어 괴로울지라도, 결국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상속재산으로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신 겁니다. 한편,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어 그분의 나라를 상속재산으로 차지한 이들은 의로움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 없이 올바른 상태를 일컫는 게 아니지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희망하고 바라야 할 참된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영원토록 변치 않는 천상의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마음이 흡족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신 겁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마음이 자비롭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큰 자비를 입었음을, 부족하고 약한 자신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복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깨달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일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 때문에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던 ‘무자비한 종’의 전철을 밟지 않습니다. 이웃의 딱한 처지를 가엾이 여기고, 그가 겪는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에게 자비와 선을 실천합니다. 그렇게 실천한 자비와 선은 부메랑처럼 그에게 돌아가기에, 하느님께서 그가 실천한 자비에 덤을 얹어 더 큰 복으로 돌려주시기에, 주님은 ‘자비로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또한 마음이 깨끗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않기에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모든 것을 ‘돈’이라는 왜곡된 기준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기에, 그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게 되지요. 우리가 ‘지복직관’이라고 부르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삶과 사람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자신이 그분 자비 덕분에 산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그분께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 노력은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더라도, 손해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은 ‘예’하며 따르고, 그분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오’하며 배격하는 것이지요. 그저 순간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눈 앞에 닥친 어려움을 모면하고자 진실 앞에서 눈을 감는 세상 사람들은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당장은 많은 것을 잃는 것처럼 보여도, ‘구원’이라는 가장 크고 귀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또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여덟가지 참 행복’에 대해 가르치신 것은 세상이 제안하는 것과는 다른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을 충족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또 다른 ‘멍에’를 씌우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들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됨을,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하늘나라의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음을 알려주시고 독려하시려는 겁니다. “행복하여라”라는 선언은 하느님의 명령이자 축복입니다. 지금 가난해도, 지금 슬프고 괴로워도, 지금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당신 자녀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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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연중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06:32. 추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이 말씀에서 ‘박해’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의 이야기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은)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5,40-42).”
여기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입니다.
사도들은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일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도로 인정받은 것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음을 기뻐했습니다.
매를 맞고, 모욕당하는 것이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으면,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2) ‘가난’에 관한 말씀은, 초대교외 공동체의 모습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도 없었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그 공동체에서는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랑만 가득한 공동체의 모습 자체가 복음 선포였고, 신앙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하늘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중에, 즉 죽은 다음에 얻게 되는 행복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늘나라를 지상에서 미리 실현할 수 있습니다.
모두 마음을 모아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3) ‘슬픔’과 ‘온유’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과 ‘평화’에 관한 말씀은, 스테파노 순교 후의 상황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4).”
여기서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라는 말에 대해서, “스테파노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고 믿었다면 기뻐하는 것이 옳은데, 왜 통곡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스테파노의 죽음을 슬퍼했겠지만,
그것보다는 교회를 박해하는 이 세상의 죄가 안타까워서, 또 박해자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루카 23,28).
스테파노가 살해당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사도들과 신자들은 그 박해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맞서지 않았고, 또 사울에게 앙갚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를 실천한 것입니다.
흩어진 신자들이 숨어 있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모습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모습이고, 또 ‘주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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