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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태주(에릭+문정혁)는 회의실 앞에서 멈춰 선다. 회의실 입구를 지나면, 그는 월드 백화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회의실 입구에 걸린 세 점의 풍경화 앞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그는 월드 백화점 바깥으로 나온다. 인공 조명으로 하루 종일 은은한 빛이 비추는 월드 백화점이 아니라 눈부신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실내에서 야외로, 인공조명에서 눈부시는 햇볕으로, 월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에서 낙원상가 주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로. 마지막 2회 동안 <케세라세라>는 태주가 월드 백화점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대낮의 햇볕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고, 태주가 낙원상가 주변의 밥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태주와 은수(정유미)와 혜린(윤지혜)과 준혁(이규한)은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들이 보는 바깥이란 풍경화 속에 존재하거나, 이동 중인 차 창의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케세라세라>에서 카메라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훑어내는 공간들은 네사람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여기 있어야 너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너가 원하는 사람을 이 공간에 머무르게 해야 그 사람은 너의 것이 될 수 있어. 태주와 은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첫 키스를 하고, 낙원상가의 거리에서 데이트를 하며, 월드 백화점에 들어가면서 헤어진다. 반면 혜린과 준혁은 태주와 은수를 월드 백화점에, 그리고 그들의 집에 묶어두면서 잠시나마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Many's the time I ran with you down, The rainy roads of our old town
<케세라세라>에서 그들이 사는 공간은 곧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것은 곧 그들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월드 백화점 차회장(송재호) 부부의 딸인 혜린은 월드 백화점과 대저택의 주인이고, 빌딩 공사장에서 아버지를 잃은 준혁은 차회장 부부에 의해 그들의 공간 안에서 길러지지만, 그 곳의 주인은 아니다. 낙원 상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부모 없이 사는 태주는 부모가 남긴 빚도 없지만 부모가 물려준 것도 없고, 군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그 아파트조차 얹혀 사는 신세인 은수는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을 부양하기까지 해야 하는 처지다.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기 전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했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혜린이 태주의 아파트에서 살 수 없고, 태주가 자신이 먼저 월드 백화점의 경영권을 노리고 혜린에게 접근할 수는 없다. 부모들은 이미 백화점과 아파트 속에 자신들이 살아야 할 곳을 정해 놓았고, 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공간이 가르쳐주는 논리를 배운다. 혜린은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라는 친 부모의 가르침을, 준혁은 넌 많은 걸 가질 수 있지만 절대로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양부모의 가르침을, 은수는 부모에게 내버려진 채 사는 것 자체가 힌든 현실을. 그리고 태주에게는, 늘 부유한 여자들과 데이트를 하지만 그들과 결혼할 수 없고, 매일 밤 상류층의 클럽에 갈 수 있지만 그녀들의 스포츠 카 대신 택시를 타고 낙원 상가로 돌아오는 태주에게는, 넌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뼈저린 현실을.
그래서, 그들은 누구도 솔직할 수도, 타인을 믿을 수도 없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죽음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는 차회장에게 준혁은 “제가 서운하고 화가 나는 건 아버님은 제가 아버님에게 가진 신뢰만큼 저를 믿지 않으셨다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차회장의 대답. “그게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걸 모르겠냐?” 그러나, 준혁은, 차회장에게서 자란 준혁은 그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한다. 준혁은 혜린의 진심이 담긴 고백대신 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선택하고, 혜린은 준혁에게 계속 진심으로 부딪치는 대신 태주를 끌어들여 준혁을 흔들리게 만들며, 다시 태주를 사랑하게 되자 절절한 고백대신 아버지를 통한 돈과 힘을 약속한다. 그리고 태주는 돈을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은수대신 처음으로 아이 쇼핑만 하는 대신 내 것이 될 수 있는 부유층의 소유물을 선택한다. 그래도 은수는 자신의 감정에 최대한 솔직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진심을 다하는 대신 사랑하지 않는 준혁을 선택하면서 마음과 몸이 따로 놀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상대방 때문이라 자책하면서, 그리고 진심이 통할 거라 믿지 않으면서 점점 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진심을 고백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수록 서로에 대한 의심은 커지고, 그들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본다. 가질 수 없지만 가지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남는 건 결국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의심하고 불안해 하거나,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욕심이 남는 것.
