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自畵像)
"상쾌한 아침입니다"는 새벽 6시 부터 아침 8시까지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예전 토크 쇼 프로그램이다.
겨울의 말미, 전날 내린 겨울비는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엔 군데군데 물이 고여 몹시 질척거리며 그늘진 곳은 아직도 쌓인 눈이 녹아내리고 있던 계절, 남대문 시장에 중계차를 버텨놓고 현장코너를 진행하기 위해 담당피디를 따라 나섰다. 겨울 말미라지만 새벽 6시는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기에 노천 시장이지만 조명이 없으면 방송이 불가능했다. 야외 노천의 조명은 어마 어마한 기자재와 인력을 필요로 했다. 춥고 질척한 날씨였지만 현장중계 중엔 이런 저런 생각이 틈낼 새가 없다. 필요이상 현장중계가 길어진 것이 현장 중계가 어려운 시장이려니 여겼을 뿐, 이후에 벌어 질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방송시간이 지나고 우린 철수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 다녔다. 특히 신출내기 조연출에겐 온갖 잡다한 일이 언제나 산더미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 출연자를 다독이고 보조스텝을 보내며 조명 팀엔 방송했다는 확인 서류에 서명하고, 카메라 라인 (당시는 어마 어마하게 굵고 무거운) 거두는 일을 돕고, 추스름의 시간이 지나 철수 준비가 끝났는데 담당피디가 보이질 않는다.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가까운데도 행방이 묘연하다. 중계 팀은 아침 식사를 하고 예정된 다른 방송에 투입돼야 한다. 나만 해도 야외 촬영 팀과 예정된 취재를 가야하고 섭외와 편집을 마쳐야한다. 신출내기 피디는 남대문 시장을 또다시 튀어(?) 다닌다. 선배피디를 찾아서.
돌아다니다 할 수 없이 중계차 쪽으로 달려가는데 마침 좁은 시장 골목에서 선배를 만났다.
"선배, 선배님, 지금 스텝들이 선배님을 무척 기다리고 있어요." 선배는 대답 없이 종종걸음으로 기술 감독에게 다가갔다. 높다란 중계차 조수석에 앉아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민 감독에게 귀엣말을 하며 손에 들고 있던 돈다발을 기술 감독 손에 쥐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중계차 앞문을 벌컥 열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쥐고 있던 돈다발을 밑에 서있던 선배피디 얼굴에 세차게 뿌렸다. 그때 기술 감독이 무어라 소리 쳤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때의 장면 하나 하나가 눈에 선하다.
얼굴로 뿌려진 돈다발은 펄렁 펄렁 날리며 일부는 얼굴에 일부는 질척질척한 시장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곧 바로 흩어진 돈을 줍느라 선배는 질척대는 시장바닥을 헤 짚고 다닌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아침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여기는 남대문 시장 사람 많은 곳, 사람들은 점점 불어나고, 탱크처럼 우람한 중계차는 더욱 시선을 잡아끄는데 그 밑에 흩어진 지폐를 줍느라 바쁜 손을 움직이는 선배피디의 날랜 손이 얼마나 빨랐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선배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출연했던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쪼찡( 쪼아 먹다 가 어원인지 불명이나 방송 출연을 빌미로 돈을 뜯는 것)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낸 이유가 있었다. 기술 감독이 그 자리를 떠나며 내게 알려준 사실이었다.
그날, 나는 이산가족 찾기 때 흘렸던 눈물보다 많은 눈물을 시장 바닥에 쏟았다.
죽고 싶을 만큼 밀려오는 창피함, 모멸감, 실망...
그러나 그때의 일이 소리 소문 없이 어떻게 무마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그 장소에 있었던 나는 왜 잠자코 있었을까? 과묵함일까? 비겁함일까?
엄청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자의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이원표, 독립운동가 후손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전 KBS 교양국 프로듀서 |
말을 바꾸어 보자.
애국지사이신 할아버지와 그 덕으로 가난했지만 대학을 마칠 수 있었던 내가 가졌던 의문을 한국독립유공자협회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작고하신 외삼촌께 질문을 드렸다.
삼촌, 일본군 중위까지 지낸 박정희가 감희 독립운동을 했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 그건 왜놈이 항복하고 한국인을 귀국시키기 위해 임시정부에서 제 3지대의 신분을 차용한 거야."
말하자면 한국인이 증명되어야 귀국 할 수 있기에 그 방법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꾸민 이가 현존하는 애국지사고 그 작업을 시도하려 故 장준하 지사님을 회유하려다 고인 생전에 뺨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로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 핀잔만 돌아온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삼대가 빈곤으로 고생한다는데 돈이 없으면 광복회장을 할 수 없다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사실일까?
악의에 찬 모함일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독립기념관'은 천안지역 기념관이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이 이미 아니라고. 이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구십이 넘은 애국지사가 우주파워 박근혜 대통령을 따라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모르며 황공해 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TV로 보아야 했다. 그분 애국지사, 젊은 시절에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가 보셨을까?
보름 전 영등포에 있는 '하이 서울 유스호스텔'에서 광복회 회의가 있었다.
회장의 인사말과 예산 집행 내역 등 관련된 진행을 하는 중 지나는 말처럼 흘린 회장님의 말씀이 이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좋은 사람이라 잘 대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구먼." 반성을 한다는 말인가? 고찰의 결과가 그랬다는 것인가? 그 회의에 참가한 누구도 이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우리의 독립정신은 현재의 풍요로운 시선에 묻혀 잔뜩 취해 가는가? 그 취함으로 아주 잊혀 지길 원하는가?
존경하는 나의 벗이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였다.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 앞 머릿돌 사진, 거기엔 박정희라 새겨져 있었다. 왜놈 만주군 중위 박정희의 이름 앞에 머리를 조아려 묵념을 올렸던 생존 애국지사, 독립 운동가의 후예들, 그리고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쓰는 동안 건너방 TV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 "지금껏 의리를 지켜왔는데 내 건강을 누가 지켜 주지?"
우리의 고독한 바람은 오늘도 나만의 안락함을 꿈꾸는가? 내 자아의 발로는 혼 일까? 한 일까?
이 변명이 진정한 나의 반성과 성찰의 결과이길 바라면서...