Many the lives we lived in each day and buried altogether
그래서, 케세라세라. 이래도 가질 수 없고, 저래도 가질 수 없다면 남는 건 케세라세라, 그들은 자기도 모를 자기 마음 속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스스로를 끝없이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간다. 애초에 사랑의 힘으로 부모님만 설득했으면 됐을 준혁과 혜린이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태주와 은수를 끌어들이고, 힘들어도 열심히 사랑하면 그만이었을 태주와 은수도 서로에게 진심을 고백하지 못하면서 결국 은수가 준혁과 결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순간들은 그들의 공간과 부모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 자연광이 반짝거리는 야외에서다. 은수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한강 선착장, 태주와 은수가 함께할 것을 약속하던 해변, 태주가 혜린에게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겨주던 야외 농구코트. 부모가 만들어놓은 공간은 그들에게 사람의 진심을 믿지 말고 네가 살고 있는 공간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수의 말대로 배추가 썩어 문드러지기 전까지 소금기가 빠지지 않듯, 사람의 사랑은 공간의 논리를 벗어난다. 그들이 불행해지는 건 그 사랑을 믿지 못한 채, 자신이 아무 것도 없는 야외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만 살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케세라세라>가 태주의 이야기로 시작해 태주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은 그가 네 사람중 가장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케세라세라>에서 그는 가장 쿨한척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타인의 진심을 믿지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도 못하는 네 사람은 언제나 쿨한척 하려 노력한다. 태주가 은수와 헤어진 뒤 은수를 ‘한은수씨’라고 부르며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만나듯, 준혁이 은수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진 것을 직접 털어놓지 못하고 일을 빌미로 은수를 몰아붙이듯, 그들은 겉으로 최대한 냉정한 척 한다. 그건 그들이 그들의 공간이 그들에게 가르쳐 준 생존법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 말아라, 그래서 태주는 네 사람중 가장 쿨한척 할 수 밖에 없다. 혜린은 다 가졌고, 준혁은 은수 정도는 자신이 거둘 수 있을 정도로 가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은수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솔직하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직장도 있고, 집도 있고, 머리도 꽤 똑똑하며 얼굴까지 잘 생긴 태주는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줄 수도, 누구의 마음도 쉽게 받을 수 없다. 세상은 그에게 그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부유한 집 자식들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지만, 동시에 “넌 이걸 절대로 가질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 때 태주가 할 수 있는 건 몇 천만원짜리 시계는 이별 선물로 받아도 스포츠 카는 받지 않는 쿨한 척, 상류층 여자들과 놀기는 해도 그들의 것이 자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쿨한 척, 혜린같은 여자 앞에서도 고개 뻣뻣이 들고 말 끝마다 대들 수 있는 쿨한 척.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면 지켜야할 것은 그들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그들에게 관심없다고 말할 수 있는 쿨한 척 뿐이다.
Don't laugh at me, Don't look away, You'll follow me
쿨한 척 하면서 부유한 자들의 감언이설도 믿지 않고, 진심어린 사랑도 믿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이라면 멋진 척 하기라도 해야 한다. 혜린이 태주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척’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태주는 모든 걸 다 경험하면서 단 한가지를 경험하지 못했다.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그 여자가 시계를 주는 대신 자기 손을 꼭 잡고 낙원상가 주변의 길거리를 걷는 것을. 한강 선착장에서 데이트를 하고 싶다며 애교를 부리는 것. 태주가 재회한 은수에게 그 때는 처음이라 당황했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진심이며 진실이다. 그는 수많은 여자들과 쿨한 연애는 해봤지만 단 한 번도 자기 가슴에 썩어 문드러질 때 까지 남을 사랑은 해보지 못했다.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사랑은 없다고 믿었던 남자에게 찾아온 사랑. 그러나 사랑을 처음 겪은 남자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 사랑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태주가 낙원상가 주변의 아파트에서 월드 백화점과 혜린의 집에 갔다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공간이, 부모가, 세상이 정해진 룰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던 아이가 자신이 직접 다른 공간을, 진짜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한 것과 같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지만 그것을 가지면 진실한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 넌 그걸 영원히 포기하며 살 수 있니. 이미 너의 몸 속에 남아있는 은수를, 버스 정류장에서 너를 돌아보며 웃던 은수를 잊을 수 있니. 그들이 사는 집 때문에 사랑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모이지 아직 젊은 그들이 아니다. 그건 준혁과 태주를 모두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자기 자신으로 부딪치는 대신 자신의 부모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그들을 붙잡으려 했던 모순을 저지른 혜린이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외로움을 실토하는 준혁도 마찬가지다. 머리만 컸지 마음은 아이같은 청년들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한 사랑을 하면서 겪는 수많은 시행착오들. 그 하찮은 사랑이 쿨한 것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서 왔나. 그리고 에릭의 캐스팅은 그런 태주의 모습을 현실화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태주를 연기한 에릭은 굉장히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고, 그룹 신화의 스타다. 그래서 에릭은 재벌 2세 캐릭터가 딱인 듯 하지만, 오히려 재벌 2세는 MBC <불새>처럼 너무 힘이 들어 가거나, MBC <늑대>처럼 그저 거친 남자의 모습만 남아 복잡한 욕망의 소유자라기 보다는 그저 마초로만 보일 수도 있다. <케세라세라>는 에릭의 그런 특징을 재벌 2세로 보여주는 대신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려는 욕망을 가진 인물로 소화했다.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게 잘났고, 잘나서 누가 건드리든 제대로 맞받아치는 인물. 그건 에릭의 연기 데뷔작이었던 <나는 달린다>에서 껄렁거리면서도 강인한 느낌이 있는 청년의 캐릭터를 보다 효과적으로 응용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에릭이 자신의 인상만으로 자신의 감춰진 욕망을 표현할 수 있듯 얼굴만으로도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나머지 배우들의 캐스팅과 조화 역시 매우 훌륭하다.
With the sun in your eyes and on your own
Bedshaped and legs of stone
You'll knock on my door and up we'll go
In While light
I don't think so
But what do I know?
이는 MBC <케세라세라>가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의 완벽한 대척점에 설 수 있는 이유다. <케세라세라>는 설정만 보면 <발리에서 생긴 일>과 흡사한 부분들이 많다. 모든 캐릭터의 마음이 계속 변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만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발리에서 생긴 일>은 그 안에서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그렸다. 부와 사랑, 사랑하는 남자와 조건 좋은 남자 어느 쪽도 가질 수 없지만 모두 가지고 싶은 그들. 심지어는 사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그들. 그들은 가지기 위해 쉴 새 없이 부딪혔다. 반면 <케세라세라>는 욕망에 흔들리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아있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 점차 빈부격차가 커지고, 신데렐라가 동화속 이야기로만 머무르기 시작한 시점에서 아직 남은 신분상승의 가능성이나마 잡으려는 청춘의 욕망을 그렸다면, <케세라세라>는 이미 신분이 완전히 계급화 되는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축도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만 가져야 하고, 그래서 쿨한 것이 절대적인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 그러나, 그 쿨한 것 뒤에는 쿨에 갇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갇혀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황량한 현실이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쿨한척 하는 감각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너무 부족한 ‘순정’이 아니었을까.
<케세라세라>는 바로 그 지금 세대의 정서를 대본의 틈을 촘촘하게 메꾸는 연출로, 정확한 캐스팅이 된 캐릭터의 연기로 오히려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다. <케세라세라>는 허점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작품이다. 대체 혜린은 왜 갑자기 태주에게 키스를 하며 사랑을 느끼고, 준혁은 왜 갑자기 은수를 사랑하는가. 또 은수의 아이는 어떻게 됐는가. 설정들도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진부한가. 사각관계도, 친남매가 아닌 남녀의 사랑도, 신데렐라 스토리도 모두 있다. 태주가 은수를 강간하려는 장면은 그 부분만 놓고 보면 굉장히 불쾌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전개는 어찌나 더딘지 작품 후반에서야 준혁의 복수극이 겨우 실체를 드러내고, 네 사람의 본격적인 밀고 당기기 역시 작품 후반에서나 이뤄진다. 심지어 스토리상으로는 가장 큰 비밀인 준혁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비밀이 풀리는 순간마저도 충격이나 파국은 없다. 차회장은 덤덤하게 진실을 말하고, 준혁은 그 사실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케세라세라>는 아무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을 때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은수를 바라보던 태주가 돌아서며 음악이 흐를 때, 그들이 한강 선착장에서 손을 잡고 데이트 할 때 그룹 킨의 ‘Bedshaped'가 깔리며 한강 선착장의 풍경을 천천히 보여줄 때의 그 분위기. 태주가 혜린에게 운동화를 신겨줄 때 태주를 멋지게 묘사하는 대신 풀 샷으로 그들이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상같은 것들. 즉, <케세라세라>는 대본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카메라로 사람들에게 모든 정보를 주고, 그것을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자, 봐라, 월드 백화점의 이 거대하고 화려한 내부를. 휑한 은수의 집과 어디 눈둘데 없을 정도로 꽉 찬 혜린이의 집을. 이러니 태주가 미치지 않겠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유연하게 레스토랑 내부를 훑던 김윤철 감독의 카메라는 <케세라세라>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설정이 아닌 현실로 만든다. 카메라가 별다른 과장없이 그들이 함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그 공간 안에서 그들이 작은 말투 하나, 작은 손짓 하나에도 서로를 신경 쓰기 시작할 때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케세라세라>에서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적당히 비어있는 대본을 섬세하게 채워주는 연출이 만들어내는 어떤 순간들에 대한 몰입이다. 당신이 연애 때문에 행복했고, 연애 때문에 괴로웠다면, 그리고, 그 연애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다면 <케세라세라>의 네 남녀의 행동은 모두 받아들여질 수 있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 명암 대비가 이뤄지는 준혁의 굳은 얼굴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이 갈등에 시달리는 준혁의 현재를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의 표정은 그 자체만으로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
I know you think I'm holding you down
And I've fallen by the wayside now
And I don't understand the same things as you
But I do
그래서 <케세라세라>의 엔딩은 긍정될 수 있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향해 네 명의 남녀가 끊임없이 달려갔던 <발리에서 생긴 일>의 끝에는 파국뿐이지만, 처음으로 진심어린 사랑을 배워나가는 <케세라세라>의 네명의 끝에는 상처 끝에 얻는 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혜린을 포기하고 떠나는 태주의 말처럼, 그들의 삶에는 또다른 인생과 또다른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은 지금처럼 쿨한척 하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대신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든 현실이든 태주와 은수는 먼 길을 돌아, 엘리베이터에서 첫 키스를 하고, 엘리베이터 안과 밖에서 오열하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드라마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나의 욕망과 나의 고민과 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 시청자가 <케세라세라>의 전형적인 설정들 틈에서 가장 현실적인 진심이 나타나는 한 순간을 발견하는 순간, <케세라세라>는 시청자에게 마음껏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누군가는 은수가 살고 있는 휑한 방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혜린과 식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태주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케세라세라>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당신이 지금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고, 당신이 <케세라세라>를 보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걸었던 그 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면, 당신은 당신의 진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또다른 단계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케세라세라>는 스토리의 탄탄함을 포기하는 대신 국내 멜로 드라마들 중 가장 독특한 방법으로 캐릭터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그래서 <케세라세라>는 바로 지금 한국 드라마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그건 지금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멜로 드라마가 어떻게 다시 시청자와 조우하느냐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드라마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멜로 드라마는 과연 지금 현재의 시청자들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드라마는 기존의 문법으로 시청자를 설득시킬 것인가. 물론 <케세라세라>도 대중적인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김윤철 감독은 <내 이름은 김삼순>에 이어 또 한 번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에게, 보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이고, 그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마도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어쨌건 사랑을 원한다는 것 뿐이겠지. 그게 썩어 문드러질때까지 남는 것일지라도.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첫댓글 이분 글 잘쓰신다규... 지금 다 읽었다규.. 케세라세라 재밌었는데...근데 잠시 딴소리 저 사진은 에고티즘꺼 ㅋㅋㅋㅋㅋㅋ
엙도 에고티즘에서 펌하더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한마디로 괜찮았던 드라마였음..
정말 멋진 드라마였음!
케세라 월광 나올때 가슴이 같이 ㅃ쭘빠뿜빠...ㄷㄷㄷㄷㄷ..발리 쥔공들 생각나서 맘이 아팠어요..늬들도 인생 찾아가지..거기서 왜 다 죽니...ㅠ.ㅠ
DVD나오면 꼭 살꺼라규~
구구절절 공감되네요. ost도 정말 훌륭했어요.
나 디비디 꼭 산다규 ㅠㅠㅠ진짜 ost,영상,연출,배우들,연기,스토리,장면하나하나가 신선하고 흥미롭던 완소드라마라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ㄱ ㄱ ㅑ~!!!
이야 꿈보다 해몽~ 하지만 좋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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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니 카메라감독님이셨군요...진짜 감각있으시다..
역시 강명석씨 글은 딱 제 스탈..ㅋㅋㅋ구구절절 동감입니다....정말 괜찮은 드라마였어요...ㅎㅎㅎ
글 정말 잘쓰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